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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년기

무너지고 사라지지만, 그래도 계속 산다.

치뤌기(1)

by 선우비

1.

올해도 어김없이 여행의 계절이 돌아왔다. 22년부터 시작된 우리의 여름 여행은 한 달, 보름, 열흘에 이어 이번에는 일주일. 해가 갈수록 여행 기간은 차츰 짧아지고 있다. 여행에 흥미를 잃어서라기보다는, 오르는 물가와 노후 대책이 절묘하게 맞물린 결과다.

작년에는 전라도 광주 이북, 올해는 그 아래로 가보기로 한다.
강진, 해남, 완도, 목포를 일주일 동안 훑어보기로 했다. 지역은 넓고 시간은 짧다. 한 곳에 오래 묵으며 주변을 둘러볼 여유는 없을 듯하다. 결국 매일 다른 숙소를 예약하기로 했는데, 원하는 곳을 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숙소 예약에만 다섯 시간이 넘게 걸렸다.

오래 걸린 이유가 있었다.

강진은 '반값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올해에는 벌써 기금을 다 사용했다가 추가 예산을 편성받고는 7월 1일부터 다시 지원을 하기로 했단다. 마침 우리 여행 기간과 겹쳐서 냉큼 신청을 했다. 더불어 인당 7만원의 가격에 밥도 주고 잠도 재워주는 농촌민박 체험프로그램 '푸소(FUSO)'라는 게 있어서 해당 사이트에 접속했다. 푸소제도에 가입한 농촌민박들이 주르륵 떴다. 우리가 관광할 동네에 있는 민박을 선택하기 위해 이것저것 눌러보는데, 우리가 가는 날이 평일인데도 한옥에 근사한 마당을 갖춘 집들은 대부분 예약 완료 상태였다. 남은 것 중에서 괜찮아 보이는 집들을 골라 예약했다. 입금을 해야 예약이 완료되는 시스템이라 두 명분으로 14만 원을 입금하고 계속 여행 계획을 짜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저희가 그날 여행을 떠나서요… 죄송한데, 예약을 취소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 일정이 있으면 미리 날짜를 막아놨어야지! 주인이 시골 사람이라 이런 시스템이 익숙하지 않은 건가 싶었다.

다시 다른 푸소를 예약했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또 전화가 왔다.

“아이고, 그날 단체 손님이 오는데 깜빡하고요… 예약 가능으로 놔뒀네요. 죄송합니다.”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이런 시스템을 운영하려면 최소한의 교육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강진군청은 이런 일이 푸소의 이미지를 갉아먹는다는 걸 모르는 걸까. 제대로 좀 교육하라고!

씩씩대며 세 번째 푸소를 예약했다. 다행히 그날은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이틀 뒤, 또 전화가 왔다.

“… 학생 단체가 오기로 했는데요, 깜빡하고…”

이쯤 되니,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지 감이 잡혔다.

푸소는 1인당 7만 원으로 정해져 있다. 사람이 많을수록, 즉 단체일수록 푸소 주인에게 이익이 더 돌아가는 구조다. 밥을 제공해야 한다 해도, 두 사람보다는 네다섯 사람에게 차려주는 게 훨씬 수지가 맞을 테니.

처음부터 '4인 이상만 받습니다', '단체만 받습니다'라고 공지하면 좋겠지만, 비수기에는 두 명이라도 오는 손님이 반가우니, 일단 '2인 이상'이라 적어두는 셈이다.

이런 일이 반복될 걸 알면서도 왜 굳이 '입금 완료 후 예약 확정' 시스템을 고집하는 걸까. 환불만 벌써 세 번. 귀찮기 짝이 없다.

오스 씨는 벌써 강진이라는 동네에 대한 인상이 나빠졌다고 한다.
나는… 글쎄...

망해가는 시골을 살려보자고 아이디어를 짜낸 공무원들,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머리를 굴리는 시골 사람들, 그리고 그런 프로그램에 혹해 예약을 시도하는 도시 사람들. 이들의 작은 수 싸움이 보였다. 비록 이번엔 피해자 신세지만, 시스템 자체는 흥미로웠다.

그래서 세 번째 환불 전화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았습니다.” 한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마 전화 건 쪽이 더 놀랐을 것이다.

강진에서는 2박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결국 하루는 시내 호텔에서 지내기로 했다. 또 하루는 다행히도 한 군데 푸소가 예약을 받아주어서 우리도 농촌민박 체험을 하게 되었다. 확언컨데 아마도 그곳이 강진에서 제일 좋은 푸소일 것이다.


2.

범일동 재개발로 게이바들이 하나둘 이사하게 된 상황을 기록하는 프로젝트, 일명 <일동졸업>. 함께하는 멤버들을 우리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먹었다.

총 8명이 모이기로 했고, 나는 1킬로그램의 연어와 2.5킬로그램의 소갈비찜을 준비했다. 몇 번 해본 파티니까, 거의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요리를 해서 내놓았는데… 아뿔싸!

샐러드도 미리 깔아 두었건만, 음식이 너무 빨리 사라졌다.
뭔가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새우!

늘 내놓던 구운 새우가 이번엔 없었다.
코스트코에서 흰 다리새우 가격을 보고 놀라 지나쳤고, 깜빡 잊고 대체품도 사지 않았다.

평소처럼 두 판만 구웠어도 딱 맞았을 텐데.

허둥지둥 냉동 김치전을 굽고, 하가우 만두를 쪄내며 안주를 조달했다. 위기는 간신히 넘겼지만, 정작 애들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쉬워...

설거지를 하며, “다음엔 꼭 새우를...” 중얼거리자, 옆에서 오스씨가 한마디 보탰다.
“소갈비도 고기 양이 줄었어. 뼈가 너무 크더라고. 예전보다 살코기가 덜 붙어 있었어.”

그러고 보니 그랬던 듯도 하고.
하여간 비싸지거나, 줄어들거나.

우리는 지금, 그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3.

재개발은 비단 범일동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우리 집도 요즘 난리다.

오스씨는 웬만해선 병원에 가지 않는 사람이다. 집 앞 단골 내과 병원(의사가 거의 우리집 주치의 수준)에서 처치 가능하다 싶으면 냉큼 달려가지만, 동네를 벗어날 것 같다 싶어지면 미루고 또 미뤄서 병을 키우는 스타일이다. 특히 치과에 대한 두려움은 대단해서, 꽤 오랫동안 나와 신경전을 벌였다.

그러다 결국, 어느 날은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 모양이다.
며칠째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알아서 할게, 말만 하고 버티더니 마침내 밥 한 톨 씹어 넘기기 어려워지니 그제야 병원에 다녀왔다.
그리고 받아 든 건… 500만 원짜리 공사 견적서.

“이쪽부터 저쪽까지 전반적으로 무너져 내렸고요, 지금은 손쓸 수 없고요, 새롭게 구축해야 하고요…”

아니 진작 좀 관리하지! 치아 보험 하나 없이 대체 뭔 배짱이야.

참고, 미뤘다가… 결국 어느 날 ‘무너졌습니다’ 통보를 받는 식으론 더 이상 못 살아!


아파트도 요즘 돈 달라며 아우성이다.
어느덧 17년 차에 들어서니, 전기제품도 하나둘 맛이 가기 시작하고, 단종된 부품 탓에 더 비싼 제품으로 교체해야 하는 상황이 잦아졌다.

도어록과 공동 출입문 시스템을 교체한다며 몇 주간 단지 내가 시끄러웠다.
백만 원 단위로 돈이 나갈 거란다. 조금 더 싼 제품도 있다는데, 그걸로 하지 왜 이걸 했냐며 주민들 사이엔 말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문제에선 철저한 숙맥이라, 그냥 “알아서 해주세요” 쪽이다.
그래서인지, 종종 ‘호구’라는 소리를 듣는다.

나이 들수록 더더욱 이런 일들이 귀찮아질 텐데, 그럴수록 남이 내리는 결정의 무게가 더 커질 텐데…
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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