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남도 여행기 8
토착 왜구, 울돌목에 서다
원래는 해남을 깊게 여행할 계획이었다. 유튜브만 봐도 가보고 싶은 곳이 줄줄이다. 하루는 땅끝마을, 하루는 읍내에서 맛집 탐방. 이게 딱이었다.
그런데 할인 가격으로 ‘솔비치 진도’를 이용할 수 있다는 말에 모든 일정이 뒤집혔다. 강진에서 출발해 완도를 찍고, 해남을 하루 만에 훑은 뒤, 다음 날 오후 2시까지 진도 땅끝 리조트에 도착해야 하는 강행군 코스. 사실상 해남을 건너뛴 셈이다. 다음엔 해남만을 목적으로 다시 와야겠다.
해남에서 진도로 향하는 길목, 진도대교를 건너면 우수영 관광지가 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쿵 하는 명량해전의 격전지다.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리더니, 가까워질수록 빗발은 거세졌다. 목적지를 몇 킬로 앞두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다.
“자기가 토착 왜구라서 오지 말라고 막는 거 아냐?”
낄낄거리며 차를 몰아 간신히 도착했다.
폭우를 피해 일단 판옥선 전시관으로 몸을 피했다. 당시 상황을 재현한 모형이 즐비하고, 벽면에는 이순신 장군의 말이 새겨져 있었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외우던 그 말.
“若無湖南 是無國家 (약무호남 시무국가)”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이 말은 처음 들었다. 최근 들어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호남인들의 기여를 생각해 보면 선견지명이 대단하시다는! 한산도대첩과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영남인들도 노력하자, 이제!
“若無嶺南 是無國家 (약무영남 시무국가)”
비가 잦아든 틈을 타 스카이워크로 향했다. 발밑은 투명 유리, 그 아래는 칼날 같은 물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울돌목의 바다는 ‘흐른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뒤엉키고 뒤틀리며 흰 포말을 토해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바다 밑에서 거대한 손으로 물을 비틀어 짜는 듯했다.
괜히 발끝이 움찔거렸다.
‘저기 빠지면 뼈 한 조각 남지 않겠구나.’
이런 해상 던전이 있는 줄도 모르고 기세등등 왔다가 모조리 수장된 왜구들. 쯧쯧.
스카이워크를 건너면 명량해전기념관이 있다. 전투 모형, 충무공의 초상, 무기와 전략도 등 임진왜란 덕후라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우리는 그 정도 덕후는 아니어서 그냥 그 모든 걸 집약했다는 4D 영화를 관람했다. 혹시 유치원생과 동행한 게 아니라면, 보지 마...
터덜터덜 상영관을 빠져나오니, 마침 학생 단체가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여러분은 명량대첩만 알고, 그 이후는 잘 모르지요? 전투는 이겼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장군은 군산까지 후퇴했고, 왜군은 다시 남도를 짓밟았습니다. 민간인들에게 잔혹한 보복을 한 거지요. 그럼에도 호남 사람들은 장군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해설사는 호남인의 기개를 다시 강조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옛날 사람 마음을 당신이 어떻게 알까?’
전날 읽은 김훈의 문장이 스쳤다. 난중일기에는 이런 기록이 많다고 했다.
“누구누구의 목을 베었다.”
대부분 굶어 죽기 직전 군량미를 훔친 자들이었다. 인정사정없는 사형. 전쟁을 수행하는 장수의 덕목일지는 모르겠으나, 과연 민초들이 진심으로 좋아했을까?
모를 일이다. 옛사람의 정서는, 지금의 우리와는 다를 테니까.
기념관을 나서니 바람이 차게 불었다. 멀리 스카이워크가 다시 보였다. 유리판 너머, 그 기묘한 소용돌이는 여전히 바다를 쥐어짜고 있었다.
극우 플래카드 청정지역
진도에 들어서자마자 향한 곳은 <신호등 회관>. 꽃게살비빔밥으로 유명한 집이다.
“남도 와서 낙지 한 번도 안 먹었어.”
오스씨는 낙지비빔밥을 주문했고, 나는 당연히 꽃게살비빔밥을 시키려는데, 메뉴판에 낯선 이름이 눈에 띄었다.
‘청게비빔밥’.
청게? 기장시장에서 파는 작은 돌게 같은 건가? 남도에 와서 처음 보는 이름이다. 호기심이 나를 이겼다. 시켰다.
기대 속에 나온 건… 성게비빔밥이었다.
꽃게 옆의 ‘성게’가, 순간 내 눈에 ‘청게’로 보였던 것. 허탈했다. 부산에선 흔한 성게비빔밥이라니. 하지만 이내 반찬 맛을 보자 마음이 화창해졌다. 이 집은 반찬을 무제한으로 가져다 먹을 수 있었는데, 김과 코다리무침이 특히 압권이었다. 두 번이나 더 가져다 먹었다.
계산대에는 성남시장 시절의 젊은 이재명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걸 보며 갑자기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에서는 부정선거 어쩌고 하는 극우세력의 플래카드를 한 번도 못 봤어.”
세계적인 여행지로 부상하고 있는 부산 광안리에도 그들의 플래카드가 차고 넘치는 마당에.
극우(+국민의힘) 플래카드 청정지역. 남도 여행의 확실한 장점이다.
운림산방, 예술 가문의 그림자?
진도의 중심에 자리한 운림산방(雲林山房). 이곳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거장 소치 허련(小癡 許鍊)이 말년에 그림을 그리고 제자를 길렀던 공간이다. 지금은 그의 생가와 정원, 그리고 허련과 후손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정원에 들어섰을 때 잠시 햇빛이 비쳤지만, 이내 빗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사진을 몇 장 찍고는 전시관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허련의 시. 서. 화가 굵고 힘 있는 붓선으로 관객을 붙든다. 담묵으로 그려낸 산과 물, 소나무와 구름. 옷깃에 맺힌 빗방울을 털던 손이 절로 차분해졌다. 작품 하나하나를 지나칠수록 먹빛 풍경 속으로 더 깊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문득 생각이 스쳤다.
‘내 표현력, 왜 이렇게 빈약하지?’
고풍스럽다, 차분해진다… 이런 말밖에 못 하는 나.
예전에 한국화에 빠져 책을 사 모으던 시절도 있었는데, 해외 미술관 순례에 빠지면서 한국화와는 멀어졌다. 색채가 강렬한 추상화가 어울리는 아파트를 벗어나, 빗속에서 마주한 정원에 서니 새삼 느낀다.
'확실히 한국 산수화가 내 정서에 더 가깝구나.'
다시 선조들의 붓길을 따라 시간여행을 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아파트 집돌이 주제에 과연…
허련은 조선 후기 남종화 계통을 확립한 화가였다. 임금 앞에서 그림을 그린 가문의 ‘최고 아웃풋’이랄까? 말년에 고향 진도로 내려와 제자를 길러 화맥을 잇는 데 힘썼고, 그 DNA는 대를 이어 전해졌다. 가업을 중시한 이 집안은 무려 5대째 화가를 배출했다. 그중 허건(許楗)은 허련의 손자로, 우리에게 ‘남농’이라는 호로 잘 알려져 있다. 그 맥은 지금도 이어져, 운림산방의 명예관장은 남농의 아들 허문 화백이 맡고 있다. 전시관에는 그들의 작품이 허련의 그림과 나란히 걸려 있었다.
이름을 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허련, 허형, 허건, 허문… 직계는 하나같이 외자다. 그림을 그리지 않은 방계는 두 글자 이름도 있던데, 이 집안에서 외자 이름은 어떤 상징이었을까?
이름을 곱씹다가, 갑자기 못된 상상이 따라왔다.
누가 더 붓을 잘 잡느냐로 벌어지는 형제들 간의 은근한 경쟁.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려는 치열한 갈망.
승자는 외자 이름을 얻게 되는 시스템이었을까?
먹빛보다 더 짙은 질투, 묵향보다 더 날카로운 긴장감이 이 집안을 감쌌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운림산방은 이렇게 고요하지만, 그 시절엔 어쩌면 폭풍 같았을지도...(자손님들, 죄송!)
허련의 호쾌한 필치에 감탄하면서도, 내 눈길을 오래 붙든 건 후손들의 그림이었다. 특히 날카로운 선이 돋보이는 허문 화백의 작품 앞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한 아이는, 세상을 향해 더 날카로운 붓을 들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