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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년기

어떻게든 쥐어짜서 여름 여행

파뤌기(4)

by 선우비

8.

제1회 부부행 – 온천장 편


연일 낮 기온 30도 돌파. 바깥출입은커녕, 집 밖을 힐끗 쳐다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밤이 되면 또 열대야. 에어컨을 켜고 자면 다음 날 반드시 목에 칼칼해진다.

십 년 전만 해도 바닷가 동네에 사는 특권 중 하나가 ‘한여름에도 에어컨은 안 켠다’였는데, 이젠 에어컨을 켜도 숨이 턱턱 막힌다.

지구온난화가 ‘미래의 위협’이라고? 아니다. 이미 와 있다.
맨날 에어컨 빵빵하게 틀고 사는 부자들(특히 백악관에 사는 것들)이 “지구온난화는 거짓말!” 하는 게 얼마나 우스운지…

요즘 우리 부부의 상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에어컨 아래에서 소파와 한 몸.

하지만 이렇게 집에서만 뒹굴다간 제 명에 못 죽겠다 싶어 ‘뭐라도 하자’는 강박이 만들어낸 프로젝트가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부산사람의 부산여행, 줄여서 부부행!
차 타고 나갔다가 그냥 집에 돌아오는 소풍 따위가 아니라 정식으로 여행지에서 1박을 하고, 그 주변을 구경하는 진짜 여행이다.


첫 부부행의 목적지는 온천장으로 정했다.
숙소는 물 좋기로 소문난 녹천호텔로, 이곳의 특징은, 방마다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욕탕이 있다는 것.
온도 조절까지 가능해서 편리하긴 한데… 욕조 모양이 문제였다.

드러누워 있기에는 어정쩡하고, 앉아 있기에도 불편하다. 게다가 욕조 머리맡 바로 뒤에 떡하니 변기!
결국 찍는 사진마다 변기가 인증샷처럼 함께 등장했다.
…온천의 낭만은 어디에.


온천장은 맛집 천국이라고 하길래 기대를 한껏 품었다.

첫 코스는 부산 대표 카페 모모스 본점.
아름다운 정원 덕분에 사람은 터져나가는데, 앱으로 주문하니 기다림은 제로. 좋다!
커피는 맛있고, 정원은 아름답고, 사람들은… 시끄럽고. 그래도 또 가고 싶은 뭔가가 있다.

저녁은 전통의 맛집 대신 유튜브 소개 맛집을 따라가 봤다.
영상 속 고기는 반짝반짝 맛있게 구워지던데, 현실은… 알바의 손길 따라 서비스가 요동치는 구조였다. 우리 테이블은 그 ‘요동’의 바닥에 걸렸다. 결국 실망만 한가득 안고 나왔다.

그때 그냥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이번엔 괜찮겠지 하면서 2차로 간 곳은 역시 유튜브에서 본, ‘주인장이 쪼매씩 쪼매씩 안주를 내준다’는 이자카야. 쪼매씩 자꾸, 쪼매씩 계속 주니까 나중엔 배가 터져나가서 입에 넣을 수도 없었다. 맛도 사실 그다지... 그냥 모모스 커피처럼 남들 다 가는 데로 갈 걸… 에잇! XX의 음식 유튜브!

배 꺼트릴 겸 산책을 나갔더니, 주변엔 온통 여자 불러 노래하는 집들뿐.
동성애는 변태라고 욕하는 인간들을 모조리 데려와 야경 투어 해주고 싶었다.

“이게 니들이 말하는 정상 성욕이란 거지, 이 양반들아!”

노래방은 이렇게 많은데, 왜 내가 갈 수 있는 노래방은 하나도 없냐고!

다음 날 아침은 호텔 할인 쿠폰으로 금수복국에 갔다. 그리고 또다시 후회.
이 집은 단 한 번도 만족한 적이 없는데, 왜 매번 까먹고 다시 오는 걸까.
나이 들면 생기는 무서운 병, 맛없는 집을 자꾸 까먹는다.

제1회 부부행 – 온천장 편, 대체적으로 실패였던 걸로!
다음엔 부디 성공하길 바라며, 부부행 2탄은 어디로?


9.

부부행의 실망 이후, 바깥출입 욕구가 완전히 사그라든 어느 날이었다.
소파에 널브러져 SNS를 하던 중, 눈이 번쩍 뜨이는 광고가 떴다.

대한민국 숙박페스타 – 가을 편

작년에도 이 할인권으로 꽤 쏠쏠하게 여행을 다녔던 기억이 떠올라 바로 클릭했다. 게다가 재난지역으로 선정된 곳은 5만 원 할인까지 해준단다. 지난여름 수해 피해를 떠올리면 마음이 숙연해지지만, 속마음은 솔직했다.

'이게 웬 떡이냐!'

여러 후보지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곳은 진주였다.
마지막으로 진주에 간 게 언제였더라.
다른 여행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진주냉면만 먹고 나온 적은 있었지만, ‘진주를 여행’한 건 아주 오래전이었다.

기억을 더듬다 보니 <왕의 남자>가 전국을 휩쓸던 시절이 떠올랐다. 원작 연극 <이>가 촉석루에서 공연되던 때, 야외 무대에서 그 연극을 보다가 너무 더워서 기절 직전까지 갔던 추억이 스멀스멀…

진주 여행지를 검색하다가 눈에 들어온 곳은 유등박물관이었다. 더운 날 시원하게 실내에서 유등을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이 확 끌렸다. 게다가 바로 옆에는 남강을 유람하는 김시민호 탑승장도 있다.

“낮에는 너무 덥겠지? 그럼 호텔에서 뒹굴다가 해 질 무렵에 유등박물관 보고, 김시민호 타고 오자.”

숙박페스타 덕분에 조식 포함 4만 원대로 호텔 예약 완료. 이 정도 가격이면 굳이 빡빡한 여행 계획 따위 세우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하다.

하지만 막상 여행 당일이 되니, “이렇게 호텔에서만 뒹구는 건 좀 죄 짓는 것 같지 않아?” 이런 생각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급 결정. 남해 보리암으로 향했다.

사실 지금 타는 자동차를 사게 된 데에는 이곳이 큰 영향을 끼쳤다.

몇 해 전, 보리암 일출을 보러 새벽에 금산 꼬불길을 오르다 급경사에서 거의 죽을 뻔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한 산길에서 마주한 급경사. 절망의 배기음을 토해내며 뒤로 밀리지 않으려고 울부짖는 낡은 차가 선사하는 공포는 경험한 자만 안다.

“다음 차는 반드시 이 길을 우아하게 올라갈 힘 좋은 차로!”

그리하여 극악 연비의 V6 3.3리터 가솔린 엔진이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다는 슬픈 사연.

하지만 낮에 가보니, 예전처럼 고난이도의 제3주차장까지는 갈 수 없고, 비교적 완만한 제2주차장까지만 진입이 가능했다. 그렇게 설욕전은 실패했고 다음을 기약.

보리암은 예전에 꼼꼼히 둘러본 적 있어 이번엔 가볍게 구경만 하고, 마침 대웅전에서 들려오는 스님의 경 읽는 소리로 잠시 땀을 식혔다.

점심은 남해의 유명 맛집 ‘우리식당’에서 해결했는데, 남들 다 먹는 멸치쌈밥 대신 갈치조림을 시켰다가 대실망. 보복 심리로 배가 부른데도 굳이 ‘금산산장’에서 컵라면을 시켰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감탄사가 절로 터졌다. 역시 진정한 맛집은 라면 맛으로 증명된다.

근처의 단군을 모시는 종교 시설에도 들렀다.

기복신앙의 끝판왕 같은 풍경에 씁쓸함이 밀려왔지만, ‘인등을 켜면 복이 온다’는 말에 또 혹하는 게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찌는 듯한 더위와 오랜만의 산행으로 체력이 바닥났다. 진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하기 싫을 정도로 녹초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천왕식당'에서 육회비빔밥과 불고기를 먹으니 체력이 순식간에 회복됐다. 역시 고기의 힘은 위대하다.

예상대로 유등박물관은 아기자기한 즐거움으로 가득했고, 김시민호 유람선에서 본 남강의 야경은 꽤 근사했다. 시원한 강바람에 마음이 느긋해졌고, 사진을 찍어주던 승무원의 입담 덕분에 여행의 친절이 더욱 달콤하게 느껴졌다.

호텔로 돌아오니 벌써 잘 시간이었지만, “이대로 그냥 잘 수는 없어.” 근처 술집을 검색해 와인 한 잔, 칵테일 한 잔으로 진주 밤의 풍미를 만끽했다.

다음 날 아침, 조식을 먹으러 나가려는데 발이 아파 살펴보니 발가락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결국 한숨을 푹 쉬고, 계획했던 이틀 차 일정을 과감히 포기하고 곧장 부산으로 고고!

싼 값에, 알차게 즐긴 진주 1박 2일. 평일이라 더 조용하고 한가롭게 여행할 수 있어 운치가 있었다. 올해 은퇴를 앞둔 오스 씨와, 내년부터는 이런 평일 근교 여행을 더 자주 오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기대 이상이었던 진주성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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