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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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670'을 본 사람은 행운이다.
아직 못 본 사람도 행운이다. 마음만 먹으면 그 행운을 언제든 잡을 수 있으니까.
퀴어 영화 중에 ‘아, 참 맛있게 잘 만들었다’ 하고 감탄했던 마지막 작품은 '윤희에게'였다.
그런데 이제는 '3670'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다. 아무래도 레즈비언 서사인 '윤희에게'보다 훨씬 감칠맛이 풍부하게 느껴진다.
스토리와 감상 포인트는 이미 많은 리뷰가 나와 있으니, 여기서는 조금 더 내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탈북 게이 철준은 소위 ‘일틱’을 최고의 매력으로 치는 게이들이 반길 만한 비주얼을 갖췄다. 남성적인 태도에 어딘가 부성애를 자극하는 분위기까지 풍기니, 나이 든 게이들도 흔들리기 쉽다. 영화 속에서는 의외로 인기가 없는 것처럼 나오지만, 현실에서 ‘촌스럽게 생긴 탑’은 스테디셀러다.
작고 귀여운 영준은 스스로를 ‘안 팔리는 게이’라고 자책한다. 하지만 킹카 현택의 말처럼, 사실은 게이들이 쉽게 택하는 타입이다. 착하고, 귀엽고, 무엇보다 쉬워 보이는 그 매력 말이다.
잘난 남자 현택은 영화 속에서 모든 인기를 독차지하는 듯하지만, 사실 게이 세계에서 이런 친구들은 생각보다 잘 팔리지 않는다. 패션에 민감하고 깔끔 떠는 모습에서 ‘만남 자리에서 코를 들 것 같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까탈스러운 게이는, 의외로 비인기다.
게이 세계의 셀링 포인트는 크게 두 가지다.
‘일틱’, 그리고 ‘편안함.’
영화 속에는 또 다른 탈북 게이가 등장한다.
뚱뚱하고 수염 난 베어남. 일반인 눈에는 루저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종로에 발을 들이자마자 곧바로 옆 테이블로 ‘팔려간다.’
이것이 게이 세계의 현실이다.
나로 말하자면,
철준과 영준 중에서는 단연 영준이다. 원래부터 귀여운 것에 잘 꽂히는 성격이다.
“그런데 영준이는 시큰둥한데, 철준이가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음… 그럼 철준.”
“만약 현택이가 고백하면?”
“음… 그럼 현택.”
“만약 베어남 탈북 게이가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그건 안 돼.”
그렇다.
사실 나보다 덩치 크지 않으면 다 돼~ 그게 나란 남자.
2.
카운터테너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나는 애매하게 "글쎄"라고 말한다.
솔직히 말하면, 얇고 섬세한 고음은 내 취향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조수미나 소향을 좋아해 보려고 애써왔지만, 여전히… 노력 중이다.
그럼에도 카운터테너 이동규의 부산 공연을 예매한 이유는 단 하나.
라이브를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향도 직접 앞에서 들으면 전율이 인다.”라는 말처럼,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그 울림을 확인하고 싶었다.
공연은 타이틀처럼 바로크 음악 중심으로 꾸며졌다. 그 자체로 굿!
이동규가 두 곡을 부르고 퇴장하면, 연주자가 한 곡을 연주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구성도 굿!
1부는 기타, 2부는 피아노와 더블베이스 반주로 변화를 준 것도 굿!
하지만 정작 메인인 이동규의 노래는 끝내 나를 깊이 빠져들게 하진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성악가들의 노래를 들을 때 느끼는, 목소리 하나만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그 힘이 없었다. 화려한 기교가 분명 있었지만, 연주와의 어울림이 너무 매끄러워서인지 어쩐지 재즈 공연을 보는 듯한 인상마저 들었다. 아마도 바로크라는 장르 특성 탓일지도 모르겠다.
공연 전에도, 공연 후에도,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의 앨범을 음악 앱으로 듣는다.
부드럽게 간질이다가도, 어느 순간 톡톡 자극하는 그 음색. 나쁘지 않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공연장보다는 음원으로 조금 더 친해져야 할 듯하다.
3.
작년에는 나가노 스키 여행을 계획했기에 스키장 통합 시즌권, 일명 X6 시즌권을 일부러 사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는 상황이 다르다. 스키 시즌 동안 스키장 주변에서 한 달 살기를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통합 시즌권은 필수템!
그동안은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대충 타던 스키였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 제대로, 본격적으로, 스키를 ‘배워서’ 타야 한다.
관절은 해마다 낡아가는데, 상급 코스를 편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확실한 기술이 절실하다. 특히 오스씨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제는 거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넘어지면 바로 병원행이니, 기술을 몸에 익혀 안전하게 타야 한다.
작년에 나가노에서 깨달은 점도 있다. 국내 스키장과 달리 눈이 많은 해외 스키장은 파우더 설질이 기본이라, 파우더 전용 기술이 없으면 곧바로 한계에 부딪힌다.
언제까지 이 스포츠를 즐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제 더 이상 ‘내일 배우지 뭐’ 하고 미룰 수는 없다. 이번 시즌이 기술 업그레이드의 마지막 골든타임이다.
9월 9일, 용평·하이원·웰리힐리·지산·강촌이 포함된 X5 시즌권이 판매된다는 소식을 듣고, 딱 그날을 기다렸다가 재빠르게 구매 사이트에 접속했다. 신한카드 첫 가입자에게 다양한 캐시백 혜택까지 준다기에, 카드 발급은 물론 통장 개설, 자동이체 연결까지 풀코스로 완료! 덕분에 30만 원대라는 가격으로 득템에 성공했다.
스키장 한 곳에 일주일만 가도 본전을 뽑는 가격으로, 다섯 곳을 시즌 내내 즐길 수 있다니… 신한카드를 그동안 외면하고 살던 지난날의 나, 칭찬해!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부산에 사는 우리가 실질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스키장은 하이원과 용평, 그리고 가끔 웰리힐리. 웰리힐리는 사실상 갈 일이 거의 없으니, 결국 주력은 하이원과 용평 두 곳이다.
게다가 요즘 하이원은 주말이 아니면 상급 슬로프를 아예 열지 않는다. 결국 우리의 메인 스키장은 용평이 될 확률 99%.
한 달 살기 숙소도 용평으로 정했다. 작년에 미리 알아둔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
“그때 말씀하셨던 OO 숙소, 1월에서 2월 넘어가는 시기에 한 달만 빌릴 수 있을까요?”
“아이고, 그게요… 주인들이 스키 시즌 전체로만 계약하려고 해서, 최소 3개월은 사용해야 할 텐데요.”
부동산은 11월쯤 다시 연락을 달라고 했다.
만약 한 달 살기 숙소를 못 구한다면, 결국 스키장별로 일주일 단위로 왔다 갔다 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아, 상상만 해도 돈도 돈이지만 체력 고갈 확정이다.
서해안 사는 서퍼가 동해안 주민을 부러워하고, 부산 사는 K팝 팬이 서울 팬들을 부러워하듯, 겨울만 되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존재가 횡성군 주민들이다.
제발 우리에게 방을 빌려줄 맘 넓은 집주인 한 명만 만나게 해 주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