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기(2)
4.
작년 10월 10일, 11쌍의 동성 부부가 전국 6개 법원에 ‘혼인평등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두 갈래로 나뉜다.
1. 동성 부부의 혼인신고 불수리 처분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
2. 현행 민법이 동성혼을 배제해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제기한 위헌법률심판 소송
그중 혼인신고 불수리 처분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한 11쌍은 모두 수도권에 거주한다.
소송을 지원하는 단체 ‘모두의 결혼’은 지역 법원에서도 같은 소송이 진행되어야 한다며, 전국적인 확산을 바랐다.
"하실 거죠?"
작년, 우리를 인터뷰했던 호림님이 물었을 때 오스씨에게 다시 물었다.
“할래요?”
“하면 좋지.”
뜻밖에 쉽게 대답해 주었다.
그때의 대화가 꽤 오래전인데, 이제 본격적으로 준비할 시기가 되었다.
얼마 전, 호림님과 '희망을 만드는 법' 소속 류민희 변호사가 집으로 찾아왔다.
"소송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는 겁니다.”
구청에 가서 "우리 결혼할 겁니다."라고 서류를 제출한다. 구청 직원은 "한국에선 동성결혼이 안 됩니다. 서류를 처리할 수 없습니다."라며 반려한다. 그럼 그 불수리 처분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 결혼신고서를 제출하는 것.
이성애자 부부들이 당연하게, 그리고 너무도 쉽게 해내는 그 일을, 우리는 헌법소원까지 해가며 쟁취해야 한다. 현타가 살짝 오지만, 이것이 우리의 미래이고, 우리의 재테크다.
그리고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 권리를 위해 싸우는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이기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오스씨는 혹시라도 직장에서 소문이 나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했지만, 변호사는 그럴 일 없다고 안심시켰다. 나 역시 30년 가까이 크게 숨기지 않고 게이로 살아왔지만, 당당함 때문에 손해를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올해 말이나 내년 초쯤이면, 나는 아마 혼자 구청 창구에 서 있을 것이다. 오스씨는 근처에서 몰래 지켜볼 예정. 같이 가서 힘을 보태줄 친구들과 변호사도 이미 확보해 두었다.
걱정은 단 하나, 사진 많이 찍을 건데… 지금 나온 이 뱃살, 어떻게 하지.
그때까지 죽어라 빼야지!
5.
홍예당의 또래 회원 폴님은 루마니아에서 일하는 애인과 장거리 연애 중이다. 얼마 전 그 애인님이 한국에 오셔서 함께 식사했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는데, 이야기 소재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꼭 오십 대 아줌마들끼리 모여 수다 떠는 기분이었다. 다음에 언제 한국에 오실지는 모르겠지만, 또 만나서 마음껏 수다 떨고 싶다.
6..
올해 두 번째로 대구 퀴퍼에 참여했다. 참여기는 이곳을 클릭.
https://brunch.co.kr/@sunwoobi/242
7.
마침내 <일동졸업> 전시회가 끝났다. 준비 과정은 글을 썼지만 후기도 쓰고 싶다. 나중에 따로 써야지.
전시를 함께 진행했던 두 게이바 사장님들이 배려해 주셔서, 전시물은 당분간 가게에 그대로 두기로 했다. 혹시 지금이라도 이 글을 읽고 계신다면, 클로즈와 1988 라운지에 놀러 가면 전시를 계속 볼 수 있다.
마지막 날, 졸업식을 마치고, 함께한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왔다. 몸을 씻고 소파에 앉자마자 오스씨도 나도 완전히 방전된 걸 느꼈다. 눈꺼풀이 저절로 감겨 초저녁부터 그대로 잠들었다.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피곤하다니. 그래도 마음만큼은 참 뿌듯하다.
8.
부산시향 정기공연을 이번엔 운이 좋게도 콘서트홀 1층에서 직관했다.
재독 작곡가 박영희 선생의 ‘소리’와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의 초연이 있었다. 다른 날 같은 공연을 관람한 성민 커플은 그 음악을 "귀신소리 같았다"라고 표현했다.
국악을 들을 때면, 그것이 심지어 궁중제례악이라 하더라도 그 장중함이 삶과 동 떨어진 느낌이 들지 않던데(혹시 나 전생에 궁궐에 살았나? 하하), 서양 악기로 국악기 같은 소리를 내면 어딘가 이 세상 소리가 아닌 듯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공연의 타이틀도 ‘승천’인가?
부산시향이 독일 공연을 앞두고 그 레퍼토리를 먼저 선보인 무대였는데, 감상평을 굳이 말하자면 "독일에서 꽤 먹힐 수도 있겠다." 정도.
함께 연주된 시벨리우스 교향곡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글을 쓰기 위해 검색을 해보니, 독일 공연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는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다양한 칭찬 속에서 특히 마음이 아픈 문장이 있었다.
"다만, 이번 순회공연의 여정이 김해공항에서 인천공항, 카타르 도하를 거쳐 베를린에 이르기까지 27시간이나 걸려 단원들이 기량을 발휘하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현지에서 연습 공간 부족으로 일부 단원들이 호텔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연습해야 했는데, 향후 보다 세심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비행만 27시간이라니, 단원들이 활을 긋고 관악기에 숨을 불어넣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지 싶다.
9.
퀴퍼 때문에 대구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 날은 경주로 향했다. 마침 경주시에서 APEC을 맞아 자체 숙박페스타를 진행하며 3만 원 할인권을 뿌렸기 때문이다.
황리단길과 가까운 왕림1984에 묵었는데, 감동적인 조식까지 포함해 6만 원에 트윈룸을 배정받았다. 비수기 + 평일 + 숙박페스타 조합, 이건 그야말로 사랑이다!
늘 가던 왕릉, 첨성대, 황리단길, 교리김밥. 풍경은 뻔하고, 사람은 많고, 사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자꾸 오고 싶어진다. 경주는 그런 도시다.
이번 여행은 금관총 주변을 중심으로 돌아다녔다. 오아르미술관(전시보다도 박물관 자체가 훌륭!), 베이커리 데네브(가격·맛·뷰 모두 A+), 르주르J(음식은 글쎄… 하지만 와인은 굿!), 그리고 이른 아침의 대릉원 산책까지.
다음엔 경주의 어느 곳을 또 파볼까. 벌써부터 기대된다.
10.
동성애자를 아들로 둔 배우 윤여정이 출연한 동성 결혼 소동극 <결혼피로연>을 보러 극장에 갔다. 시간이 되어 극장 안에 들어갔는데, 웬걸. 내 자리에 누가 떡하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잠시만요…” 하고 표를 확인해보니, 아뿔싸. 내일 이 시간 표를 예약해 둔 거였다.
호텔 예약 실수도 모자라 이제 극장 예약까지 틀리다니. 이게 무슨 병일까, 정말 슬펐다.
허망하게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그냥 지금 상영 중인 영화 아무거나 보자 싶어 확인해 보니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가 딱 있었다. 부산 롯데시네마 서면점의 상영작 중 80%가 이 영화였다. 예매하자마자 바로 입장 가능!
리클라이너 좌석의 영화관이라 대부분의 손님이 양말까지 벗고 발을 쭉 뻗고 있었다. 극장 전체에 온갖 발냄새가 진동했다.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박찬욱 감독이 ADHD 모드로 찍은 것 같았다. 자막이 없어 알아듣기 힘든 대사가 많았고, 무엇보다 해고노동자들이 왜 이렇게 다들 잘 사는지 의문이었다. 물론 해고노동자가 잘 살 수 있다. 그런데 저 정도면 다른 방식의 삶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거다.
‘아, 저렇게 여유 있게 사니까 해고를 단순히 존재감 상실 정도로 여길 수 있구나…’
그런 삐딱한 생각이 들자, 영화에 집중하기가 더 힘들어졌다.
물론 고추잠자리 씬은 참 좋았다. 하지만 그 장면만 나중에 쇼츠로 다시 보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반면, 오스씨는 영화가 너무너무 좋았다고!
결국 우리는 영화를 두고 오랜만에 뜨겁게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그게 바로 박찬욱 영화의 매력 아니겠는가.
싫거나, 사랑하거나. 그 사이 어딘가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