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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년기

오래된 기억은 이제 내 것이 아니다

시월기

by 선우비


1.

지난달, 데뷔 30주년을 맞아 찾은 일식집. 그 독창적인 맛이 그리워 다시 방문했다. 예약을 하고 저녁시간에 맞춰 갔지만, 손님은 우리 둘 뿐이었다. 이 자리는 늘 괜찮은 일식집이 들어서지만 이상하게도 오래 버티질 못한다. 이번에 새로 문을 연 곳은 사장님과도 오랜 인연이 있어 꼭 오래가길 바랐는데, 이렇게 손님이 없는 모습을 보니 괜히 불안해졌다.

두 시간 동안 천천히 식사를 했지만 끝내 다른 손님은 들어오지 않았다. 가볍게 화이트 와인을 곁들이기로 했지만, 사장님의 옛이야기와 신세한탄에 맞장구를 치다 보니 한 병이 두 병이 되고, 결국 작은 사케까지 추가 주문. 식사를 마치고 나올 즈음엔 이미 꽐라 직전이었다.

그 상태로 곧장 범일동으로 향했다. '일동졸업전'에 참여한 게이바 '지맨'과 '쿠마' 사장님께 전해줄 엽서를 들고 가서, 각각의 가게에서 칵테일 한 잔씩 마셨다. 역시 졸업 동기이자 새로 문을 연 '악당'에도 감사 인사차 들렀다. 기본만 마시다 나오려고 했는데, 오래전 인연을 만나게 된 게 아닌가. 결국 이 자리 저 자리 왔다 갔다 수다를 떨면서 본격적으로 마셨고, 목 이슈로 평소 자중하던 노래까지 마구 불러댔다고 한다. 아마 이때부터 필름이 끊긴 듯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일동 졸업 전시 중인 '클로즈'까지 들렀다고 한다.

이 나이에 아직도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시다니…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만큼 기분 좋은 술자리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나만 즐거웠다는 게 문제였지만.

서울에서 오신 매너 좋은 분께 계속 대화상대를 요구한 것도 미안하고(얻어 마신 '화요'가 결정타였을 듯), 낯선 남자와 수다 떠느라 소외감을 느끼게 한 오스씨에게도 미안. 자주 만나던 창원 친구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해 “누구?”를 연발한 것도 부끄럽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전에 내가 손절한 친구가 이후 다른 사람들에게도 손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속으로 ‘쾌감’을 느꼈던 것도… 솔직히 미안했다.

“미안해. 나 앞으로 당분간 술 끊을게.”
오스씨에게 그렇게 선언했지만 하루도 안 지나 홍예당 명절모임에 가져갈 보드카를 샀다.

“애들한테만 줄 거야. 나는 안 마셔.”
그렇게 핑계를 깔아 두고는, 명절 모임 끝난 뒤에 범일동에서 만나자, 친구랑 또 술 약속을 잡았다.

결국 명절날 또 한 번 탈이 난 뒤에서야, 지금까지 8일째 금주를 이어가고 있다.
뱃속의 술고래가 “일주일 참았으면 됐다”라고 속삭이며 천천히 기지개를 켜는 게 느껴진다.
오늘은 비까지 오는데… 아, 어디 가지?



2.

홍예당에서는 명절에 쓸쓸함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명절 당일에 일종의 포트럭 파티를 한다. 우리도 몇 년 전부터는 가족이 있는 서울이나 대전으로 가지 않고, 이 파티에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사실 가족과의 관계가 나쁘지도 않고, 역귀성이라 명절 기차표를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가지 않는 이유를 굳이 오스씨에게 늘어놓는다.
"우리 정도 나이면, 명절은 스스로 선택해서 즐길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

일종의 자율감, 혹은 작은 고집 같은 것이 생긴 것이다.

명절 모임에는 게이, 레즈비언, 젠더퀴어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 요즘은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성정체성이나 지향성을 묻지 않는 분위기여서, 나 역시 자연스럽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특히 나처럼 나이 많은 게이가 “너에 대해 궁금해, 설명해 줘” 같은 태도를 보이는 건 꼰대짓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예컨대 눈앞에 있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모르겠어도, 그가 먼저 “저는 젠더퀴어예요. 낯설죠?”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궁금하더라도 혹시 실례가 될까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아예 질문을 하지 않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 사람과는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다. 결과적으로 그 자리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어찌 보면 너무 조심해서 생기는 단점이다.

낯선 퀴어들과 불편함 없이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방법을 누군가 알려준다면 좋겠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일 년에 두 번 있는 명절 모임에서,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다 알아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그 자리에서 함께 술을 나누고, 안주를 나누고, 친구들의 유쾌한 재롱에 웃음으로 화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홍예당의 명절 모임은 그런 자리다. 거창하지 않아도, 서로를 다 몰라도, 그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따뜻한 시간이 된다.


3.

며칠 전 날짜를 착각해 못 봤던 영화 <결혼피로연>을, 연휴를 틈타 드디어 보았다. 처음엔 괜히 보러 왔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소 미국스럽고 산만한 에피소드가 이어지며 집중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영화가 내 취향에 서서히 젖어들기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웃는 얼굴로 극장을 나설 수 있었다.

요즘 들어 예전보다 쇼츠에 더 중독되어 있어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시 회피하고 싶은 충동이 밀려온다. 그러다 보니 영화 중간중간에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그 충동을 억누르고 자리를 지킨 나, 칭찬해.

이 작품은 대만의 이안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이다. 오스씨는 원작을 보지 않았다고 했고, 나는 아주 오래전에 본 적이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오스씨에게 신나게 원작과 비교를 해주었는데, 이후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보다가 충격을 받았다.
나는 원작에서 “게이 커플이 결국 헤어지고, 여자와 남자가 아이와 가족을 꾸린다”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여자가 아이를 게이 부부에게 맡기는 결말이었다. 영화의 배경도 타이베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뉴욕이었고, 미국인 사이먼의 몸매를 ‘거대한 베어 스타일’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왜 이런 기억 왜곡이 생겼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떠올린 장면과 이미지들은 모두 타가메 겐고로의 만화 『아우의 남편』 속 설정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백인/동양인 커플, 아이를 맡기는 여자, 수양딸 등등... 겹치는 이미지가 많았다.

앞으로는 절대 “확신하며” 말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오래전 기억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슬프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4.

올해 부산바다미술제는 다대포에서 열렸다. 홈페이지에서 소개된 여러 작품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끈 것은 프로젝트 팀 ‘오미자’의 <공 굴리기>였다. 낙동강의 발원지인 태백시에서부터 강줄기를 따라가며 채집한 식물들을 모아 만든 거대한 공은, 생태계의 공생과 순환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기발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특히 흥미로웠던 이유는 단순히 감상용이 아니라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체험형 설치물이라는 점이었다. 사람 키보다 큰 ‘식물 공’을 실제로 굴려볼 수 있다고 해서, 친구들과 함께 도전하기로 했다.

시간이 맞는 ‘일동졸업’ 팀의 일부가 모여 공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뭐라고. 옆에서 낯선 사람들이 “으쌰으쌰!” 응원하고, 오미자 팀이 촬영을 해주는 사이, 우리는 모래 반·풀 반의 땅에서 낑낑대며 공을 밀었다. 작품이 말하는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퍼포먼스’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에 붙어 있던 민들레 홀씨들이 온몸에 달라붙어 다들 인간 민들레가 되었다. 제법 유쾌했다.

범일동을 벗어나 친구들과 전혀 다른 공간에서 새로운 추억을 쌓은 것도 좋았고, 뒤풀이에서 먹은 오리고기 역시 훌륭했다. 길고 긴 명절 연휴가 생각보다 알차고 단단하게 채워졌다.


5.

길고 긴 연휴가 시작되면 늘 다짐한다. 이번에는 밀린 책을 읽자고. 하지만 현실에서 내가 손에 쥔 건 책이 아니라 늘 TV 리모컨이다.

나는 숏폼 중독자다. OTT로 영화나 시리즈를 거의 보지 않고, 동시대를 읽기 위해 챙겨보던 예능도 <무한도전> 이후로는 끊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연휴만 다가오면 드라마, 특히 미드(미국 드라마)가 끌린다.

사실 미드를 즐기는 사람은 아니다. 처음엔 재미있다가도 시즌이 거듭될수록 산으로 가는 스토리에 정을 붙이기가 힘들다. 지금까지 내가 결말을 본 5시즌 이상짜리 미드는 <섹스 앤 더 시티>와 <퀴어 애즈 포크> 단 두 개뿐이다. <워킹데드>와 <빅뱅 이론>은 결국 포기했다.

그리고 이제 그 목록에 하나가 더 늘었다.

<굿위치>는 미드 특유의 스트레스가 없다고 해서 가볍게 보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연휴 내내 시즌 5까지 몰아봤다. 미국에서는 시즌 7까지 방영됐지만 국내 OTT에는 5까지만 있다. 특별하지만 자극적이지 않은 캐릭터, 적당한 갈등 구조, 두세 회 안에 수습되는 스토리, 심심한 캐릭터는 과감히 잘라내는 제작사의 단호함까지. 모든 게 ‘그냥 보기 딱 좋은’ 드라마였다. 시즌 6과 7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포효했지만, 연휴 동안 우리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준 것만으로도 제 역할은 충분했다.

반면 국내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은 달랐다. 발랄하고 유치한 CG, 느린 전개에 처음엔 ‘쉬엄쉬엄 보기 딱 좋다’ 싶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눈물샘을 자극하며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더니,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은 채 끝났다. 마치 “시즌 2에서 보자”는 듯이. 원작을 재밌게 읽은 독자로서 이런 전개는 참 아쉽지만, 아마 제작자 역시 속이 쓰릴 테니 욕은 삼켰다.

이런 드라마가 문제다. 잘 나가다가도 막판에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2시간 남짓의 러닝타임 안에서 할 말 다하는 영화라는 예술이 더욱 사랑스러워지는 순간이다.

“드라마, 다신 안 봐.”
그렇게 선언하고 OTT를 헤매다가 결국 김은숙의 <다 이루어질지니>를 클릭한다.

참나. 이게 드라마의 진짜 문제다. ‘다음엔 괜찮겠지’라는 착각을 또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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