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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년기

부산불꽃축제, 더 이상 '축제'는 아닌.

시비럴기

by 선우비

1.

부산불꽃축제를 ‘모두의 축제’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대전의 가족, 서울의 친구들은 관련 기사 몇 줄만 떠도 곧장 연락해 왔다.

“이번에 몇 명 내려가니까 자리 좀 맡아줘.”

좋은 위치를 잡으려면 다섯 시간 전에는 백사장에 나가 있어야 했다. 솔직히 번거롭고 피곤한 일이다. 이렇게 광안리 주민에게 불꽃 축제는 ‘지인 접대’의 의무감에 가까웠지만, 한편으로 나름의 공동체적 감각을 만들어주는 일이기도 했다. 멀리서 모인 사람들이 불꽃을 바라보며 동시에 환호하는 순간만큼은 지역 주민으로 뿌듯함을 안겨줌과 동시에 소소한 특권으로까지 느껴졌다.


그 감각이 무너진 건 2015년이었다. 부산시(당시 시장 서병수)는 백사장의 최전방, 가장 잘 보이는 구역에 유료 관람석을 설치했다. 공공 해변의 최적 시야권에 가격표가 붙는 순간, 이 축제는 더 이상 ‘우리들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조금 일찍 나가 돗자리 하나 펼치면 가족과 친구들을 명당에 앉힐 수 있던 질서가 사라지자, 나의 열정도… 정확히 그 지점에서 꺼졌다.

그 이후 불꽃놀이는 축제가 아니라 ‘비용으로 등급화된 이벤트’가 되었다. 좋은 자리를 유료 관객에게 내준 뒤로는, 그나마 남은 무료 공간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훨씬 치열해졌다. 더 일찍 백사장에 나가야 했고, 출사자들의 자리 싸움도 극에 달해 곳곳에서 고성이 터졌다.


예전에는 공짜였기 때문에 주최 측의 실수나 변덕스러운 날씨까지도 일종의 추억으로 남았다. 하지만 유료화된 뒤로는 작은 삐걱임도 즉각 불만의 근거가 되었다. 광안대교에서 떨어지던 ‘나이아가라’는 중간에 끊기기 일쑤였고, 바람이 잠잠한 날이면 연기가 공중에 갇혀 불꽃이 거의 보이지 않는 날도 많았다.

“돈 받아먹고 저따위로 운영하면 어떡하냐.”

"드론으로 대형 선풍기라도 날려서 시야를 확보해야지!"(그런 기술이 있는지는 차치하고)

유료석에서 본 것도 아닌데, 분노가 즉각적으로 튀어나왔다.

인터넷에는 무료 관람객들이 남긴 후기들이 올라왔다. 한두 시간 전에는 도저히 자리 확보가 안 된다, 화장실 가려면 전쟁이다, 축제 끝나고 귀가하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등등.
그 옆에는 유료 관객의 후기가 나란히 붙었다. 너무 편했다, 바로 앞에서 봤다, 이동 동선이 깔끔했다.

도시는 이렇게 공공의 경험을 분리한다. 같은 불꽃을 보지만, 같은 축제를 경험하진 않는다.

이제 우리는 불꽃 터지기 30분 전에 집을 나와 길가에 서서 잠깐 보고 돌아온다. 광안리 주민의 특권은 귀가길이 빠르다 정도로 축소됐다. 볼거리는 여전히 좋지만, 더 이상 ‘축제’는 아니다. 도시가 공공성을 상품으로 바꿔버린 순간, 축제가 주는 설렘과 두근거림은 회복 불가능하게 사라졌다.


2.

감기에 걸렸다. 또다시. 이상하게도 수영만 시작하면 꼭 감기에 걸리고, 그 감기는 질기게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결국 보름 넘게 수영장에 가지 못했다. 운동만 하면 무슨 저주라도 받은 사람처럼.

젊을 때만 해도 감기 따위와는 인연이 없던 몸인데, 오십을 넘기고 나서는 체질이 달라져버렸다. 아마 무릎 연골 문제로 운동량이 줄어든 탓도 있을 것이다. 운동하면 건강이 나빠지고, 건강이 나빠지니 다시 운동을 못 하는 악순환. 그러다 보니 또래보다 활동량이 적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 몸은 운동화보다 의자와 소파에 더 오래 붙어 지낸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경고음이 이제는 자장가처럼 들릴 만큼 무뎌졌다. 돌아다니지 않아 돈이라도 많이 벌면 또 모르겠는데… 한숨만 늘어난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새해, 가장 먼저 세울 결심 하나가 정해졌다.


3.

올봄에 왼쪽 제2 대구치를 뽑고 임플란트를 심었다. 그때 치과 선생은 나에게 거의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남겼다.

“앞으로 위·아래 대구치를 모두 치료해야 될 거예요.”

그 말이 농담이 아니었음을 몇 달 만에 확인하게 됐다. 왼쪽 어금니가 흔들리기 시작해 신경치료를 받았고, 그 와중에 아랫니 하나가 돌출되어 윗니와 부딪히며 깨지는 문제까지 생겼다. 결국 치열을 바로잡기 위해 교정치료를 하기로 했다.

“이 나이에도 교정이 가능한가요?”

“그럼요. 오래 안 걸립니다.”

의사는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잇몸이 무너질 수 있다느니, 하지 말라느니 겁을 주는 글들이 가득했다. 그래도… 의사 말을 믿는 게 나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아랫니 여덟 개에 브라켓을 붙이고 철사로 단단히 당겼다. 웃을 때 못생겨 보일까 봐 앞으로는 쉬 웃지 말아야지,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티가 많이 나지 않았다. 이를 활짝 드러내고 흐흐흐 하고 웃지만 않으면, 교정 중인지 아무도 모를 정도다. 물론 뭐 하나 먹을 때마다 치아 대청소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이대로 잘 교정돼서 더는 윗니가 깨지지 않는다면 견딜 만하다.

신경치료가 끝난 치아에 크라운을 씌우려던 순간, 이번에는 반대쪽 어금니가 깨졌다. 평소부터 말썽을 부리던 녀석이 결국...

“이쪽도 신경치료 들어가야겠네요.”

의사는 치료 계획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올해 치과에 갖다 바친(그리고 앞으로 바칠) 돈이 도대체 얼마인지, 계산할 엄두도 안 난다.

제발 이번 해를 끝으로 치아 문제만큼은 정리되기를. 새해 소망 첫 번째가 정해졌다.


4.

11월 22일. 부산에서 2018년 이후 세 번째 퀴어퍼레이드가 열렸다.
감기에서 막 벗어난 몸이라 옷을 잔뜩 껴입고 나갔는데, 햇살은 너무 뜨거웠다. 하루이틀 상간으로 계절이 왔다갔다 한다. 두터운 외투의 지퍼를 열어젖혔지만,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땀이 식을 때마다 몸은 오돌오돌 떨렸고, 그 반복이 불길한 예감처럼 이어졌다.

마스크 문제도 있었다. ‘얼굴 가리고 싶지 않아, 당당하다구’라는 마음으로 마스크를 벗고 행진하고 싶었지만, 감기가 다시 도질까 무서워 내내 마스크를 써야 했…지만, 아이고, 행진이 시작되자마자 너무 더워서 결국 마스크를 내려버렸다.

결국 다음 날 아침, 콧속은 콧물로 완전히 막혀 있었다.
감기야, 제발 이제는 나를 좀 놔주면 안 되겠니.


5.

퀴어퍼레이드가 끝난 뒤, 서울에서 내려온 무지개행동의 호림, 순부님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우리가 곧 진행할 소송 이야기부터 최근 인권운동의 흐름, 서로의 개인적인 근황까지 두루 오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 순부님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후쿠오카로 여행을 가면서 게이바 정보를 찾다가 내 브런치 글을 읽게 되었고, 전문을 읽으려면 <남자 둘이 손잡고 일본> 전자책을 구매해야 한다는 걸 알고는, 실제로 책을 사서 읽으셨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괜히 미안해졌다. 사실 그 글은 후쿠오카 게이바의 구체적인 정보를 정리한 글이 아니라, 그곳에서 느낀 인상과 분위기를 적은 데 가까웠기 때문이다. 정보성을 기대하셨다면 조금 실망하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무료로 공개할 걸 그랬다는 후회도 함께 찾아왔다.

돌아보면 내 브런치 글 중에서도 유난히 ‘게이바’ 관련 글들이 가장 인기가 많다. 도쿄, 광주, 후쿠오카 등등. 워낙 정보가 부족하다 보니 사람들이 검색을 거듭하다가 내 글까지 도달하는 듯하다. 사실 이 글들은 모두 전자책에 실린 글이라 원래는 일부만 공개하고, 나머지는 책을 구매해서 읽도록 링크를 걸어두었는데, 그 글들만 유독 클릭수가 압도적으로 높다 보니 결국 대부분 무료로 풀어두게 되었다.

그래도 모두 다 공개하는 건 아닌 것 같아 후쿠오카 편만 유료로 남겨두었는데… 이제 이것도 무료로 공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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