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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년기

나 같은 ‘말러찔이’가 세상엔 많구나

시비월기 (1)

by 선우비

1.

11월 말쯤만 되면 SNS에 접속할 때마다 블랙프라이데이 광고가 어김없이 따라붙는다. 거의 모든 상품이 원가 대비 70%, 많게는 90%까지 할인한다고 난리를 친다.

그런데 문제는, 대체로 같은 광고가 반복해서 뜨기 때문에 평소 이 제품이 어떤 가격에 팔리는지 너무 잘 안다는 것이다. 애초에 상시 ‘50% 할인’ 딱지를 달고 있는 물건이다. 그런 제품이 블랙프라이데이를 맞아 무려 70%나 세일한다기에 기대했지만, 막상 가격을 보니 평소보다 겨우 1~2천 원 더 싸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화가 치밀어 오른다. 사람을 뭘로 보는 건지!

분노는 분노고… 그래도 안 살 순 없다. 천 원이 어디인가. 내가 네이버플러스 회원을 유지하는 이유도 결국 그 1~2천 원 더 적립하고 싶은 욕망 때문인데.

생각해 보면, 시장 가서 콩나물 값 500원 깎으려고 기꺼이 5분 동안 흥정하던 어머니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때는 그런 모습이 왜 그렇게 싫었는지. 그런데 지금의 나는, 화면 앞에서 천 원을 위해 광고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

어머니는 넷이나 되는 자식들을 건사하기 위함이라는 핑계라도 있지, 자식도 없는 난 왜 이러고 사는 걸까.



2.

이번 겨울엔 스키장 한 달 살기에 도전하는 만큼,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어보려고 스키동호회 카페에 “다시” 가입했다.

스키에 입문했 때도(30대)스키동호회(부산에서 가장 큰 곳)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 서면의 커다란 생맥주집에서 열렸던 정모에 나가보니 60명 가까이 모여 있었다. 남녀 성비는 7:3, 대부분이 내 또래였다.

처음 나간 자리였지만, 나를 챙겨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임장에게서 들은 말이라고는 이것뿐이었다.

“여기는 각자생존입니다. 알아서 끼어들어 자리 자리를 만드세요."

둘러보니 30%를 차지하는 여성들이 양쪽에 남자 둘을 끼고 있는 형국, 여자 없는 10%의 남자들은 멀뚱멀뚱 술을 들이붓고 있었다. 한국 스포츠동호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인터넷 밈을 본 적이 있었는데, 딱 그대로였다. 결국 미리 낸 회비만큼 맥주만 마시고 바로 탈퇴했다.

평생교육원에서 사진 수업을 들으며 수강생들과 함께 출사를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처음엔 좋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진 동호회 특유의 ‘장비 위주 모드’로 변질되는 걸 보고 또 조용히 빠져나왔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여러 욕망이 뒤섞이고, 그중에서도 목소리 큰 욕망(대체로 과시욕이나 성적 긴장 같은 도파민 터지는 것들)이 금세 분위기를 주도한다. 유들유들하게 스며들어 자기 자리를 만들어야 정글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평생 소규모 모임에만 익숙하게 살아왔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낯선 사람이 옆에만 앉아도 괜히 몸이 굳게 되었다. ENFP 주제에 왜 이 모양인지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틀린 건 아니잖아?

아웃사이더의 장점도 많다. 이를테면…

뭐 있다. 많다. 그런걸 잘난체 하며 구구절절 주절거리지 않는 쿨한 마인드라든가 등등.


가입한 (일반/이성애자 위주) 스키동호회에서도 아마 눈팅족으로 지낼 것 같아서, 내친김에 게이 스키 동호회도 살펴보았다. 그런데 대부분이 “40 이하”로 연령 제한을 걸어두었다.

이런 거절, 이젠 익숙하다. 독서모임/와인모임처럼 다양한 연령이 참여할수록 내용이 더 풍성해지는 모임조차 어김없이 연령을 세세하게 따진다. 모임 주제와 무관하게 나이로 출입제한을 걸어둔 곳, 나이로 사람을 그룹핑하는 이너서클, 그 공간을 지배하는 욕망은 내 쪽에서도 거절이다.

씁쓸한 기분으로 게시판을 훑어보다가, ‘연령/지역 무관’을 내세운 동호회를 발견했다.

구인구직 사이트라면 솔직히 사짜 냄새가 진동하는 문구지만, 동호회 쪽에선 그저 감지덕지다. 주저 없이 가입했고, 가입 축하 톡까지 나눴다. 규모가 작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여기선… 조금 적극적으로 활동해 볼까?


3.

12월 오케스트라 공연은 대개 대작을 올린다. 그중에서도 베토벤 <합창>은 연말 단골 메뉴. 이 맘 때마다 몇 번을 들었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12월의 부산시향 정기연주회는 슬쩍 피하게 되었다.

올해도 비슷하겠지 했는데, 프로그램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말러 교향곡 3번.

아… 말러라니.

솔직히 말러는 무섭다.
오래전 통영국제음악제에서 말러 9번을 듣고는 두통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 그때 연주 시간이 1시간 20분이었는데, 3번은 무려 1시간 40분. 거의 영화 한 편이다. 경험상 말러는 잘하면 극상이지만, 못하면 정말 ‘공포 체험’에 가깝다.

결국 한참을 망설이다 포기하기로 했다.
“어, 그날 나 술약속 있어.”
다행히 오스씨도 아쉬워할 일은 없었다.

그렇게 잊고 있는데, 부산 MBC 라디오클래식에서 이 공연을 소개하는데 이러는 거다.
“엄청난 편성에 부산콘서트홀에서 하는 말러잖아요. 이건 무조건 직관해야 합니다!”
공연이 거의 축복이라느니, 두 번은 힘든 경험, 어쩌고 하는 평을 듣다 보니 갑자기 혹한다.

하지만 예매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했고, 부산콘서트홀의 인기와 연말 특수를 생각하면 표가 있을 리가 없었다. 기껏 시향 정기공연인데도 예매 오픈하자마자 광클해도 표를 잡지 못했던 지난 날이 떠올랐다. 그냥 마음을 접으려다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매창을 열어봤다.

있었다!
R석은 포도알처럼 몇 개 흩어져 있었지만, 나머지 좌석은 덩굴째 남아있었다.
그치그치. 역시 말러… 나 같은 ‘말러찔이’가 세상엔 많구나. 괜히 동지애 같은 게 느껴졌다.

그날 오스씨는 술자리에 가고, 나는 할 일도 없고, 듣자 하니 3번은 연주도 잘 안 한다고 하고… 그래서 결국 도전해 보기로 했다. 앞에서 네 번째 줄. 자리도 나쁘지 않다.

생각해 보니 클래식 공연을 오스씨 없이 혼자 가는 건 처음이다.
하필 말러를, 그것도 1시간 40분을.

부디 잘 버텨주길 바란다,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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