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비월기 (2)
4.
영화 <국보>를 보았다. 상영 시간이 3시간을 훌쩍 넘는다는 말에 잔뜩 긴장했는데(숏폼 중독자의 비애랄까), 막상 시작하자 끝까지 몰입해서 보게 되었다.
나는 <후쿠야당의 딸들>이라는 일본 만화를 무척 좋아한다. 대를 이어 화과자점을 운영하는 자매들의 이야기인데, 사윗감 후보로 가부키 배우 집안의 아들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가부키 명문가에서 태어났기에 사랑만으로는 결혼할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우리는 가문을 등에 진 채 살아가니까.'
한 개인의 삶 전체를 옭아매는 ‘가문의 예술적 숙명’이란 대체 무엇일까, 궁금했었다.
<국보>는 통속적인 장치들을 기꺼이 끌어안아 관객의 호기심을 극대화하면서도, 가부키라는 예술을 이해시키는 안내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초반에는 인물들의 막장에 가까운 서사에 이끌려 보게 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이야기보다 무대 위의 가부키 장면을 더 보고 싶어진다. 서사가 예술로 관객을 데려가는 구조다.
이 영화가 일본에서 각종 기록을 갈아치웠다니, 가부키 산업 전체가 만세를 부를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도 한때 <왕의 남자>처럼 ‘예술을 보는 맛’이 분명한 영화가 시대의 기록을 새로 쓴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다시 한번, 예술을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천만 관객을 끌어모으는 영화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5.
어머니 생신을 맞아 대전에 올라갔다. 식사 메뉴는 석갈비. 여덟 명이 모였는데 차를 세 대나 가져오는 바람에, 우리 커플과 조카 하나만 술을 마시게 되었다. 셋 다 와인을 좋아해 와인 한 병을 시켰더니 사방에서 “나도 한 잔”이 이어졌다. 결국 다들 2차로 와인바에 가서 두 병을 더 마시고 헤어졌다. 차는 두고 갔다.
술자리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암으로 흘러갔다. 오래전에 진단을 받았지만 연세에 비해 진행이 느려 지켜보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병세가 급격히 나빠졌다. 병원에서 확인해 보니 위치도 좋지 않고 이미 임파선까지 전이가 된 상태라, 항암을 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항암을 한다고 해서 기대를 품기에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쩔래. 어머니한테 항암 하자고 할까, 아니면 고통 없이 준비하자고 할까.”
병원 관계자가 셋이나 있는 집이라 형제들 가운데 둘은 하지 말자는 쪽이었다. 반면 어머니가 가장 아끼는 조카는 그래도 해보자는 의견이었다.
오스씨는 어머니가 중환자실에서 연명치료를 받다 돌아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큰 상처를 받았다. 말씀하시기를 좋아하고, 누구에게나 살갑게 대하던 따뜻한 분이셨다. 하지만 끝내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사실상 코로나 시절이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 장면이 아직까지 후회로 남아 있다며, 그는 계속 울먹이며 말했다.
나 역시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하다 돌아가시는 건 반대라는 입장이었다.
자식들 생각이 제각각이라 결국 어머니에게 직접 묻기로 했다. 원래는 몰래 항암치료를 시작하려 했지만, 병원에서 그건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항암을 하시겠다고 했다.
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고, 그 과정을 옆에서 몇 년이나 지켜보신 분이다. 어머니도 각오가 없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울컥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온 가족이 어머니 곁에서 생활하는데, 나만 부산에 뚝 떨어져 있다.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소식을 전해 듣고 울거나, 형제들을 위로하는 것 정도일 것이다.
내가 나중에 한이 남지 않게, 어머니와 어떻게 잘 작별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겠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자신이 없다.
6.
말러 공연을 갔다. 오스씨도 일정을 바꿔 함께했다.
공연에 앞서 유튜브로 예습을 하기로 했다. 음악 칼럼니스트 황지원 선생을 초청해 해설하는 영상을 보다가, 마음이 놓이는 말을 하나 들었다.
말러의 경우, 클래식을 처음 듣는 사람은 오히려 재미있고 신기해한다고 한다.
반면 고전주의 음악가의 교향곡을 즐겨 듣던 사람이 말러를 처음 접하면 괴로워하며, 한동안 일부러 거리를 두곤 한다고.
말러가 교향곡을 쓸 때 정격과 파격을 마구 뒤섞기 때문이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현대음악처럼 통째로 받아들여지지만, 조금 아는 사람일수록 기준이 흔들려 혼란을 느낀다는 설명이었다.
그 말을 듣고나니 스스로를 ‘말러찔이’라 여기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클래식을 조금은 안다는 뜻이잖아?’
뻔뻔한 아전인수로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 탐험해야 할 세계가 더 넓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산콘서트홀에서 열린 부산시향의 〈말러 교향곡 3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는 공연이었다. 중간중간 관악기의 작은 ‘튐’은 있었지만, 100분 동안 쉬지 않고 몰아치는 음의 향연을 충분히 재현해 냈다.
30분이 넘는 1악장은 다양한 악기를 총동원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아내겠다는 포부를 드러낸다. 부드러움과 사나움, 세심함과 웅장함이 차례로 고막을 방문하며, 다음에는 어떤 소리가 등장할지 계속 기대하게 만든다. 겨울에 듣기 좋은 발라드처럼 한없이 서정적인 2악장이 지나고, 3악장에서 슬슬 집중력이 느슨해질 즈음 대기실 문이 열리며 밖에서 트럼펫 소리가 들려온다. 긴 교향곡에 지치지 말라고 작은 쉼터가 마련된 느낌?
그렇게 한번 분위기를 환기하고 이어지는 4악장에서는 인간의 소리가 음악으로 합류한다. 메조소프라노가 니체의 시를 노래하고, 5악장에서는 어린이 합창단과 여성합창단의, 다소 징글벨 같은 노래가 이어진다. 마지막 6악장에서는 운명적인 사랑을 다룬 대하드라마의 OST로 쓰여도 손색없을 만큼, 장중하고 심장을 두드리는 현악기의 축제가 길게 펼쳐지며 100분의 여정을 성대하게 마무리한다.
음악적으로도, 음향적으로도, 공간감 면에서도 빠지는 구석이 없는 흥미롭고 즐거운 100분이었다.
이렇게 긴 곡을 이토록 타이트하게 엮어내다니, 말러가 왜 요즘 들어 가장 인기 있는 작곡가로 부상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나의 교향곡 안에 온갖 요소를 다 집어넣은 가성비 좋은 구성. 조금도 지루한 걸 못 참는 현대인에게 말러는 확실히 잘 맞는다.
앞으로 말러 공연은 모두 가야지.
이렇게 해서 '말러찔이'는 '말러리안'까지는 아니지만, '말러러버' 정도에는 도달했다는 훈훈한 결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