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랏? 비양도, 달리서점

가을 제주 이야기 3

by 선우비

욕심 많은 여행, 어랏? 의 연속


지난봄에 벌레로 한바탕 난리를 겪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래서 숙소는 후기 어디에도 벌레 이야기가 없는, ‘안심하고 묵을 만한’ 곳만 골라 예약했다.

여러 장소를 빠르게 훑어보는 일정이었기에 숙소도 계속 바꾸기로 했다. 첫날은 탑동 게이바 근처의 작은 호텔, 둘째 날은 창밖으로 비양도가 보이고 루프탑 수영장에서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는 한림의 아담한 호텔이었다.

이날 여행 계획은 완벽했다. 오전에 첫 배를 타고 비양도에 들어가 비양봉에 오르기. 오후에 섬을 빠져나와 한림의 독립서점 두 곳에서 ‘제주 독립서점 지도’ 도장 찍기. 개늑시에 숙소 루프탑 수영장에서 노을 보며 하루 마무리.

하지만 역시나, 계획대로만 흘러가는 여행이란 없는 법. 제주는 늘 그렇듯 장난스러운 함정을 하나씩 던져주기 시작했다.


평일엔 한가하다는 블로그 글을 믿고 예약도 안 한 채 한림항에 도착했더니, 우리가 계획한 배는 단체 손님 탓에 이미 매진. 어랏?

아직은 괜찮다. 한림항에서 비양도까지는 15분 남짓이니, 다음 배로 들어가서 비양봉만 후다닥 다녀오면 돌아갈 배시간에 맞출 수 있다.

비양도에 도착하자마자 칼국수로 배를 채우고 이정표를 따라 출발! 하려는데, 비양봉 가는 길은 포장공사 중이니 저리 삥 돌아가라고 막는다. 어랏?

섬을 왼쪽으로 돌아 조금 떨어진 다른 입구로 가라는 말이었는데 우리는 손가락 방향을 거꾸로 알아듣고 한 시간은 더 걸리는 오른쪽으로 출발! 어랏?

이때 이미 마지막 배로 돌아가기 당첨!

굳이 정신승리 하자면, 결과적으로 괜찮은 실수였다. 원래 비양도 해안 산책로 일주(A코스)는 비양봉 등반(B코스)보다 인기가 많다. 목책길을 지나면 들꽃과 억새로 장식된 펄렁못이 나오고,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기묘한 모양새의 호니토(화산탄)들이 뻔한 해안 산책을 색다르게 꾸며준다. 쉬엄쉬엄 사진을 찍으며 걷다가 거대한 코끼리 바위까지 다 보면 비로소 비양봉 입구다. 이국적인 풍경 속을 느긋하게 걸으며 애인과 수다 떨기야말로 여행의 백미가 아닐쏘냐.

“하이브 주가 또 떨어졌더라.”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엔터주 이야기를 나눈다. BTS의 팬인 나는 매일 하이브 엔터테인먼트의 주가변동표를 보고 있지만 사실 주식 투자를 하지 않는다. 작은 변수에도 요동치는 엔터주를 보면서 주식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자신을 칭찬, 또는 자책하는 소재로 삼을 뿐이다.

이어, 흑인이 인어공주역을 했다더라, 젊은 남자들이 왜 페미니즘에 적대적인가 등등... 환갑을 넘긴 그를 최신 뉴스의 소용돌이로 끌어들인다.

가끔 그에게 묻는다.

“이런 얘기, 진짜 관심 있어?”

“네가 떠드니까 상대해 주는 거지.”

굳이 비유하자면, 그는 제주 오름 같다. 밑에서 보면 흙으로 꽉 찬 둔덕 같지만, 올라가 보면 속은 텅 비어 분화구가 있고, 그 안에 삼나무도, 웅덩이도, 노루도 함께 살아간다. 즉, 겉보기와 달리 수용성이 있는 남자다.

“자기는 바다처럼 넓지는 않지만, 오름의 분화구 정도는 되는 남자지.”

서로를 향해 농담을 던지며 웃는다.

뭐, 그 정도의 넓이라면 충분하다.



마지막까지 ‘어랏?’


비양도에서의 연이은 어랏? 덕에 일몰 한 시간 전에서야 섬을 빠져나왔다. 시간이 빠듯해 독립서점은 '달리 책방'만 가기로 했다.

처음 제주 독립서점 지도를 받았을 당시만 해도 목적은 ‘도장 찍기’였다. 서점마다 개성적으로 만들어놓은 방문 인증 도장을 하나씩 모으는 재미가 각별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서점 주인의 취향, 그곳의 공기, 책이 나에게 오기까지의 과정도 중요해졌다. 그 서점에서만 접할 수 있는 세계가 책장을 통해 열리고, 좁디좁던 내 시야가 조금씩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도장은 작은 기념일 뿐, 수집 대상은 ‘새로운 나 자신’이었다.

‘달리책방’에서도 더 넓어질 기회를 만났다.

<감정 어휘(유선경)>.

자신의 감정을 단순히 좋다, 싫다로만 묶지 않고 기쁨, 슬픔, 분노, 기대 등으로 구별하고 이름 붙여줄 때, 마음이 한결 안정되고 후련해진다는 책 소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봉봉씨와의 일로 마음이 복잡했다. 서운함과 분노가 한데 뒤엉켜 있으면서도, 그 감정을 어떤 말로도 명확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미운 마음’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큰 상처였고, ‘슬픔’이라고 하기엔 떨치고 싶은 조바심이 앞섰다.

‘지금 내 감정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면, 나도 후련해질까?’

책과 '제주 독립서점 서점지도'를 동시에 주인에게 내밀었다.

“두 분이 함께 서점 여행 중이신 거예요?”

책방 주인은 이미 수십 개의 도장이 찍힌 지도를 보고는 묘한 눈웃음을 지었다.

“멋진 브로맨스네요, 호호호.”
주인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를 책장 앞에 세우더니, 조금 더 가까이 서라고 손짓하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서점 안의 따뜻한 조명 아래, 묘하게 무언가가 통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오스씨에게 물었다.
“우리… 티 났나?”

오스씨도 무언가를 느낀 듯했다.
“시선이 넓은 사람이라면 다 알아봤겠지. 비슷하게 꾸민 중년 아저씨 둘이 책방을 순례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에 게이라는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않으니까 생각조차 못 하는 거고.”

갑자기 책방 이름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살바도르 달리에서 따온 줄 알았는데, ‘다르다’는 의미같기도 하다.”

제주 책방은 대체로, 이런 작은 배려와 남다른 눈썰미로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도장으로 지도를 완성할 때까지 계속해서 넓어지자 다짐해본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루프탑 수영장으로 달려갔다. ‘온수가 제공되는 루프탑 수영장에서 일몰을 즐기세요!’라는 광고 문구에 혹해 고른 호텔이었다.

마침 수영장이 비어 있어 사진 찍기에는 완벽했다. 노을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고, 수영장 안으로 풍덩!

어랏?
삽시간에 온몸으로 퍼지는 소름.
“이게… 온수라고?”

옆에 김이 펄펄 나는 월풀욕조가 있었던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 광고는 광고일 뿐, 현실은 언제나 차갑다. 제길.

그래도 우리는 K-중년의 본전 뽑기 정신으로 계속해서 사진을 찍고, 지칠 때까지 물살을 갈랐다. 하지만 결과물은… 눈빛이 죽어 있고, 숨긴다고 숨긴 배가 실루엣으로 드러난, 늙은 남자의 벌거벗은 몸뚱이뿐. 모두 휴지통으로 폐기.

그렇게 마지막까지 ‘어랏?’하며, 둘째 날도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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