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일은 바꿔라, 시 같은 것으로

가을 제주 이야기 2

by 선우비

우리 인생에는 약간의 좋은 일과 많은 나쁜 일이 생긴다.

좋은 일은 그냥 그 자체로 놔둬라.

그리고 나쁜 일은...

바꿔라. 더 나은 것으로. 이를테면 시 같은 것으로.(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사랑만이 전부는 아니다


어쩌면 그게 징조였는지도 모른다.
공항에서 오스씨가 애플펜슬을 잃어버렸다.

“또 사면되지 뭐.”
나는 그를 토닥였다. 고작 스마트 펜슬 하나로 여행의 흥이 깨지는 건 싫었다. 그 자리에서 새 펜슬을 재빨리 주문했다.

저녁은 봉봉씨가 정한 흑돼지 구이집에서 먹기로 했다. 지난 여행에서 흑돼지를 못 먹었던 오스씨를 위해서였고, 괜히 비건 타령하며 유난 떠는 게 싫어서 나도 흔쾌히 동의했다.

오스씨는 맛있다며 연신 호들갑을 떨었다. 내 입엔 그저 그랬다. 너무 오랜만에 덩어리 고기를 구워 먹어서인지 단백질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듯 역하게 느껴졌다. 멜젓과 쌈을 동원해 억지로 꾸역꾸역 삼켰다.

저녁 후에는 탑동에 있는 봉봉씨 단골 게이바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손님이 있었고, 조금 뒤에는 북적북적할 만큼 사람이 늘었다. 누가 들어오든 다 아는 얼굴인 듯 요란한 인사가 이어졌다.

몇 해 전 제주에서 만난 동갑내기 게이의 말이 떠올랐다.

“제주 사람하고는 절대 연애 안 해. 한 다리만 건너도 다 아는 사이거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육지 사람하고만 사귀게 돼.”

“그럼 연애하기 힘들지 않아? 비행기로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그래서 이제 연애 안 해. 제주에 놀러 오는 사람 중에 마음 맞으면, 그때뿐이야.”

그때는 그저 개인적인 경험담으로만 여겼는데, 이날 만난 다른 제주 게이도 똑같은 얘기를 했다.

“여기는 너무 좁아요. 누구랑 사귀면 금방 소문이 퍼지고, 그 사람의 뒷얘기도 다 들어야 해요. 헤어지면 내 비밀도 다 퍼지고요. 그게 너무 싫어서 절대 연애 안 해요.”

일종의 ‘사내연애’ 같았다. 헤어진 전 애인과 같은 사무실에 있는데, 이미 그 안에 전 애인이 여러 명 있는 것이다. 그들이 연애를 꺼리는 이유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연애를 잘 이어가는 커플도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제주의 특수한 상황은 충분히 공감됐다.


블랙코미디 같은 제주 첫날


그렇게 낯선 제주 게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문득 봉봉씨가 또다시 ‘버럭’ 하고 소리를 질렀다. 술에 취한 그는 종종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감정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어릴 때 술만 취하면 술상을 엎어버리던 아버지 같았다. 술이 깨면 후회하지만, 그 후회가 행동을 바꾸는 일은 없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세찬 제주 바람이 뺨을 스치며 차갑게 속삭이는 듯했다.

“그만해라.”

봉봉씨는 오랫동안 내 마음 한가운데 자리한 친구였다. 함께 기뻐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십여 년을 지내왔다.

평소라면 술 깨면 사과하겠지 애써 웃으며 넘겼을 텐데, 그날은 유난히도 아프게 다가왔다. 낯선 제주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그 익숙한 장면이 반복되자 마음속 어딘가에서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알았다. 우리가 함께 걸어온 길이 여기까지라는 것을. 더 붙잡으면 추억까지 상처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 그 몰아치는 제주 바람 속에, 조용히 그의 손을 놓았다.


숙소 근처에 작은 게이바가 있었다.

“제주에서의 첫날을 이렇게 보낼 순 없지! 한잔 더 하러 가자!”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덩치와는 달리 사근사근한 주인장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나는 그동안 쌓인 서운함을 잔에 담아 털어놓았다.

“주인아저씨,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제 친구가 있거든요.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요?”

분노와 서운함이 뒤섞인 말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그때, 문이 열리며 봉봉씨가 들어왔다. 그 역시 우리가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놀람이 얼굴에 역력했다.

알고 보니 주인은 봉봉씨와도 친한 사이였다.
그 순간, 나는 제주 게이가 했던 그 말을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이해했다.

“제주 사람들끼리는 절대 연애하지 않는다.”

좁은 세계에서 맺은 인연은, 악연일지라도 끊어지지 않고 원치 않을 때도 불시에 얽히고 만다.
어쩐지 공포스럽기까지 한 현실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오스씨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래, 어차피 벌어질 일이 벌어진 거야. 차라리 이렇게 확 터져서 다행이지.”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달래듯, 또 세뇌하듯 같은 말을 되뇌었다.
“개운하다! 개운하다!”

입으로는 연신 외쳤지만, 마음속 씁쓸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그 말이 조금은 진짜처럼 느껴졌다. 마치 쓰디쓴 약을 억지로 삼키고 “괜찮아”라고 되뇌다 보면 정말 조금은 괜찮아지는 것처럼.

내 얄팍한 뇌는 그렇게도 쉽게 속아 넘어갔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다시 여행을 즐길 기운이 돌아와 있었다.

“그럼, 비양도로 가볼까?”
“소재 긁어오는 건 포기하고 그냥 마음 편히 돌아다니자.”

첫날은 엉망진창이었지만, 그 덕분에 여행기에 대한 과한 욕심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봄의 제주가 우리에게 몸과 마음의 치유를 선물했다면, 가을의 제주는 관계의 끝맺음과 해방을 가르쳐 주려나.

그래, 때로는 떠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 섬에서든, 인간관계에서든.

개운함과 씁쓸함이 뒤섞인 속에서,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여행이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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