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제주 이야기 4
지난봄, 우리의 제주 여행은 오름으로 시작해 오름으로 끝났다. 100개의 오름이 표시된 지도를 펼쳐놓고 정복한 곳마다 별점을 메기며, 우리는 제주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을 발견했다.
이번 가을에도 자연스레 오름이 여행의 중심이 되었다. 지도를 보니 아직 우리의 발길을 기다리는 오름이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제주의 오름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지만, 가을이면 은빛 억새가 바람에 일렁이며 장관을 이룬다. 그래서 이번엔 주로 억새가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들을 다녀왔다.
금오름 – 황홀함과 악취 사이
세 번째 숙소는 금오름 근처였다.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에 있는 이 오름은 입구에서 정상까지 20분 남짓이면 오를 수 있어, 초보자도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다. ‘효리네 민박’에서 이효리가 아이유를 데리고 가면서 더 유명해졌다.
우리가 묵은 펜션은 하얀 벽과 원목 가구, 천으로 된 포스터와 마크라메 장식이 어우러진, SNS에서 ‘인스타 감성’으로 검색하면 바로 나올 법한 곳이었다. 숙소 자체는 만족스러웠지만, 마을 전체에서 풍기는 축사 냄새가 문제였다.
알고 보니 이곳은 제주도 흑돼지의 고장으로도 유명했다.
“못 참을 정도야?” 오스씨가 물었다.
“아직은 괜찮아… 조금 있으면 익숙해지겠지.”
하지만 끝내 익숙해지지 않았다. 우리는 창문을 꼭 닫은 채 지냈다.
해 질 녘 금오름에 오르면 분화구 속 작은 호수인 금악담에 비친 노을이 장관이라는 말을 들었다.
“오늘 날씨, 좀 그런데?”
전날까지만 해도 쨍하던 하늘은, 이날 따라 잔뜩 흐렸다.
집에서 쉴까 고민하다가, 펜션에서 우연히 읽게 된 시 한 편이 우리를 일으켜 세웠다..
금오름의 비밀 – 이상홍
유명연예인따라구경나온길이아닌길로
점심전에금오름에올라
금악담길한바퀴를돌아보는게좋다
일몰은금악담보다는금오름주차장화장실앞이
젤장관이다
– 『오름이 연못에서 돼지와 들꽃처럼: 금악담예술프로젝트작품집』 中
오름 입구 화장실 앞에서도 일몰을 즐길 수 있다니! 꿀 같은 정보였다.
하지만 막상 도착했을 때는 구름이 하늘을 완전히 덮고 있어 그 장관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인의 말을 확인할 기회는 한번 더 있다.
다음 날 점심 전 다시 오름에 올랐다. 이효리와 아이유가 걸었던 포장도로 대신, 시인이 추천한 조금 돌아가는 ‘희망의 숲길’을 선택했다. 역시 굿!
정상에 오르자 바람에 출렁이는 가을 억새밭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쉽게도 금악담은 말라 있었지만, 분화구 속을 뛰어다니는 노루 떼가 있어 위안이 됐다.
그러나 풍경에 취할 틈도 잠시, 내 이마는 점점 찌푸려졌다. 정상에 서서 내려다본 마을은 온통 축사로 가득했고, 바람에 실린 악취가 정상까지 밀려왔다.
“역시 관광객 많은 오름치고 괜찮은 데가 없네.”
투덜거리며 냄새를 견뎠다.
씁쓸함은 또 있었다. 보통 제주 예술가들은 비건에 우호적인데, 이곳의 예술가들은 동네 흑돼지 소비를 장려하는 귀여운 일러스트를 만들고 있었다. 그걸 탓할 수는 없다. 돼지고기 소비를 장려하는 쪽도, 공장식 축산을 반대하는 쪽도 모두 선의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선의들이 서로 충돌할 때다.
나 역시 여전히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오십이라는 나이는 본디 하늘의 뜻을 깨닫는 때라지만, 내게는 어제 맛있게 먹던 흑돼지가 오늘은 역겹게만 느껴지는 것, 어제의 확신이 오늘의 망설임으로 바뀌는 것, 그 변화 속에서 흔들리는 자신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다.
왕이메오름 – 오름의 숨은 이야기
왕이메오름은 그 이름처럼 어딘가 위엄 있는 기운을 풍기는 오름이다. 제주시 애월읍에 자리하며, 봉긋 솟은 능선이 왕관처럼 둘러져 있다.
이번에는 조금 특별하게, 오름 도슨트 프로그램을 통해 오르기로 했다. 전문가의 안내를 받으며 오름의 역사와 생태를 배우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봄에 다녀왔던 거문오름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규정상 반드시 지정 도슨트와 함께해야 했다. 하지만 수십 명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이동하다 보니 설명도 잘 들리지 않고, 마스크를 착용한 채라 답답하기만 했다. (그땐 아직 코로나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비용이 들더라도 소수 인원으로 진행되는 사설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현장에 도착하니 신청자가 우리 둘 뿐이었다. 사실상 개인 가이드가 생긴 셈이다.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에 기분이 들떴다.
도슨트의 설명은 놀라울 만큼 섬세했다.
왕이메오름의 역사, 제주의 독특한 장례 문화, 제주 4·3 항쟁의 아픈 이야기, 그리고 제주인들이 오랜 세월 동안 즐겨 쓰던 나무들의 쓰임새까지. 책에서만 접했다면 그냥 흘려보냈을 이야기들이, 눈앞의 풍경과 겹쳐지자 전혀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둘이 함께 오름을 오르면 늘 셀카에만 의존해야 했는데, 이번에는 가이드 덕분에 억새를 배경으로 한 멋진 커플 사진을 잔뜩 남길 수 있었다. 커플 여행객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왕이메오름은 길이 얽히고설켜 있어 혼자 오르면 길을 잃기 쉽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꼭 도슨트와 함께 오르길 권한다. 풍경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야기로 다가올 것이다.
* 우리가 예약한 곳은 <더제주스토리>였다.
원래는 두 시간 코스였는데, 내가 끝없이 질문을 퍼부은 탓에 무려 삼십 분이나 더 함께 걸었다. 그럼에도 도슨트 님은 전혀 힘든 기색 없이, 오히려 오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기쁘다고 말했다. 그 마음이 고마워, 이렇게 업체명을 남긴다. 오름 여행, 이곳에서 시작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