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 단편극장 5
* 이 소설의 배경은 세기말이다. 당시 통신사 사무실에는 고객을 위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단말기를 구비해두어서, 마치 피씨방처럼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었다. 한편 통신비가 비쌌기 때문에 통신이용권을 판매하기도 했는데, 소설 속 코넷도 그런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1.
“저, 코넷 무료 이용권 받으러 왔는데요?”
“아, 그러세요? 그럼 10번 창구로 가보세요.”
“감사합니다.”
대리석 복도라서 더 미안했다. 시멘트 바닥이면 덜했을 텐데. 바닥이 온통 내가 만든 진흙 발자국 투성이다. 밖은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입구는 새 단장 공사 중이라 블록이 죄다 파헤쳐진 상태였다. 자동문 앞에 못 쓰는 박스라도 깔아두지.
10번 창구엔 여직원 하나가 단말기를 보고 있었다.
“저, 코넷 무료 이용권 받으러…”
“아, 그러세요? 잠시만요. 담당자 불러드릴게요. 김한석 씨!”
왼쪽 끝에 있던 남자가 이쪽을 바라본다. 순간 눈이 커지더니 얼어붙은 표정. 왜 저러지? 하지만 곧 미소를 띠고 일어섰다.
“어떻게 오셨어요?”
조금 전까지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던 남자는 금세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똑같은 질문이 반복돼 지겹지만, 오늘은 공짜를 받는 날이니까 표정 관리가 된다.
“코넷 무료 이용권 받으러 왔어요.”
활짝 웃었다. 그도 따라서 웃었다.
“성함이요?”
“정민욱입니다. 어제 전화드렸어요.”
“아, 네. 기억납니다. 이용권 갖다 드릴 테니 잠시만요.”
그가 권한 소파에 앉아 습관처럼 사무실을 한 바퀴 훑었다. 입구엔 방문자용 단말기 몇 대가 놓여있다. 쟌스포츠 배낭을 멘 젊은 남자가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며 손을 바쁘게 놀리고 있다. 내가 들어올 때, 힐끗 나를 보더니 위아래로 훑고, 마지막으로 진흙 묻은 신발을 보고는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화면 속으로 고개를 묻었던 그 남자였다.
남자의 주변 대리석은 반들반들 윤이 났다. 비 오기 전부터 그 자리를 지켰던 모양.
'공짜 인터넷이라고 아예 전세를 냈구만.'
백수라면 나가서 일이라도 하든가, 여기 앉아 인터넷하며 시간 죽이는 꼴이 영 한심해 보인다.
“정민욱 씨, 맞으시죠? 전화번호가 456-7893?”
김한석이라고 불린 직원이 서류 뭉치를 뒤적이며 묻는다.
“네, 맞아요.”
무심코 소파에서 일어나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그가 살짝 움찔했다. 소파와 책상 간격은 1m도 안 되고, 190에 가까운 내가 불쑥 일어서면 다들 순간 긴장하곤 한다. 그의 과한 경직에 오히려 내가 당황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코넷 신청자가 밀려서요. 아마 5일 후에 사용 가능하실 거예요. 환경 설정은 하실 줄 아시죠?”
“네.”
“아이디는 뭐로 드릴까요?”
“yotaji로요.”
“서태지 좋아하시나 보네요?”
"마니아죠."
자기도 좋아한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한다.
“비밀번호는요?”
“tajizzang.”
“하하.”
서로 웃었다. 괜히 서먹하던 공기가 조금 풀렸다.
“그럼 5일 뒤부터 이용하세요.”
“네, 고맙습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모니터로 돌아갔다. …그냥 가라는 뜻인가?
“저…”
내가 서성거리자 그가 다시 고개를 든다.
“전용 웹브라우저랑 전화카드도 준다고 되어 있던데요.”
“아, 내 정신 좀 봐요.”
그가 캐비닛에서 CD 케이스와 전화카드를 꺼내 왔다.
“죄송해요. 여기요.”
하지만 아직 하나가 남았다. 이렇게까지 하기 싫은데, 눈치 좀...
“저… 수첩도요.”
“아… 잠시만요.”
링으로 얼기설기 엮은 얄궂은 수첩을 내민다. 중학생도 안 쓸 법한.
“정말 죄송합니다.”
뭘 이런 것까지 챙겨냐, 힐난하는 말투같기도.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고 뒤돌았다. 공짜 받으러 온 사람 기분도 좀 생각해서 알아서 잘 챙겨줬으면 좋으련만. 괜히 쪽팔리게…
문밖으로 나가면 된다. 다시 대리석에 진흙을 찍을 생각을 하니 아득하지만, 잘못은 신발을 털 곳 하나 마련해놓지 않은 이쪽에 있다. 내가 멋쩍을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들어올 때 남긴 발자국 위만 골라 밟아 나갔다. 이 정도 예의는 보여야 한다. 코넷 이용권에 전화카드, 구질구질한 수첩까지 공짜로 받았으니까. 그들도 할 만큼 했다. 인정한다.
밖으로 나오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쳐 있었다. 들어간 지 5분도 안 됐는데… 결국 그곳엔 내 발자국만 남았다. 억울했다.
2.
“대리님, 잠깐 밖에 다녀올게요. 코넷 상담 전화 오면 좀 받아주세요.”
“그러지. <재희다방> 미스 정 만나러 가나?”
“에이, 농담 마세요.”
“하하. 빨리 갔다 와, 한석 씨.”
책상을 정리해 가방을 챙겼다. 가방엔 그에게 줄 시집 한 권이 들어 있는 …다시 열어 확인. 있다.
『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
그가 게시판에 기형도의 시를 올린 적이 있었다. 시 제목은 잊었지만 시인의 이름은 잊기 어렵다. 서점 주인이 “기형도요?” 하고 오호라, 하는 표정을 짓는 걸 보면, 아마 그는 고상한 시를 읽는 사람인 듯. 외모에서도 그런 느낌이 배어 있었다.
“김한석 씨, 어디 나가?”
입구를 막 벗어나는데 차장이 들어온다.
“네, 차장님. 잠깐 누구 좀 만나려고요.”
“그래? 코넷 신청은 많이 받아?”
“그럭저럭요. 반응 좋아요.”
“공짜니까 그렇지. 우리나라는 공짜면 환장한다니까.”
말 많은 걸로 유명한 차장의 수다를 반쯤 흘려듣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만 하고 나왔다.
비가 그쳐 다행이었다. 그는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다. 뛰어가 어깨를 두드리면 깜짝 놀라겠지. 사실 조금 전에도 아는 척하고 싶었지만, 그가 당황할까봐 참았다. 대리석에 찍힌 진흙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던 눈치였으니까.
거의 따라잡을 즈음, 지나가던 남자가 말을 건다.
“여기 한국통신이 어디예요?”
코앞에 있는 간판이 그렇게도 안 보이나. 짜증이 치밀어오르지만 그래도 직업적인 미소.
“바로 저 건물입니다.”
“고맙습니다.”
보도블록은 여기저기 깨져 걷기 불편했다. 앞서가는 그는 땅만 보고 걷는다. 아까 남겼던 진흙이 마음에 걸리나 보다. 하긴,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그래도 그는 재밌는 사람이다. 나갈 때 자기 발자국만 골라 밟고 나가다니. 아마 나라면 그냥 터벅터벅 걸었을 것이다.
'꽤 섬세한 성격 같네. 나도 섬세한 편인데…'
성격이 비슷한 사람끼리는 통한다고 하지. 어쩌면 그도 나를 좋아할지 모른다 생각하니,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졌다.
거의 닿았다 싶었는데, 그가 갑자기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갔다. 뒷주머니에서 아까 내가 준 카드를 꺼내 넣었다. 수화기를 든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친구에게 전화하나? 코넷 무료 이용권 자랑? 그 해맑은 웃음이 보기 좋다. 친구들 사이에서 머리통 하나는 더 큰 그를 더욱 빛나게 해주던 바로 그 표정이다. 그는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은 타입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좋다.
'그가 날 기억할까?'
모임에서 만나 인사도 나눴는데, 조금 전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하자마자 곧바로 다른 놈이 어, 오랜만! 하고 치고들어왔지.'
그때는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었으니 그럴 만했다. 어쩌면 그의 눈높이에서는 모든 남자가 다 거기서 거기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전화를 걸고 있는 그는 여전히 웃고 있다. 그의 미소가 전염되듯 내 입가도 올라간다.
앗, 그가 나를 본다. …이런! 나를 보더니 아주 좋아한다. 금방이라도 깡충 뛸 기세. 혹시 이제야 모임에서 만난 나를 알아본 걸까?
그가 전화를 끊고 문을 열어 곧장 나에게 온다. 환한 미소로.
야호.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 되겠다.
3.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단말기 앞에 붙어 있었건만 한석 씨는 여전히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조금 전 눈이 스친 정민욱이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잊지 못하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통신 모임에서 처음 한석 씨를 봤을 때,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게다가 그가 내가 사는 동네 한국통신 직원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하늘이 나에게 선물을 주는 줄 알았다. 그날 이후 거의 매일 이곳 단말기에 ‘출근’하다시피 했지만, 그는 나를 단 한 번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단말기로 연결된 채팅방에서만 그를 만났다. 그는 근무 중 직장상사 몰래 채팅을 즐겼고, 나 역시 그를 훔쳐보며 동시에 대화했다. 그 짜릿함이란. 어쩌면 직접 사귀는 것보다 몰래팅이 더 달콤하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언젠가는 직접 말을 걸고 고백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방해자가 나타났다.
“에구,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도 못 하고… 전 정말 한심해요.”
어느 날 그와 채팅하던 중, 나는 슬쩍 떠봤다. 혹시 그가 ‘고백해라’고 등을 떠밀어주면, 그 말에 기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 심정 잘 알아요. 저도 그렇거든요.”
심장이 쿵. 혹시 나?
“누군데요? 통신에서 아는 분?”
“네. 지난 모임에서 첫눈에 반했어요.”
나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곧 깨졌다. 그가 말한 사람은 같은 동호회의 일명 꺽다리, 정민욱. 내 눈에는 키만 멀대같고 싱거운 인물인데, 그의 눈엔 외모도, 게시판에 쓰는 글도 봄 햇살처럼 포근하다 했다.
“알고 보니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이더라고요. 진석님은 어디 사세요?”
“반포요.”
순간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사실은 나도 같은 동네인데. 차라리 그때 솔직히 말할 걸. 네가 어디 사는지, 어떤 커피를 좋아하는지, 심지어 네 의자의 등받이 모양까지도 다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가는...
“잘되길 바랄게요.”
그렇게 말해버렸다. 마음은 찢어졌지만.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날 모임에도 나갔었지만, 이후 매일 단말기에 앉아 있던 나를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잊으려 했다. 그러나 어제, 다시 채팅방에서 그와 마주쳤다. 내 앞, 고작 5미터도 안 되는 곳에서, 우리는 같은 회선을 타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제 그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정말요? 번호 알려줬어요?”
“아뇨. 요즘 우리 회사가 코넷 무료 이용권 배포하거든요. 그거 신청하려고 전화했더라고요. 제가 담당자라서.”
“음… 정말 그 사람인지 확실해요?”
“목소리도, 이름도 같아요. 게다가 같은 동네잖아요!”
왠지 속이 쓰렸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요?”
“내일 오후 세 시에 오라고 했죠. 사무적으로만 얘기하느라 진땀 뺐어요.”
“하늘이 준 기회 같네요.”
“그가 날 알아볼까요?”
“모임에서 본 사이라면, 아마.”
“그땐 전 말없이 앉아 있었고, 그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거든요. 동네 얘기할 때 눈이 잠깐 마주친 것 말고는…”
“그래도, 깜짝은 놀라겠죠.”
솔직히 말해, 훼방 놓고 싶었다.
“그렇겠네요. 아웃팅이라 생각하지 않을까요? 아, 어쩌지.”
만나지 마. 제발.
“그래도 더는 속앓이만 할 수 없잖아요. 내일은 용기 내보려고요.”
하지 마. 제발.
“잘되길 빌게요. …저도 그날 모임에 갔었는데.”
그 말은 차라리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며 내 외모를 물었다. 나는 성실히 설명했지만,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참담했다.
“왜 기억이 안 나지?”
정민욱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 그렇지.
내 속에서 악마 같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아웃팅 될 수도 있는데…”
“물론이죠. 사무실에선 당연히 사무적으로만 대해야죠. 대신 밖에 나가면 뒤따라 나갈 거예요.”
뭐라고?
“일단은 나를 밝히고, 그가 좋아하는 시집을 줄 거예요.”
제길, 영리하기까지.
“그가 좋아하겠네요.”
“그럴까요?”
“좋아하는 책을 받는데, 당연히 좋아하겠죠.”
퍽도 좋아하겠다. 그깟 시집. 나라면 장미 한 다발을 줬을 텐데.
창밖을 보니 비가 그쳤다. 한석 씨는 정민욱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지금쯤 둘이 카페에 앉아 웃고 떠들고 있겠지. 그런데 나는 내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를 기다리고 있다.
휴. 집에 가서 발이나 씻고 자자.
정민욱. 진짜, 멀대같이 싱겁게 생겼더만.
4.
“여보세요? 자기야? 나야, 민욱이. 방금 코넷 무료 이용권 받았어! 부럽지? 이제 두 달은 요금 걱정 없다. 게다가 전화카드도 공짜! 지금 그걸로 전화하는 중이야.”
“뭐라고? 잘 안 들려? …나 알뜰하다고? 하하, 그럼! 내가 얼마나 절약하는데. 자기랑 데이트하려면 한 푼이라도 아껴야지.”
“뭐? 자기 것도 받아달라고? 자기도 코넷 할래? …알았어. 그럼 내가 하나 더 신청해 둘게.”
“근데 좀 걱정되네. 아까 들어갔다가 대리석에 진흙 잔뜩 묻히고 나왔거든. 다시 들어가면 직원들이 째려볼지도. 무섭지만... 자기를 위해서라면 그런 눈총쯤이야!”
“앗, 자기야! 대박! 코넷 담당 직원이 지금 밖에 나와 있어! 아싸, 신난다. 그분한테 바로 신청하면 되겠다! 역시 자기랑 통화하면 행운이 온다니까.”
“나 금방 가서 신청하고 다시 전화할게. 이따가 봐!”
부스를 벗어난 민욱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한석을 향해 달려갔다.
아직 젖은 보도 위에 그의 발자국이 꾹꾹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