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 단편극장 6
* 세기말 PC통신과 인터넷 초창기 동성애자 커뮤니티를 배경으로 한 오래 묵혀둔 단편소설을 공개합니다. 당시의 공기와 낯선 설렘을 함께 느껴보세요.
AM 07:30
“아빠, 오늘 일찍 퇴근하시는 거 잊지 마세요!”
아침부터 딸이 들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설레서 어쩔 줄 몰라하더니, 오늘은 아예 김말석 씨를 들볶기 시작했다.
“감색 양복은 절대 입고 나오지 마세요. 나이 들어 보이잖아요. 넥타이는 제가 골라 놨으니까 꼭 그걸로 매시고요. 엄마! 미장원 잊지 말고 다녀오세요. 그 사람한테 멋지게 보여야 한다고요.”
“조용히 좀 해라, 이것아. 결혼은 네가 하는데 왜 우리가 꾸며야 하냐?”
“칫! 이번에도 퇴짜 놓으면 나 죽어도 시집 안 갈 거예요. 그 사람 싫다는 말만 해봐요!”
딸은 이번에 실패하면 약이라도 먹을 기세였다.
“나도 이제 지쳤다. 네가 좋다면 결혼해라. 이번엔 반대 안 할 거다. 거지를 데려와 같이 산다고 해도 말리지 않겠다.”
“호호, 이번엔 아빠 마음에도 꼭 드는 남자일 거예요.”
“도대체 그 남자가 누구냐? 응? 여태껏 이름 한 번 말한 적도 없고,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면서 왜 이름조차 안 알려주는 거냐?”
“흥, 알려주면 지난번처럼 이름 가지고 트집 잡으실 거잖아요. 이번엔 얼굴 보기 전까지 절대 안 가르쳐줘요. 내가 또 당할까 봐!”
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지난번 집으로 데려온 녀석은 시쳇말로 정말 ‘밥맛’이었다. 딸과 헤어지게 만들려고 별별 수단을 다 썼던 기억만 떠올려도 김말석 씨는 씁쓸한 웃음이 났다.
“어떤 반대도 안 할 거다. 이제 네 결혼 문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호호, 두고 보세요. 이번엔 정말 마음에 드실 거예요.”
1997년 10월 20일.
김말석 씨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외동딸 영미가 인생의 짝을 소개하겠다고 며칠 전부터 공표했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PM 12:15
“12시에 형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봅시다.”
오전 11시 반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김말석은 단숨에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박영호였다.
그가 먼저 연락을 해온 건 몇 달 만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김말석 씨는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가 옷매무새를 다듬고 머리를 빗었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이발소라도 다녀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사소했다.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커피숍에 들어서기 전, 그는 잠시 꽃집 앞에 멈춰 섰다.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집어 들고 다시 생각했다. 너무 느끼한가? 아니, 오늘만큼은 괜찮다.
그런데 영호는 자리에 앉자마자 뜻밖의 한마디를 던졌다.
“저, 결혼합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영호가 입을 열었다.
김말석 씨는 숨이 턱 막혔다.
“그래… 언제 하는데?”
입에서 나온 말은 고작 그거였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무력한 대답.
“오늘 여자 쪽 부모님을 뵙기로 했습니다. 오늘 만나면 아마 날짜가 잡히겠죠. 늦어도 이번 달은 안 넘길 것 같아요.”
영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덤덤했다. 하긴, 지금 와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만나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인지 몰랐다.
이 얼굴. 얼마나 다시 보고 싶었던가.
“그 말하려고 만나자고 한 겁니다. 할 말 다 했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 커피잔 속 얼음이 녹아내리는 소리만이 남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붉은 장미 한 송이가 맥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PM 12:50
‘결혼 싫다.’
방금 전 영호에게서 차가운 통보를 당하고 돌아온 김말석 씨 앞에, 채팅방의 제목은 마치 자신의 심정을 정확히 말해주는 문장처럼 보였다. 직장인 전용 채팅방의 방제목으로 흔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채팅방 안에는 개설자 말고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신을 30대 초반의 샐러리맨이라고 소개했다.
<전 올해 마흔아홉입니다. 방제를 보고 들어왔는데 특이하네요. 무슨 사연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의외로 길게 이어졌다.
상대방은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지만, 정작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했다. 더 놀라운 건 그 사람이 이미 유부녀라는 사실이었다.
<왜 그런 사람과 사랑을 하나요? 미혼자도 많을 텐데요.>
그렇게 묻고 나서야 김말석 씨는 자신이 꼰대 같은 소리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영호에게도 늘 그렇게 말했다. 현실을 따져야 한다고, 사람의 인생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유지되는 거라고. 그리고 결국 그 말들로 인해 그는 영호를 잃었다.
<더 젊고 예쁜 사람도 많죠. 결혼할 상대도 괜찮은 여자예요. 하지만 그 사람은… 그냥 특별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요.>
‘특별하다.’
그건 영호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했던 말이기도 했다.
<그 유부녀는 몇 살입니까?>
<마흔이 넘었어요.>
<헉…>
김말석 씨는 잠시 키보드를 멈췄다. 유부녀’라고 해서 적어도 삼십 대쯤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마흔도 넘었다니. 그 나이의 여자를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니 갑자기 숨이 막혔다. 하지만 그는 곧 이해하려 애썼다. 도덕을 내세울 자격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 마음이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어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김말석 씨의 눈앞에 영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보다 열여섯 살이나 어린 남자. 처음엔 장난이라고 생각했던 관계가 어느새 삶의 중심이 되어버린 사람.
김말석 씨와 박영호는 지난 몇 년간, 애인 아닌 애인처럼 만나온 사이였다.
당시 마흔여섯이던 김말석 씨는 어느 날 우연히 TV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제목은 「어느 동성애자의 삶」. 그 프로그램을 본 순간, 그는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느껴왔던 결혼생활의 균열과 공허감의 정체를 처음으로 자각했다. 그리고 그날 밤, 평생 처음으로 ‘게이 극장’이라는 곳의 문을 열었다. 방송에서 소개된 종로의 P극장이었다.
그곳에서 그보다 열여섯 살이나 어린, 서른 살의 박영호를 처음 만났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욕망을 확인한 두 사람은, 그날을 시작으로 서로의 삶 속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처음엔 단지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였다. 다음엔 술을 마시고, 그다음엔 모텔 방에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다. 그리고 어느새, 일주일에 한 번씩 꼭 만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둘 다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그래서 서두르지도, 위험한 꿈을 꾸지도 않았다. 그저 서로의 일상 속에서 짧은 시간을 떼어내어 함께 술을 마시고, 서로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하며 지냈다.
가끔은 서로의 집을 방문해 가족들과 식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지내면서도 아무도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았다. 마흔여섯의 김말석과 서른의 박영호가 연인일 거라 짐작할 만큼 세상은 아직 동성애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두 집안은 오히려 가까워졌다. 휴일엔 함께 나들이를 가기도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어느새 ‘비밀스러운 사생활’에서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평온했던 일상은 결혼이란 화두로 인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집에서 결혼을 종용했고, 처음엔 무시하던 영호도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노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현실적인 두려움이 그를 짓눌렀다.
결혼을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점점 초조해졌다. 김말석 씨는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지금처럼 살면 되잖아. 일주일에 한 번씩 핑계 대고 만나면 되고, 가족끼리도 친하게 지내면 되지.”
하지만 영호의 대답은 단호했다.
“저는 그렇게 못해요. 아내를 속이면서까지 제 욕망을 채우고 싶진 않아요.”
그 말속에는 김말석 씨를 향한 비난의 뉘앙스가 스며 있었다.
“지금 나 비꼬는 거냐?”
“아니요. 형이야 결혼 후에 깨달은 거니까 어쩔 수 없지만, 저는 다르잖아요. 제가 게이라는 걸 숨기고 결혼한다면, 그 여자에게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할 거예요.”
그의 말은 옳았고, 너무도 뼈아팠다. 김말석 씨는 이 아이는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을까 싶으면서도, 그런 성실함 때문에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결혼은 두 사람 사이에 처음 등장한 ‘진짜 난관’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단순한 난관에 그치지 않고, 결국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결정적인 사건’으로 이어졌다는 데 있었다.
몇 달 전, 여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던 날이었다. 담배를 피우던 김말석 씨가 무심코 말을 꺼냈다.
“요즘 걱정거리가 있어. 우리 딸 말이야. 결혼하겠다고 난리야.”
“영미 씨요?”
“그래. 그런데 사윗감이 좀 이상한 놈이야.”
“왜요?”
“아무래도… 우리 쪽 같아.”
“직감이에요?”
“목소리도 그렇고, 하는 짓도 좀 수상하고… 딸애 말로는 자상하고 부드럽다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내 눈엔…”
그때부터 김말석 씨는 딸의 예비 남자에 대해 끝도 없이 험담을 늘어놓았다. 여자처럼 굴고, 남자답지 않다고. 그래서 게이일 것 같다고.
그러자 영호가 조용히 물었다.
“만약 그 사윗감이 게이라면, 그래도 결혼시킬 건가요?”
김말석 씨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미쳤어?”
그 한마디로 3년간 이어진 관계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날 밤 이후 영호는 말석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전화벨은 울리자마자 끊겼고, 회사 앞에서 기다려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영호와 만난 이후 발을 끊었던 P극장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술기운에 몇 번이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려 애써도, 영호만큼 성실하고 다정한 남자는 끝내 만나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빈자리는 더 커져 갔고,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이 점점 명확해졌다.
한 달이 지났다. 결국 김말석 씨는 인정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영호 대신 다른 사람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를 붙잡아야 한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는 술을 마시고 영호의 집 앞까지 찾아갔다. 초인종을 눌렀을 때 문 앞에 나온 영호는 그를 보자마자 다시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대문 밖에서 울며 사과를 구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결국 영호의 마음도 흔들렸다.
“정말 미안해. 용서해 줘. 그런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됐어.”
“그 친구랑 혼담은 어떻게 됐어요?”
“끝났어. 그쪽 집에서 싫대.”
물론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결혼을 막기 위해 온갖 핑계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런 진실을 영호가 알게 할 순 없었다.
눈물 섞인 사과가 마음을 움직였는지, 혹은 영호 역시 이별 기간 동안 같은 고통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두 사람은 결국 다시 만나기로 했다. 다만, 이번에는 예전과 다른 조건이 붙었다.
“왜 다시 찾아왔어요? 나보다 근사한 사람도 많았을 텐데.”
“너 없는 내 인생은 의미가 없어.”
“이젠 늙어서 사람들이 안 쳐다보나 보죠?”
“뭐야? 이래 봬도 내가 한 번 뜨면 줄 서는 젊은 애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는…”
“그럼 그 구름 타고 가시지 왜 나 붙잡고 울고불고하셨어요?”
“구관이 명관이라잖아. 너보다 좋은 사람 없더라.”
서로를 놀리며 웃었지만, 그날 밤 영호는 단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다.
“제가 결혼하게 되면, 우리는 다시는 만나면 안 돼요.”
“정말 그래야 돼?”
“네. 이번 일을 통해 확실히 깨달았어요. 게이들의 삶은 너무 불안정하다는 걸요. 결국 애인이 떠나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요.”
“죽어도 안 떠날게. 그런 말 하지 마.”
“아니요. 제 삶은 제가 설계해야 해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저는 반드시 결혼할 거고, 그러면 이 관계는 끝낼 겁니다.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 이상 형을 만날 수 없어요.”
김말석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이미 결혼한 몸이고, 영호에게 평생을 보장해 줄 수도 없으니, 결국 그의 삶은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야 했다.
“알았어. 그렇게 해. 다만 결혼 전에 꼭 말해줘.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달란 말이야.”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가슴 한쪽이 아파 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날이 오지 않기를, 가능한 한 늦게 오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날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찾아왔다. 다시 만나기 시작한 지 고작 한 달. 영호는 한 여자와 만나기 시작했고,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만나고 있다고 말했다.
“엄청 예뻐요. 마음도 착하고.”
“그래….”
속에서 무너져내리는 소리를 삼키며, 김말석 씨는 겨우 대꾸했다.
“왜 그렇게 서둘러?"
그렇게 빨리 결혼하면… 난 어떻게 하라고?
“이제 제 나이도 서른셋이에요. 어머니도 연세가 많으시고, 결혼을 해야 회사에서도 인정받고요.”
“그렇지… 그건 그렇지.”
담담한 척했지만, 속은 이미 부서져 있었다.
“그렇게 기쁜가 보네. 근데… 우리, 결혼하면 못 만나잖아. 넌 아무렇지도 않아?”
“어쩔 수 없잖아요.”
영호의 대답은 단칼 같았다. 차갑고 짧았다. 지난 3년 동안 함께 보낸 시간, 함께 웃고 울었던 순간들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날 벌어진 모든 일은, 결국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영호의 뺨을 처음으로 때린 것도, 앞으로의 결혼생활이 잘 되지 않기를 저주한 것도, “너 같은 놈들은 쌔고 쌨어! 어디 갈 테면 가봐!”라며 폭언을 퍼부은 것도, 모두 그 싸늘한 대답 때문이었다.
또 한 달이 흘렀다. 이번에는 영호가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회사 앞으로 찾아온 그는 다짜고짜 결혼 날짜와 상견례 소식까지 쏟아내고 떠났다.
<아, 저와는 완전히 반대 입장에서 사랑을 하셨네요.>
통신선 너머의 남자는 김말석 씨의 이야기를 들은 뒤,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점심시간은 이미 한참 전에 끝났지만, 그는 여전히 ‘접속 종료’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몇 년간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이야기를 쏟아내느라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듯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종종 “잠깐만요”라며 대화를 멈추는 걸 보면, 아마 사무실 눈치를 살피며 몰래 대화를 이어가는 듯했다.
<저도 얼마 전까지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죠. 저보다 16살이나 어린 사람이었습니다.>
김말석 씨는 의도적으로 ‘그 사람’의 성별을 숨긴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미 사랑을 갈구할 수 없는 나이에 우연히 찾아온 인연, 그 사람에게 정신없이 빠져버린 자신. 그러나 가족과 회사, 일상의 무게를 포기할 수 없어 수없이 마음을 다잡아야 했던 지난날. 고맙게도 그런 자신을 이해해 준 사람. 그리고 결국 결혼을 앞두고 떠나버린 그 사람.
말릴 수도 없었고, ‘함께 살자’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의 행복을 위해 물러나야만 했던 시간.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은 죽을 때까지 애인을 몰래 만났다고 하던데… 나는 그런 능력도, 그런 용기도 없군요.>
그것이 김말석 씨의 진심이었다.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한다면 가족과 헤어지고, 그 사람과 새 삶을 시작해 보지 그러세요. 인생은 짧잖아요. ‘나쁜 놈’이란 말을 듣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듣는 게 낫지 않을까요?>
<휴… 난 그런 용기도 없는 놈이라니까요.>
만약 그 사람이 여자였다면, 어쩌면 용기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날이 구만리 같은 젊은 남자였다. 영호에게는 돌봐야 할 부모도 있었고, 그의 삶은 아직 시작 단계였다. 그런 그에게 김말석 씨가 ‘모든 걸 걸 만큼의 가치 있는 사람’ 일 수 있을까? 아니, 과연 그가 영호에게 그만한 행복을 줄 수 있을까? 이 나이에, 결혼까지 한 몸으로….
화제는 어느새 상대방의 ‘유부녀 애인’ 이야기로 옮겨갔다.
<그녀도 아마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나이에서 오는 부담,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 당신이 받을 고통에 대한 두려움….>
김말석 씨는 어느새, 알지도 못하는 그 여자의 심정을 공감하고 있었다. 젊은 남자와 40대 주부의 불륜에 대한 도덕적 거부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소설에서는 중년의 불륜을 그렇게 아름답게 묘사하지만, 현실은 참 초라하네요.>
<진실은 언제나 땅 위에 있으니까요.>
현실은 실낙원이 아니다. 그것이, 김말석 씨가 영호와의 관계에서 마주한 마지막 진실이었다.
<하지만… 저는 그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 못할 것 같아요.>
상대방의 말에 김말석 씨는 순간 숨을 멈췄다.
<포기하지 못한다니… 그러면 상처만 깊어질 텐데요.>
상처. 그 단어는 김말석 씨의 지난 시간을 그대로 요약하고 있었다. 영호가 결혼을 말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 화가 치밀어 폭언을 내뱉었을 때, 그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던 눈물. 점심시간에 들었던 마지막 작별의 말, 그리고 느꼈던 완전한 고립감.
그 모든 순간이, ‘포기하지 못한 사랑’이 남긴 상처였다.
<결국 이루어질 수 없다면, 빨리 마음을 정리하는 게 둘 다를 위해 좋을 겁니다.>
그가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 말은 곧,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했다.
“부장님. 사장님 호출이에요.”
그때, 아까부터 창가의 김말석 씨 자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미스 최가 큰소리로 김말석 씨를 불렀다.
<죄송해요. 오늘은 여지까지밖에 채팅을 못하겠어요. 사장님이 부르신 다니 가 봐야겠네요.>
“부장님! 빨리 오시래요.”
“알았어.”
컴퓨터 파워 단추를 누르고 양복 윗저고리를 챙긴 김말석 씨는 서둘러 사장실로 달려갔다.
PM 3 : 30
사장실에서 돌아온 김말석 씨는 거래처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회사 문을 일찍 나섰다. 오늘은 사윗감의 얼굴을 처음 보는 날이었다. 아버지라면 들떠 있어야 할 순간이었지만, 점심시간에 들었던 영호의 말 한마디가 온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들뜬 마음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흩어져 버렸다.
하지만 흥분으로 들떠 있을 딸아이 앞에서 그런 얼굴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영미는 벌써 한 시간 전부터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버지를 보자마자 옆에 딱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아내는 미용실에서 약속 장소로 바로 올 예정이었다.
“아빠, 나 결혼한다고 회사에 말했어요?”
“아니.”
“왜 안 했어요? 이번에도 딱지 놓으려는 거죠?”
“그야 만나봐야 알지.”
영미는 입을 삐죽였다.
“이번에도 반대하면 진짜 죽어버릴 거예요.”
“설마 저번처럼 계집애 같은 녀석 데려오는 건 아니겠지?”
“걱정 마세요. 이번엔 씩씩하고 성실한 남자예요. 아빠도 분명 좋아하실걸요.”
영미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누굴까. 딸이 이렇게까지 장담하는 남자라니.
그러고 보니, 아까 영호를 만났을 때 영미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영호 알지? 우리 집에도 가끔 왔던 그 친구.”
“왜요?”
“오늘 결혼할 여자 부모를 만난다더라.”
“그래요? 언제 한대요?”
“몰라. 오늘쯤 날을 잡지 않겠냐고 하더라.”
“정말 우연이네요.”
영미는 신이 난 듯 웃었다.
“그렇게 좋으냐? 결혼하는 게?”
“아빠 질투하는 거죠? 사위를 질투한다잖아요. 사위한테 딸을 빼앗기는 기분이라던데.”
아니야, 바보야. 질투하는 건 사위가 아니라 영호다.
“아빠, 영호 씨는 장가 잘 갈 거예요. 씩씩하고 성실하잖아요.”
영미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김말석 씨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래. 어떤 여자랑 결혼하든 영호한테는 복이지. 그런 남편감 찾기 쉽지 않으니까.”
택시는 어느새 호텔 앞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아내가 머리를 매만지며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신비로운 사윗감의 얼굴을 보게 될 터였다. 그때 영미가 김말석 씨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는 유난히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빠, 영호 씨… 정말 최고의 남편감이죠?”
PM 10: 15
세 시간 전, 호텔 커피숍에서 딸과 아내를 집으로 돌려보낸 뒤였다. 김말석 씨는 지금 영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직도 정신이 몽롱했다.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졌고, 그중 일부는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딸의 약혼자가 영호라는 사실도, 그 사실을 알고도 영호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방으로 데려왔다는 것도.
“아까 채팅방에서 얘기했던 사람… 바로 저예요.”
“뭐라고?”
“영미 씨한테 물어봤죠. 형이 요즘 회사에서 채팅을 한다고. 그래서 그 시간에 맞춰서 매일 똑같은 제목으로 방을 만들어뒀어요. 형 아이디가 들어왔을 때, 운명은 이미 결정된 거라고 생각했죠.”
영호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제 형의 남은 인생이 의미 없이 끝나지는 않을 거예요.”
김말석 씨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영미는 어떻게 할 거야?”
“열렬하게 사랑해 줄 자신은 없어요.”
“그럼 왜 결혼을?”
“타협이에요. 서로 반반씩 짐을 지는 거죠.”
“반반씩…?”
“전 아내에게 게이라는 사실을 숨긴 죄책감을 안고 살 거고, 형은 그 불쌍한 여자가 자기 딸이라는 부담감을 안고 살겠죠. 서로의 삶에 균열을 남긴 채로 살아가는 거예요. 하지만 적어도, 둘 다 완전히 외롭지는 않을 겁니다.”
김말석 씨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모든 것이 무너졌는데도, 이상하게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것 같았다. 사랑도, 삶도, 욕망도 더 이상 순수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한 순간, 오히려 모든 게 편해졌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서로를 탐하며 오래도록 포옹했다. 그동안 쌓인 그리움이 육체를 통해 터져 나왔고, 한때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랑이 이제는 서로의 공허를 메워주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
아마도 둘은 밤새도록 대화를 나눌 것이다. 아마도 앞으로도 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곧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