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 사랑의 수다회

추석특집 단편극장 7

by 선우비

* 세기말 PC통신과 인터넷 초창기 동성애자 커뮤니티를 배경으로 한 오래 묵혀둔 단편소설을 공개합니다. 당시의 공기와 낯선 설렘을 함께 느껴보세요.


어두워서 바 안의 사람 얼굴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의자에 앉아, 흐릿한 조명 아래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공기는 기수가 늘 뿌리고 다니는 캘빈클라인 향수처럼 목을 조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둘러봤지만 낯익은 얼굴은 없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이미 인생의 전성기를 훌쩍 지난 얼굴들이었다.

나는 기수가 생일 선물이라며 건넸던 넥타이를 괜히 만지작거리다 옆자리 남자가 들고 있는 전자담배에 시선을 빼앗겼다. 묘하게 생겼다. 지금 이 순간, 내 흥미를 끄는 건 그 물건뿐이었다. 괜히 여길 왔다는 생각이 들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지난주, 시티에 올라온 글을 먼저 본 건 기수였다.

“형, 이것 좀 봐요!”
기수가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여기 한 번 가봐요.”
“가라고? 무슨 모임인데?”
나는 심드렁하게 화면을 들여다봤다.


아래와 같이 초대합니다.
1년에 한 번뿐인, 부산 중년 게이 모임 <갈매기사랑>의 수다회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자격: 50대 이상
때: 4월 5일(일) 오후 8시
곳: 게이바 「섬」
주의 : 커플일 경우 반드시 한 사람만 (꼭!) 오세요.


“이게 뭐야? 커플일 경우에는 한 사람만 참석 가능하다고? 뭔가 수상한대?”
내 말에 기수는 못 들은 척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부산에 중년 모임이라고는 달랑 이거 하나밖에 없더라고요. 부산 온 지 벌써 두 달인데 아직 아는 사람도 없고, 너무 심심해요. 우리도 게이 모임에 나가서 사람을 사귈 필요가 있어요.”
기수의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던가. 네 수다를 한두 번만 들어도 사람들은 도망가고 싶어 할 텐데.

“그럼 네가 가든가.”

“그러고 싶어서 쪽지도 보냈죠. 근데 이번 모임에는 나이제한이 있잖아요. 오십 넘어야 한대요. 짜증 나 죽겠네. 형이라도 가서 분위기 좀 보고 와요. 이제 형도 정신 차렸으니까, 다른 게이들 만나도 딴짓 못할 거고.”

기수의 말은 늘 그렇듯 빈정거림으로 끝났다.

“됐어.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너 때문에 잘되던 가게도 접고, 서울까지 떠났으니까.”
“뭐라고요? 내 탓이라고요?” 기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다 형 잘못이죠. 내가 형을 길거리로 내몰지 않은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돼요. 내 돈 없었으면 어떻게 부산에서 가게를 차렸겠어요.”
“그래, 알았어. 미안하다. 그만하자.”

기수는 콧방귀를 뀌며 갈색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옷은 뭘 입을까요? 너무 멋지게 차려입으면 진드기가 달라붙을 테니까… 지난번 산 넥타이에 짙은 갈색 양복이 무난...”

그는 내가 입고 갈 옷까지 일일이 참견했다. 지난 7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래왔던 것처럼.

그렇게 해서 5일 밤, 나는 '앞으로 기수가 참여할 모임의 분위기를 미리 파악하라'는 임무를 띠고 갈매기사랑 수다회에 나가게 되었다.

참석자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 건 저녁 8시쯤이었다. 모두가 피로하고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방금 투자한 코인이 폭락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 같았다. 기수가 좋아할 만한 중년 남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기수라면 회비를 냈다 해도 곧바로 뛰쳐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낸 회비만큼은 술로 본전을 뽑겠다는 심정으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제 모두 모인 것 같군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전처럼 제 옆자리부터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한 사람 당 1분씩 말씀해 주세요.”
모임장이란 사람이 말했다.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슬프고 피로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깨로로입니다. 내 애인은, 내 애인은……."

남자는 불안한지 이마의 땀을 닦았다.

“올해는 최악의 해였어요.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 애인은 젊고 잘생겼죠. 다른 사람 눈에는 제가 행복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이것저것 사달라고 조릅니다. 어떻게 내가 그렇게 많은 돈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거절하면 집 안에 있는 물건을 전부 싸 들고나가겠다고 협박을 해요. 돈이 없어서 여기저기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고 빚을 내서 다 사줬는데도, 한정판이니 새 아이폰이니 하면서 또 조릅니다. 이제 돈도 다 떨어지고, 빌릴 데도 없습니다…”

"1분입니다. 캐로로 씨!"

모임장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리에 앉았다.

다음 차례는 ‘츄바카’라는 닉네임의 남자였다.

"츄바카입니다. 애인이 졸라서 애인 동생이 집에 들어왔어요. 물론 애인 동생도 우리 관계를 알고 있지요. 처음엔 가족 중에 우리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곧 본색을 드러냈죠. 불만도 두 배, 트집도 두 배! 여러분은 아마 상상도 못 할 겁니다. 5분만 늦게 들어가도 둘이서 바람피우고 왔냐며 야단이고, 애인 생일이나 기념일을 잊어버리기라도 하면 동생이란 놈이……."

츄바카가 모임장을 바라보았다.

"아직 괜찮습니까?"

"10초 남았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젠 다 지나간 사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지 마십시오, 여러분!"

"1분입니다."

그다음부터는 줄줄이 쏟아지는 ‘하소연 릴레이’였다.

처음엔 긴장돼 있던 내 몸이 점점 느슨해졌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거의 황홀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기가 막히다. 1년에 한 번씩 모여 애인이나 썸남, 혹은 다른 게이에게 받은 스트레스와 분노를 1분간 쏟아내는 자리라니. 혼자 끙끙 앓던 걸 다 같이 토해내고, 박수를 받고, 위로를 받는다. 부산에 이렇게 멋진 모임이 있다니! 이게 '부싼싸나이들'의 기개인가?

김선동이란 남자는 “처음엔 근육질이던 애인이 같이 살고 나서는 90kg이 넘는 뚱보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만 처먹어!" 그는 실제로는 하지 못한 말을 외치고 자리에 앉았다.

다음은 메로나씨. 오랜만에 섬세한 남자를 만났다고 기뻤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췌장암에 걸렸다고 믿어 지금까지 서른여섯 명의 의사를 찾아다녔다는 건강염려증환자였다. 이제는 같이 병원에 다니자고 조른다나? 당근남 씨의 썸남은 첫 섹스를 하자마자 곧바로 방귀를 붕붕 뀌었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거북이들을 계속 강에 방생하자고 조른다는 포포씨의 애인.

그 외에도 섹스에 관한 천박한 이야기, 돈을 주고 남자를 산 이야기, 바람피우다 들킨 이야기까지, 보통이라면 부끄러워서 입 밖에도 내지 못할 이야기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거나 혀를 차지 않았다. 오늘 밤만큼은 어떤 고백이라도 환호받고, 어떤 추악함이라도 박수를 받았다.

‘그래서였구나. 오늘의 수다회가 50대 이상으로 나이를 제한하고, 커플 중 단 한 사람만 받는 이유가.’

입가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일부러 시선을 끌려고 애쓴 건 아니었다. 다만 입을 열어 애인이 내게 어떤 짓을 했는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만으로도, 통쾌할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임장을 보았다.

"시작하시지요."

“해양왕이라고 합니다.”
나는 한숨을 섞어 말문을 열었다.
“그의 이름은 정호. 우리가 운영하던 식당에 아르바이트로 들어온 스물셋 짜리 청년이었죠. 처음엔 그저 일하는 친구 정도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쪽 사람이었고… 어느새 사랑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결국 들켰고, 애인은 그 사실을 친구들에게 떠벌리며 정호를 ‘진드기’라고 불렀습니다. 진드기를 떨어뜨리려면 아주 먼 곳으로 이사까지 가야 한다고 말했죠.”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문제는, 그 가게가 애인의 돈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겁니다. 나는 투자 실패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고,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죠. 결국 애인은 내 ‘바람기를 뿌리 뽑겠다’며 가게를 정리하고 부산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정호와 함께하고 싶었지만… 돈 없는 중년 남자의 사랑이란 게 그렇더군요. 현실은 냉혹했고, 정호와 다시 볼 수 없게 됐습니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났지만, 애인은 여전히 그 일을 들추며 나를 조롱합니다. 돈만 있었다면… 진작 헤어졌을 겁니다.”

"해양왕씨, 1분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거의 외치듯 말했다.

59년 동안 이렇게 속이 후련한 적이 있었던가. 막혔던 것을 토해낸 듯 시원했다. 웃음이 자꾸 흘러나왔고, 사연을 들을 때마다 환호를 보냈다. 특히 나처럼 애인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연에, 손바닥이 아프도록 손뼉을 쳤다.

“애인이 자기보다 돈을 못 벌어온다고 투덜거린다.”

“늦게 들어오면 남자 만나고 온 거 아니냐며 냄새를 맡는다.”

"의견이 엇갈릴 때마다 자기는 서울에 있는 대학 나왔다고 으스댄다. 난 고졸."

"애인의 옷을 직접 만들어 6. 25 배경의 영화에서나 나오는 몰골로 다니게 한다."(오늘 밤도 그는 그런 차림이다)

왜 다들 그렇게 지겨운 애인하고 헤어지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처럼 돈이 없어서 못 헤어지는 걸까? 하긴 여기 모인 사람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무리 못된 애인이라 해도 쉽게 헤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놈의 나이가 뭔지…….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내내 웃고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할 정도로 즐거워 보였다. 혼자만 다른 모임에 온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모임장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대단히 훌륭했습니다. 자, 그럼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성년 씨, 종이와 연필을 나눠주세요."

"투표요?"

나는 옆에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의 애인은 남자가 외출하는 게 싫을 때는 남자의 가발을 숨겨버린다고 했다.

"그래요, 우리들 가운데서 가장 못된 놈과 만난 사람을 뽑는 거죠."

나는 주저 없이 내 이름을 썼다. 해양왕. 아무래도 가장 지독한 인연에 얽힌 사람은 나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모임장은 종이를 걷어 정리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밤 처음 나온 회원이 뽑혔습니다. 해양왕씨. 돈이 없어서 자신을 푸대접하는 애인을 감수하며 살고 있는 불쌍한 분이죠."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일어서 박수를 받았다. 자랑스러움과 허무함이 뒤섞인 이상한 기분이었다. 다른 누구보다 애인을 신나게 욕함으로써, 나는 이 나이에 겨우 내 존재를 증명한 셈이었다. 이게 늙은 게이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스트레스 해소법이라니.

사람들이 몰려와 내 손을 잡았다. 어떤 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 등을 두드렸다.

잠시 뒤, 모두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합석해 한잔씩 마실 때, 나는 모임장에게 다가가 술을 따라주었다.

“대단한 아이디어예요. 이렇게 속에 쌓인 걸 토해내는 자리가 있다는 건 정말 귀한 일이네요. 그런데, 이 모임은 누구 생각입니까?”"

“제 생각이죠. 지난 5년간 매년 열었어요."

"그렇군요. 그런데 왜 당신은 얘기를 안 하셨습니까? 당신이 만든 모임이라면서."

“저요? 전 말할 자격이 없어요. 제 애인은… 벌써 4년 전에 세상을 떠났거든요.”

“아… 그렇군요.”

갑작스러운 불안감이 밀려왔다.
“저기 계속 웃고 있는 분은 누구죠? 저분도 아무 말이 없던데...”

“아, 철민 씨요? 작년에 애인을 교통사고로 잃은 분이에요.”

모임장은 싱긋 웃으며 내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철민 씨 애인은 작년 투표에서 ‘최악의 애인’으로 뽑혔죠.”


* 처음 소설을 습작할 때는 재미있게 읽은 소설의 배경을 가져와서 새로운 창작을 하거나 주인공들을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로 바꿔보곤 했다. 이 소설도 그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원작자는 엘신 앤 그라팜. 우담출판사에서 나온 추리소설 앤솔로지에서 뽑아낸 글이고, 원제목은 남자들만의 하룻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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