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소설 탐험기 - 고전 편

by 선우비

* 이 글은 오래전에 쓴 것이지만, 지금 다시 읽어도 충분히 공감대를 얻을 만한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유효한, 퀴어 독자들을 위한 소설 읽기 기록입니다.


퀴어들을 위한 독서일기


지금은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동성애를 다룬 소설을 찾는 일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 어려웠다. 특히 동성 간의 사랑을 이상야릇한 자극이 아닌, 경건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묘사한 작품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그런 작품을 원하지 않았거나, 애초에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성애 인권운동의 성장과 함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졌다. 해외에서 주목받은 동성애 소설들이 매년 두세 편씩 번역·출판되고, 청소년을 위한 동성애 소설이 등장했으며, 한국 작가들의 작품도 해마다 한 편 정도씩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책장 한 칸을 채우기조차 어려운 양이지만, 그 내용과 수준만큼은 결코 작지 않았다.
목적의식을 갖고 출판된 작품이어선지 대부분은 ‘마음의 양식으로서의 독서’를 충분히 만족시킬 만한 수준이었다. 모두 읽어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중에서도 꼭 읽어야 할 작품을 몇 편 꼽아 소개하고자 한다.


베니스에서 죽을 수밖에 – 『베니스에서 죽다』


노벨상 수상 작가 토마스 만의 이 아름다운 단편은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동성로 언급되지 않았다. 서구 문학이 기록하기로 가장 아름다운 소년이 분명한 ‘타지오’는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미켈란젤로의 조각품처럼 '절대적인 미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갖 예술적 수사를 걷어내고 보면,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 죽다』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은 대상을 향한 집착에 관한 이야기다.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노년의 작가 아센바흐에게 타지오는 그가 평생 추구해 온 예술혼의 화신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라도 곁에 있고 싶은 사랑 그 자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평생을 예술로 자신을 칭칭 감아온 위대한 아센바흐는 겨우 “수염이 나지 않은 빨간 머리에 주근깨 많은 피부”를 가진 이국적인 남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낯설고 위험한 베니스로의 여행을 꿈꾼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타지오라니!


“꿀빛깔의 머리털은 곱슬거리며 뒷덜미와 목에 흘러내리고, 태양은 척추 윗부분의 솜털을 비추어 주었다. 그리고 늑골의 섬세한 자국과 가슴의 균형은, 동체가 팽팽하게 조여지도록 입고 있는 해수욕복을 통해 역력히 드러나 보였다. 겨드랑이는 조각품처럼 매끈하였고 정강이는 반짝반짝하였다. 푸릇푸릇한 혈관들은 그의 육체가 보통 다른 육체보다 더 깨끗한 물질로 형성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러니, 베니스에서 죽을 수밖에.


영국은 그들의 것이었다 – 『모리스』

영국 왕실의 로맨스는 언제나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왕위를 버리고 연인을 택한 윈저 공, 평범한 교사에서 왕세자비가 된 다이애나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만약 당신이 로맨스의 여주인공이라면 지위도 명예도 다 버리고 나를 찾아온 윈저 공의 연인이 되고 싶은가, 아니면 궁극의 신데렐라인 다이애나가 되고 싶은가?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도서관에 가봐도 신분 상승 신데렐라 이야기 압승!

하지만 게이 로맨스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왕궁에서 살 용기를 가진 게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혹은 세상의 비난을 모두 견디며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E. M. 포스터는 『모리스』를 통해 말한다. 진정한 해피엔딩을 원한다면, 시대라는 장벽을 넘어 도망친 이 두 청년들처럼 하라고.


“모리스와 알렉은 연고도, 돈도 없이 계급의 울타리 바깥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노동하고 서로에게 충실해야 했다.
그래도 영국은 그들의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우정 말고도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또 하나의 보상이었다. 영국의 공기와 하늘은 그들의 것이었지, 숨 막히는 조그만 상자만 소유할 뿐 자신의 영혼은 갖지 못한 소심한 수백만의 것이 아니었다.”


병과 더불어 태연하게 살아가는 것 – 『코리동』

동성애가 젊은 청년들이 건전한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한 필수 덕목처럼 여겨지던 그리스 시대에는 동성애를 설명하기가 쉬웠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원래 인간은 한 몸에 얼굴이 두 개, 팔과 다리가 네 개였다. 남자와 여자가 붙어 있기도 했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붙어 있기도 했다. 그런데 지극히 오만해진 결과 제우스 신이 번개로 인간을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찢어진 반쪽을 찾아 헤맨다.”


그래서 이성끼리 붙어 있던 인간들은 이성애를, 동성끼리 붙어 있던 인간들은 동성애를 추구하게 됐다는 것이다. 잔혹하지만 신비로운 이야기다.

이런 옛날이야기를 그냥 믿고 살면 편하고 좋을 텐데, 앙드레 지드가 활동하던 1920년대는 달랐다. 동성애는 자연에 어긋난 병으로 ‘과학적으로’ 공격받던 시기였다.

앙드레 지드는 플라톤처럼 아름다운 전설로 이 문제를 유야무야 넘겨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동성애에 대한 세간의 공격 지점을 하나하나 나열한 후, 친구 코리동으로 하여금 조목조목 ‘과학적인 근거’에 입각하여 반박하는, 짧지만 강렬한 소설을 썼다.

작품의 논리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반(反) 동성애 담론에 맞서는 훌륭한 교과서라 할 만하다.


“(그것이 병이라면) 중요한 것은 치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병과 더불어 태연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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