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 에세이 선생님의 신작

by 선우비

정규환, 《사랑을 찾아갈 거야》


이 브런치를 처음 시작할 때 심사에 제출한 글은, 이후 전자책으로 엮인 『제주에서 한 달 살기』였다. 운이 좋게 한 번에 통과되었지만, 사실 그 글은 홍예당에서 진행한 글쓰기 모임에서 김비 선생님과 함께 고친 작품이었다. 순전히 내 힘으로 만든 결과물이라 말하기는 어려웠다.

사실 나는 에세이라는 걸 거의 써본 적이 없었다. 이 브런치도 원래는 소설을 연재하기 위해 만든 계정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소설 연재를 시작했는데, 아시다시피 소설이란 게 매일같이 올릴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브런치는 일정 기간 동안 새 글이 올라오지 않으면 재촉하는 시스템이라, ‘그냥 일상 에세이라도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써보려니 에세이라는 장르의 감이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홍예당에서처럼 누군가에게 배우고 싶었지만, 나의 이야기를 이해해 줄 “이쪽 글 선생님”은 쉽게 찾기 어려웠다. 김비 선생님은 소설가시고, 다음 수업도 단편소설로 예고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동성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성애자 선생님(그리고 수강생들)과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코로나 탓에 — 아니, 덕분이라 해야 할까 — 온라인 줌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 우연히 알게 된 ‘이쪽 에세이 선생님’, 바로 정규환 선생님이었다.

수업에는 뉴욕에서 한 명, 대전에서 한 명, 그리고 부산에서 두 명이 참여했다. 기본적인 에세이 구조와 표현법을 배우면서, 매주 각자 자신의 고민이나 일상에서 포착한 이야기를 써서 제출하면 선생님이 코멘트를 해주는 방식이었다.

그 시절 나는 막 오십하나를 넘기고 있었다. 오십이 넘었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고,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 불안을 풀어내기 위해 〈지천명+1의 신년계획〉이라는 프로젝트를 생각했고, 그렇게 세 차례의 수업을 거쳐 탄생한 글들이 바로,


책과의 뜨거운 재회

송구영신(送舊迎新) 친구들

주책맞은 게이 커플이 이 세계에서는 누군가의 롤모델?


였다.

물론 수업 덕분에 글쓰기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에세이를 계속 쓰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으로 생겼다. 도서관에서도 이제는 소설뿐 아니라 에세이와 시집을 함께 빌려보게 되었다.

정규환 작가님의 책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바로 사서 조금씩 아껴 읽었다. 독후감을 꼭 써야지 생각했지만, ‘일동졸업’ 준비에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이렇게 글을 올린다.

책을 전반적으로 요약할 능력은 없어서, 내가 특히 좋아한 문장들만 적어보려 한다. 대체로 내가 평소 생각하던 것과 닮은 문장들, 혹은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 구절들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 동성 파트너와 함께 인생을 꾸려나간다는 것은 엄마 아빠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생 일대의 개척자 정신이 필요하다.


- 한 번은 매해 사회 분야별 트렌드를 제시하는 베스트셀러를 우연히 훑다가 놀란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정말 내가 그 책이 전망한 대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론 내 의지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어쩌면 예측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이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과연 뭐가 있나 싶어 허탈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


- 해외여행이 싫어진 건 재난 후의 삶에 대해 만족해서라기보다는 더 이상 새로운 자극에 반응하지 않게 된 쪽에 가깝다.

비행기 티켓을 마치 복권인 양 고작 몇십만 원 사치에 행운을 기대하며 스카이스캐너 최저가로 도망친 사람의 운명은, 시간을 대가로 빛나는 무언가를 반드시 찾아와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건 가난한 여행자들의 슬픈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여행에 진 빚은 언제라도 꼭 갚아야 했다.


- 단언컨대, 다른 무엇보다 옷을 공유한다는 건 동성끼리만 할 수 있는 가장 비밀스럽고 귀여운 행위 중 하나이고, 두 사람의 옷장이 하나가 된다는 건 매일 새로운 스타일을 만날 수 있는 가슴 뛰는 문이 열린다는 뜻이다.


- 목욕탕은 그저 목욕하는 공간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목욕탕은 '다른 남자 몸으로 향하는 시선을 들키면 어떡하지?', '세신을 받다 발기되면 어떡하지?' 같은 두려움이 드는 공간인 한편, 내가 남성에게 끌리는 정신과 신체를 가진 게이라는 걸 선명하게 자각했던 공간이었다. 그래서 감히 세신을 받아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 (동성애반대집회에 나온 사람과) 대화를 나눠보니 그저 무식하고 용감하지만 한 어그로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맹목적인 그의 삶이 그저 안쓰럽다고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종교가 없는 나는 왜 이토록 나약한 이들이 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내가 모든 걸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광장에 들어서기 전 으레 들었던 두려움과는 분명 다른 감정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5월의 파란 하늘처럼 개운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것을, 감히 용서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 (동성결혼 신청서를 구청에 제출한 후 창구 직원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들은 후) 법은 우리를 거절했지만, 사람은 우리를 거절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 '끼순이'는 오랜 시간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 남성적인 매력이 없는 사람을 지칭하는 멸칭으로 통용돼 왔지만, 세상을 살다 보니 끼순이란 존재는 이 각박한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자들임에 틀림없다.


작가 소개

정규환, 1990년 봄 서울 출생.
잡지 에디터, 영화 마케터, 바리스타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며 도시에서 살아왔다.
《사랑을 찾아갈 거야》는 도시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첫 번째 에세이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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