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에 미친 자가 추천한 소설 읽기 1
인터넷에서 흥미로운 글을 하나 봤다.
“BL에 미친 사람이 읽은 브로맨스, 남성우정서사, 퀴어 책들 목록.”
작성자는 자신을
“BL 웹소설에 미친 자… 종이책도 남성우정서사, 브로맨스, 퀴어만 읽음.”
이라고 소개한다. 그가 재미있게 읽은 책 목록을 죽 나열해 놓았는데, 그중엔 내가 이미 읽은 책들도 상당히 많지만, 전혀 몰랐던 작품들도 꽤 있었다.
<대도시의 사랑법>(박상영)처럼 대놓고 퀴어소설인 작품에서부터, <데미안>(헤르만 헤세)처럼 퀴어와 브로맨스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 하는 작품, <카라마조프 집안의 형제들>처럼 형제애를 다룬 고전까지… 범위가 넓었다.
그동안 나는 ‘퀴어소설’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온 책들만 찾아 읽어왔다. 자연스럽게 소재도 정체성 고민 중심으로 치우쳐 있었고, 어느 순간 약간 물리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 나에게 이 목록은 말 그대로 식욕이 돋우는 메뉴판 같았다.
그래서 지난번 했던 ‘독감을 이기기 위한 2024 베스트셀러 읽기’에 이어, 이번엔 “BL에 미친 자가 추천한 소설 읽기”에 도전하기로 했다.
그냥 읽고 단순 독후감 쓰는 건 재미가 없으니까, 소설 속 남성 캐릭터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브로맨스(혹은 우정)를 ‘퀴어력 점수’로 환산해 보기로 한다.
퀴어력 만점은 10점.
100% 사랑이면 10점, 사랑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우정이면 5점 이상,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관계면 그 아래로 점수를 주는 방식.
1. 마호로역 다다 심부름집(미우라 시온) – 다다와 교텐
마호로역 앞에는 ‘다다 심부름집’이 있다. 의뢰받은 일은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라면 시간당 2천 엔을 받고 뭐든지 해주는 작은 센터. 사장은 다다. 아이 없는 이혼남, 30대 추정. 덩치 크고 조용하며, 성격도 무난한 남자다. 예전에는 자동차 영업사원이었다.
어느 날, 다다의 삶에 고등학교 동창 교텐이 느닷없이 ‘스며든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버려진 개처럼 이곳저곳 떠돌다 들어온 남자. 그 역시 이혼남, 30대 추정. 깡마르고 신경질적인 데다, 힘도 없어 보이면서 문제만 생기면 ‘패버리면 돼’ 같은 사고방식을 택한다. 심지어 결국 칼 맞고 쓰러지기까지 하니, 세상과의 관계를 아예 포기해 버린 사람이라는 느낌.
이 두 남자가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며 만나는 다양한 의뢰인들이 소설을 이룬다.
역시 눈에 띄는 인물이 교텐이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아이로 유명했다. 공작시간, 절단기로 작업하던 중 의자에서 넘어지던 친구에게 떠밀려 손가락이 잘려나갔을 때조차 “아야!”가 그가 입 밖에 낸 유일한 말이었다.
사회인이 된 뒤엔 레즈비언에게 정자를 제공해 아이를 낳고 결혼까지 했으면서도, 정작 타인과 성관계를 맺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남자. 소설 속 묘사만 보면 무성애자로 추정되지만, 내가 아는 무성애자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대체로 초식남 같은 이미지가 많은데, 교텐은 불쑥 남을 패고 다니는 타입이니까. 작가의 무성애 이해가 다소 단순한 건지, 아니면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란 그의 배경이 그렇게 만든 건지,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다.
스카잔을 입고 다니는 무성애자.
그 자체로 이미 독특하고, 읽는 즐거움을 주는 인물이다.
소설에는 중요한 비밀이 하나 있다.
교텐의 손가락이 잘리던 그 사고—사실 의자를 넘어지게 만든 사람은 다다였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사고는 벌어졌고, 책임은 끝내 넘어지던 친구가 지게 되었다. 그 뒤에 작은 계략 같은 뉘앙스가 있었다는 사실은 오직 다다만 알고 있다.
다다가 교텐을 곁에 두는 이유가 처음엔 죄책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년을 함께 살고 난 뒤, 이 둘의 관계는 ‘일’이나 ‘동료’ 같은 금세 분류되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묘한 결속을 띠게 된다.
겉으로는 성격도 다르고, 삶의 궤적도 다르지만, 이상하리만큼 서로의 결핍을 정확히 메우는 관계.
그래서 이들의 퀴어력 점수는…..
사랑으로까지 발전 가능성은 없으니 4점.
소설 속 이 문장—
“어른이 되면 친구도 지인도 아닌, 미묘한 관계의 교제가 늘어난다. 보통 같으면 교텐을 ‘같이 일하는 동료’로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교텐은 보통이 아니어서 그것도 딱히 맞지 않는다.”
요즘의 내 인간관계를 정확히 설명해 주는 말 같다.
친구라고 하기엔 멀고,
지인이라고 하기엔 따뜻한 사람들.
같이 일하는 것도 아니지만,
SNS 단톡방에서는 수시로 말을 섞고,
서로의 과거나 속사정도 대충 알고,
가끔 술자리에서는 건배도 하고,
퀴어퍼레이드 뒤풀이에서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그런데도
단톡방을 나가버리면,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금세 끊어질 것 같은 사람들.
그럼에도 이상하게,
내 부고가 들리면
조용히 조문 와줄 것 같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게 잘 살아가는 모습일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어느 틈에선가
관계의 회색지대를 떠돌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