괌에서 결혼식 준비하기

괌 결혼원정기 2

by 선우비

진에어 저녁 9시 비행기.

아침에 단골 재활의학과에 들러 어깨 초음파를 보고 주사를 맞았다. 고질병인 허리에도 한 방 더 맞았다. 여행만 준비하면 꼭 어딘가 아파오는 징크스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오스씨도 며칠 전부터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 결국 오스씨도 같은 병원에서 주사를 맞았다.

이번 여행은 결혼이 목적이라 그런지 쌍으로 아팠다..

관절이 저들끼리 먼저 결혼식을 올리느라 난리인 모양이었다.

처방받은 항생제 때문인지 계속 졸리고 열도 조금 났지만 기분은 가벼웠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게이 커뮤니티에 발을 들인 이래로 어쩌면 인생의 목표처럼 여겨온 일이었다.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하게 된 계기도 형의 결혼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었다. 형의 사랑은 가족들의 축복을 받는데, 나는 여전히 연애 한 번 못 해본 사람처럼 보이는 게 그날따라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형을 만난 김에 결국 말을 꺼냈다.

“형이 내 성정체성과 내 애인을 인정하지 않으면 나도 형수님을 인정하지 않을 거야.”

돌발 선언이었다. 형은 깜짝 놀라더니 백 번 인정할 테니 결혼식에 애인을 꼭 데리고 오라고 했다.

결국 형 결혼식 사진에 박제된 그 친구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졌다. 그 이후로 나는 애인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가족에게 소개했다. 오스씨도 그 과정을 지나왔다.

오스씨에게 처음 사귀자고 고백할 때도 이렇게 말했다.

“난 언젠가 같이 결혼할 남자를 찾고 있어요.”

오스씨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요즘은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할 인생의 대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주변에 결혼에 관심 있는 게이 친구들도 많지 않다.

나 역시 알고 있다.

결혼이 행복의 종착역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결혼은 오래 버텨온 시간을 기념하는 상장 같은 것이었다.

스무 해를 함께 살아왔다는 증명.

우리는 그 상을 받으러 괌으로 가고 있었다.


명동 커플이 부천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일행은 인천팀과 부산팀으로 나뉘었다. 비행기 일정 때문에 부산팀이 이틀 먼저 괌에 도착하게 되었고, 우리가 미리 서류 작업을 해보기로 했다.

계획과 예약은 대부분 젊은 친구들이 맡았다.

효도관광인가 싶었다. 오스씨 자식뻘인 그들과의 여행은 어쩐지 가족 여행 같았다.

비행기는 일부러 맨 앞 좌석을 웃돈을 주고 샀다. 화장실도 가깝고 다리를 쭉 뻗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식인데 이 정도 사치는 뭐.

부산에서 괌까지는 3시간 반. 공항도 한산해 입국 수속은 금방 끝났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호텔의 객실은 널찍했고 창밖으로는 달빛 아래 열대 밤바다가 보였다. 괌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그제야 났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다 오스씨에게 물었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결혼할 사람 찾는다고 했던 거 기억해?”

“응, 그랬지. 그때 속으로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어.”

그 이상한 애는 이십 년이 지나 결혼을 하러 괌까지 와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시간대라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일어났다.

11시쯤 카카오택시를 불러 ‘카피 익스프레스’로 갔다. 우리가 다른 미국령에서 결혼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서류를 공증받는 곳이었다.

점심은 근처 타코집에서 먹었다. 마침 화요일이라 5달러 할인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서 팁을 18%나 줬다.

음료는 모히또.

열대 휴양지에서는 역시 모히또 아닌가.


다음 목적지는 보건국이었다. 괌에서는 결혼식을 하기 전에 이곳에서 Marriage License, 즉 결혼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지도상으로는 11분 거리라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중간에 주차장이 길을 막고 있었다. 우리는 허리 높이 담을 슬쩍 넘어갔는데 일행이 기겁을 했다.

“미국에서 그러다 총 맞을 수도 있어!”

순간 괜히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봤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거리는 짧았지만 날씨는 30도를 훌쩍 넘었다. 걷는 것 자체가 노동이었다. 괌에서는 아무리 가까워도 걸어 다니지 말 것.

보건국 건물은 “여기가 정부기관 맞나?” 싶은 작은 건물이었다. 일처리는 예상대로 느렸다. 서류 몇 장 받는데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

그래도 절차는 단순했다. 직원이 영어로 뭔가를 물어보고 손을 들어 맹세를 시키면 우리는 무조건 “YES!”를 외쳤다. 서류도 가리키는 곳마다 사인만 하면 끝이었다. 영어 울렁증이 나설 틈도 없었다.


서류를 챙긴 뒤 이번에는 시장실로 갔다. 괌에서는 시장이나 주례자가 결혼식을 진행하고 서류에 서명해야 결혼이 성립한다. 주례가 가능한 날짜와 시간을 예약해야 했다.

시장실에 들어가자 시장님은 자리에 없었고 담당자가 우리를 맞이했다. 휠체어를 탄 남자였다.

그는 우리가 동성 결혼을 한다는 말에 한 번 놀라고, 세 커플이 함께 결혼식을 한다는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는 시종일관 유쾌했다. 진지한 결혼식을 원하는지, 로맨틱한 결혼식을 원하는지 물었다. 그가 하는 말을 전부 알아들었으면 훨씬 재미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샤넬 입고 결혼할 거냐, 턱시도 입을 거냐”라는 농담 정도는 알아들었다.

…아, 지디처럼 입어볼 걸 그랬나.

결혼식은 이틀 뒤로 잡혔다.

보건국도 그렇고 시장실도 그렇고 동성 결혼에 이렇게까지 친절할 줄은 몰랐다. 태생이 친절한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풍경 속에서 살면 무언가를 미워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택시를 불러 호텔로 돌아와 잠시 쉬다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다로 들어갔다.

오래전 파타야에서 탁한 바다를 보고 실망했던 기억이 있었다. 덥고 습했고, 바다는 흐릿했고, 모래는 어딘가 끈적했다. 그 이후로 나는 열대 리조트 여행을 멀리했다.

그런데 이곳은 달랐다.

홍보 사진에서 보던 바로 그 바다였다. 물속 돌의 모양이 전부 보일 정도로 투명했다. 햇빛이 물결에 부딪혀 부서질 때마다 바닷속 풍경이 천천히 흔들렸다.

입이 길쭉한 물고기들이 유유히 지나가고, 횟집 수족관에서 볼 법한 크기의 물고기들도 주변을 맴돌았다. 조금 더 나가자 작은 산호 무리와 색색의 열대어들이 나타났다. 조용했고, 평화로웠다.

한동안 물 위에 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낮 동안 뙤약볕 아래를 돌아다니며 몸에 달라붙어 있던 피로가 파란 물속으로 천천히 풀려나갔다.


저녁은 뷔페였는데 술이 공짜였다. 와인을 세 잔 마셨다. 평소 주량이면 바틀 하나쯤은 거뜬한데, 몸이 받쳐주지 않았다. 전날 잠도 거의 못 잤고 하루 종일 걷고 수영까지 했으니.

방에 들어와서는 그냥 눕고만 싶었지만, 그래도 일종의 신혼여행 아닌가.

밤에 할 건 해야지.

더군다나 내일부터는 에어비앤비에서 세 커플이 함께 지낸다. 하려면 오늘, 호텔에 있을 때 해야 했다.

이날을 위해 꽤 참아왔는데…

……

하지만 역시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열대 리조트에서의 뜨거운 밤은, 다음 기회를 노리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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