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즐겁게 해준 영상들

2024, 1월에 본 영화

by 선우비

괴물 : 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 포스터

일본 영화계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감독이 2023년에 선택한 영화는 남자 초등학생들의 사랑이다. 최근 동성 결혼 등 성소수자 관련해서 유의미한 법적 제도들을 만들어가고 있는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에 부흥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요리는 '여자 같다'는 놀림을 받는 전형적인 게이 소년이다. 요리의 아빠는 그런 요리의 성향을 고치겠다며 폭력을 행사하고, 학교 친구들 역시 자신들과 다른 요리를 이지메 한다. 그런 요리가 신경 쓰이기 시작하는 미나토. 자신도 이지메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걱정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요리가 좋아진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또래 이성에게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을 보면 "꺅 귀여워!"라고 외치는 이성애자들도, 동성 친구에게 관심을 보이는 아이에겐 (요리 아빠처럼) 일탈이라고 단정 짓고 고치려 하거나, "그건 호기심이지, 사랑이 아니야."라고 애써 대수롭지 않은 듯 무시한다.

영화는 아이들 세계에서도 동성애가 존재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게이 소년들을 어떻게 극단으로 몰고 가는지를 슬프게 보여준다.

대놓고 이지메를 하는 것이 가장 문제이지만, "그럴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엄마와 선생님의 '무지'도 문제라고 영화는 콕 찍어서 말한다.

아이들이 두려움 없이 동성 친구가 신경 쓰인다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회가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다.


크레센도 : 헤더 윌크

60주년을 맞이해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로 한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2022년 콩쿠르 이야기. 한국의 18세 소년 임윤찬이 우승해서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그동안 한국인들의 클래식 국제 콩쿠르를 휩쓸고 있다고 해도 그냥 경쟁에 특화된 'K- 극성'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는데, 막상 콩쿠르 다큐를 보니 재미있는 포인트가 너무나 많았다.

콩쿠르에 참여하는 아티스트들의 기쁨과 긴장이 느껴지고, 콩쿠르를 준비하는 사람들, 심사위원들, 중계하는 사람들, 아티스트들을 임보(?)하는 애호가들, 관객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행사의 떠들썩함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참가자들의 연주를 생생한 극장 사운드로 들을 수 있어서 좋았고, 유튜브에도 있지만 특별히 멋지게 연출된 임윤찬의 연주도 눈물이 날 만큼 좋았다.(리스트 초절기교 치는 모습에서, 저 어린것이 저런 중압감에도 어떻게 저런 연주를... 하는 아빠모드에 들어가 버려 눈물이 주르르... 마치 김연아 올림픽 볼 때처럼)

준준결승에는 한국인 청년들이 꽤 많이 포함되었다. 박진형, 신창용, 김홍기, 임윤찬. k-클래식이란 말을 입증해 주는 숫자였다. 이들 중 결승 6인에 포함된 사람은 임윤찬 혼자.

나머지 6인은 면면을 보면, 18세 천재 소년 임윤찬, 임신 6개월 차인 러시아 여자, 조국이 전쟁에 돌입한 우크라이나 청년, 러시아 청년,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피아노로 연습해 온 미국흑인 청년,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온 벨라루스 청년 등 어딘가 재미있는 다큐의 주연급 사연들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한복판에서 어딘지 모르게 정치적인 느낌도 든다. 결국 러시아 여성이 2위, 우크라이나 청년이 3위를 얻었다. 미국은 시상식에서 이런 정치적인 판단을 내리는데 주저함이 없는 나라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 네오 소라

영화 괴물의 OST에 참여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더욱 선명한 기억으로 만들어 준 사카모토 류이치의 생애 마지막 연주를 담은 단독 공연 실황 영화이다. 앞서 괴물과 크레센도를 보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관람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했는데, 그때 안타깝게도 매진으로 보지 못했었다.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오다니, 너무 기뻤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연주만 보여준다. 그래서 음악 다큐형식을 기대하고 온 관객은 확실히 당혹할만하다. 그런 분들이 눈에 띄었다. 내내 졸면서 코를 골아 관람을 방해받기도 했다.(견디다 못한 뒷자리 남성이 흔들어 깨웠음)

평소 즐겨 듣는 장르(뉴에이지풍의 피아노 곡들)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때때로 지루하기도 했지만, 죽어가는 아티스트의 생애 마지막 연주라는 절박함이 곡을 집중하게 해 주었다. 일본의 젠-스타일이 떠오를 만큼 절제된 화면의 구도와 흑백의 색감도 흰색과 검은색으로만 이루어진 피아노를 상징하며 더욱 음악을 부곽시켰다.

내내 잔잔한 감상모드로 일관하다 결국 해피엔드라는 곡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비록 요즘엔 젊은 나이라는 70에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또 하필 코로나로 직접적으로 관객을 만나러 갈 수는 없지만, 주변인들의 도움으로라도 이런 영상을 남길 수 있는 인생이라면 그 인생은 해피엔드라고 할만하지 않을까 싶다.


아쿠아맨 잃어버린 왕국 : 제임스 완

새해 결심 중 하나는 올해는 슈퍼히어로 영화를 보지 말자, 였다. 최근 마블을 비롯해 너무 많은 블록버스터 영화를 극장에서 봤더니 이제는 <극장=블록버스터 CG 구경하는 곳>이라는 등식이 생겨버려 작은 예산으로 만든 영화들은 극장에서 볼 생각이 안 들더라는 이야기. 하지만 새해 결심이 의례 그러하듯 작심삼일에 그쳐버렸다.

아쿠아맨 1편을 괜찮게 봤다고 생각하다가, 같은 해양 히어로를 다룬 마블의 블랙펜서2를 보고 실망을 하다 보니 아쿠아맨 2편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을 말하면, 재미있었다. 스토리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해양크러처들이 흥미로웠고, 문어는 즐거움을 잔뜩 주었다. 최근 들어 고퀄리티의 징그러운 크리처들이 많은 영화를 볼 수 없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낯익은 듯 꽤 신선했다. 제임스 완이 잘하는 일을 이번에도 잘 한 듯! 아마 감독이 교체되지 않는다면 3편도 볼 거 같다. 단, 블록버스터 영화 카테고리가 아니라 크리처물 카테고리에 넣어두고서.


사랑은 낙엽을 타고 : 아키 카우리스마키

예고편만 봤는데도 재미있을 거 같았다. 영화는 시종일관 배경이 핀란드라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영화에 사람이 적게 나옴으로써. 도시의 삶, 사람이 많이 모일 것 같은 슈퍼마켓, 극장, 대중교통, 술집... 어디 한 것 빠짐없이 사람이 적다.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일부러 사람이 없을 때만 촬영을 한 것이 아니라 핀란드가 원래 인구밀도가 낮아서겠지. 카메라를 어디에 들이대도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한국의 영화 속 도시와 비교되어, 그 자체로 이국적인 멋이 풍겨졌다.

영화 내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비난하는 방송을 깨알같이 넣어서 러시아를 경계하는 핀란드 사람들의 정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점도 재미있었다. 이 영화의 남자도 딱 취향이었다. 술주정뱅이여서 만약 현실에 존재한다면 친구로도 안 사귈 거지만. 감독의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도 비슷한 정서였던 걸 기억해 보면, 나는 이 감독이 그리는 남자의 모습(어버버버버 하고... 현실과 삐걱거리는데 또 순박한....)을 좋아하나 보다. 위험해, 위험해...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 브래들리 쿠퍼

음악의 전설 레너드 번스타인과 그의 아내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 평생에 걸친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를 따라가는 거침없는 사랑 이야기... 가 공식 작품 설명. 주연은 감독과 제작도 한 브래들리 쿠퍼이고, 페리시아역은 디카프리오의 개츠비에서 데이지 역할을 했던 캐리 멜리건이다. 극 중 번스타인의 연인 역으로, 꽤 오래 전부터 잘 생긴 게이 배우 역은 도맡고 있는 맷 보머가 잠시 나오기도 한다.들리 쿠퍼,캐리 보머

지난 주말, 대전에서 가족들을 만나고 호텔에 장시간 머물게 되었는데, 마침 네플릭스가 나오는 방이어서 남는 시간에 영화를 보았다.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음악들을 거의 매일 들으면서도 지휘자들에 대해서는 개개인의 이름 말고 거의 아는 바가 없었는데, 그토록 유명한 번스타인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알게 되어 꽤나 충격을 받았다.

게이였다니!!!!!!!


어떻게 그동안 모르고 있었을까. 공부 좀 해야겠다, 진짜.

번스타인은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견딜 수 없고, 주변인들로부터 생기를 얻는 타입으로 그려진다. 이 분도 나처럼 ENFP가 틀림없다. 그래서 자칫 정신없고 가벼워 보이는 그의 행동들을 보고도 비판을 하기보단 완벽공감의 느낌으로 관람이 가능했다. ENFP 게이의 그 경박함을 나보다 잘 알기 힘들지...암!

위대한 예술가의 그늘에 더해, 유부남 게이와 사는 부인의 고통에 감정이입 되도록 잘 설계가 된 영화지만, 번스타인에 대한 애정 또한 놓치지 않는다. 한 인간의 삶에 대해 감히 이렇다 저렇다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기 힘들다는 삶의 지혜를 다시금 각성하게 만드는 연출이었다.

유튜브에서 번스타인의 '게이스러운' 지휘를 좀 감상해 봐야겠다. 그냥 자유분방한 분이었나보다 했었는데, 게이라면 다 이해가 되는 지휘법이다. 게이가 어떻게 흥을 참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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