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영화
영화의 전당 레인보우 회원은 일 년에 3만 원의 회비를 내고 영화당 2천 원을 할인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일 년에 최소 15편을 봐야 회원 가입한 보람을 느낄 수가 있다. 회원 갱신 5개월의 앞둔 지금 내가 본 영화 개수는 얼추 본전 치기가 가능한 수준이다. 이제부터는 순이익이 발생한다 생각하니 더욱 가열차게 영화가 보고 싶어 진다. 마침 영화의 전당에서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 특별전을 한다. 기회가 좋으니 이번 한 달은 영화와 함께 보내도 되겠다 싶었다.
상영프로그램 중에는 이미 본 영화들도 있었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모텔 OTT로, '오펜하이머', '바비'는 작년 극장에서,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티빙에서 이미 봤고, 특별전을 통해서 지난달에 '추락의 해부'도 봤다.
자, 그럼 나만의 아카데미 특별전을 시작해 보자.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오랜 팬이다. 90년대부터 온갖 해적판으로 그의 영화를 찾아봤고, 한국에 정식으로 DVD가 발매됐을 때 전집을 사기도 했다. 히사이시조 음악도 좋아해서 대부분의 영화주제가를 따라 부를 수 있고 오케스트라 공연도 갔었다. 즉 흔한 지브리 오타쿠다. 물론 도쿄 지브리 박물관도 탐방!
그런데 그의 직전 작품 <바람이 분다>를 안 봤다. 난 일본만화를 좋아해서 수 천권을 모은 사람이지만, 그 만화를 그린 작가들을 좋아하진 않는다. 난 작품과 작가를 철저하게 구분해서 소비한다. 나도 글을 쓰지만 그 사람의 글은 그 사람의 극히 일부만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만화가들의 작품이 만화가의 생각을 모두 담아낸다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연재 당시의 편집자의 욕망과 독자들의 욕망이 더 많이 들어갈 것이다. 만화가들은 그런 주변의 호응에 쉽게 부화뇌동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데 미야자키 하야오 정도 되는 인물은 그렇지 않다. 그의 작품은 오로지 그의 욕망만을 반영한다. 그래도 되는 위치의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2차 세계대전의 전범기를 만든 사람에 대한 작품을 만들었다는 말만 들었어도 그의 욕망이 보였다. 젊었을 때 멋진 이야기를 많이 쏟아내던 사람이 늙고 나서 아주 후진 이야기만 하는 모습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그래서 난 나이 든 사람이 옛날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일단 색안경부터 끼고 본다.
"지난날의 잘못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평생 괴롭혀서 마침내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고, 후세들에게 나 같은 실수를 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서"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아니면...
"솔직히 난 못난 인간인데, 주변에서 너무 금칠을 칠해줘서 나의 못남을 맘껏 들어낼 수 없었다. 이제 늙어서 더 이상 주변인들 신경 쓰고 싶지 않으니 내 못난 모습을 그냥 다 까발리고 속 편하게 살고 싶어서"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난 미야자키 하야오가 <원령공주>를 정점으로 점점 창의력이 말라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정말 오랜만에 들고 온 작품이 전범기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그의 아버지와 연관되었다는)라는 사실을 듣자 그를 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 명성, 재능, 돈을 가지고 겨우 그딴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 후지다. 평생 인간의 다양한 정신적 변화를 분석해 왔던 철학자가 늙어서 신을 믿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만큼 후지다. 풋풋한 소년소녀의 아스라한 첫사랑을 밀도 있게 표현했던 영화감독이 알고 보니 아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만큼 후지다.
..... 영화를 패스한 이후 그를 완전히 잊고 있다가 아베 정부의 한국 경제 공격과 문재인 정부의 일본불매운동이 지나고 난 후, 아직까지 민족주의냐... 일말의 반성도 있던 차에, 아카데미 특별전에 다시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가 등장했다. 국내 개봉했을 때, 또 그 시대 이야기라는 말을 듣고 패스해 버렸지만, 이렇게까지 다시 상영할 만큼 영화가 좋은가? 그에 대한 나의 아픈 선입견을 떨쳐낼 수 있을까? 싶어서 결국 보기로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하고 슬펐다. 다 늙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겨우 이런 거란 말이지? 그가 이 작품을 하겠다고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어떤 표현들을 썼을까 궁금했다. 그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노친네가 미쳤나 했을까, 아니면 거장의 마지막 작품에 어울릴 만한 이야기라고 눈물을 흐렸을까. 지브리의 제작 시스템이 이제 거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했다는 소문을 들어보면 전자일 거 같고, 누구도 그의 의견에 토를 달지 못했을 테니까 이런 작품이 나왔겠다 싶었다. 안타깝다. 이렇게 또 한 시대가 초라하게 끝났구나.
... 영화에 대한 거친 감상을 이렇게 갈겨놓고 나서 그날 밤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들어 글을 쓰다 보면 새삼 느끼는 것이 있다. 아니, 작년 한 해 내내 느꼈었다.
글로 나의 생각을 표현하다 보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여러 관점을 하나로 모으게 되고, 그렇게 모아져 정렬된 관점만이 살아남아 나의 생각의 전부로 박제되어 버린다는 사실.
내가 쓴 글에는 분명 내가 들어있지만 그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이미 발행되어 나온 글이 나를 규정하면서 나의 다른 관점들을 억누른다. 어쩌면 그건 나를 가로막는 행위가 아닐까?...라는 의심. 그러다 보니 글을 쓸 수 없게 되었고, 작년 한 해 브런치를 쉬게 되었다.
이 감상평도 마찬가지다. 사실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전 영화에서 오마주한 장면들이 숱하게 등장하면서 나처럼 오랜 팬들의 심금을 자극한다. 그 점에 한없이 기쁘고, 작가에게 고마웠다. 이 영화가 미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없다니, 너무 많다. 차고 넘친다.
나이 든 작가의 옛날 회상이 꼭 나쁜 것도 아니다. 이 영화를 보고 좋아하고, 심지어 찔끔거리는 내 모습도 분명 있다.
그런데, 나 이 영화를 미워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래서 이 영화를 옹호하는 평론가들의 유튜브를 애써 찾아보지 않고, 이 영화에 대한 더욱 복잡한 분석글을 읽지 않고 있다. 자신의 관점이 불안정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이 깨질까 봐 애써 다른 의견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편협한 꼰대의 모습과 똑같다.
미야자키 하야오에 영화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사람으로 등장하는 '꽉 막힌 어른'의 모습이다.
기존의 내 관점에서는 미워해야 할 영화이기 때문에 새로운 관점을 듣기조차 거부하는 모습이 너무 싫다.
이 글은 3월 8일에 쓰고 있고, 아마 글을 발행하는 시점은 3월 말이 될 것이다. 그 사이 내가 이 영화를 옹호하는 글들을 읽을 수 있을까?
귀 기울여 다른 의견을 들을 수 있을까?
패스트 라이브즈
지난 삶들? 그런 해석인가 했는데, 영화를 보니 <전생>이라는 말이었다. 한글로 전생이라 쓰고 한자로 써줬으면 금방 알아들었을 텐데 이제는 패스트 라이브즈라고 해야 전생이라는 의미가 전달되는 시대가 된 것일까? 영화 홍보마케팅 팀의 치밀한 전략이겠거니 한다.
영화는 처음엔 좀 불편했다. 교포 발음이 어색해서 배우가 연기를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영어 연기가 나오자 연기가 자연스러웠고, 이후엔 여주인공의 어설픈 한국어 발음이 사실은 오랜만에 만나는 남자와의 만남에서 느껴지는 뻘쭘함도 같이 연기한 거라 생각하니 아귀가 맞다 싶었다. 나 같아도 그렇게 된 인연과 직접 만나게 되면 온몸이 뚝딱거릴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배우들의 눈부신 연기에 맘껏 빠져들 수 있었다.
영화는 나처럼 나이 든 한국인들에게는 익숙한 주제, 우린 전생에 oo였나 봐.. 까르르, 를 이방인의 시선으로 조금은 아련하게 풀어낸다. 전생을 논하면서 이토록 로맨틱해 본 적이 없어서 처음엔 오글거렸지만, 나중에는 옆에서 같이 보고 있는 오스씨를 떠올리며 이런저런 상상을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를 만큼의 영화적 기법들도 좋았고, 점층적으로 쌓아가다 한 번에 빵 터트리는 피날레도 눈물이 날 만큼 좋았다. 이렇게 기분 좋게 울면서 극장을 나선 게 얼마만인가.
그러면서 한번 더 느낀 점. 한국 여자들은 외국에 나가서도 너무나 잘 참고 산다. 참는 건 미덕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나라에서조차.
퍼펙트 데이즈
쉘위댄스의 배우 야큐쇼 코지의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작품. 지난달에 본 일본 영화 '오키쿠와 세계'가 에도 시대의 똥을 다뤘다면, 이번엔 에도의 현대식 화장실이다. 영화는 어쩌면 영화 속 화장실을 찾아다니는 오타쿠가 생길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세련되고 멋진 도쿄의 화장실을 보여주며 그곳을 청소하는 중년 남자의 아날로그적 삶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극도로 세련된 초현대식 화장실의 모습과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날로그적 삶을 함께 보여주며 꼭 한 가지 세계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여러 다른 세계들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일본만 한 곳이 없구나, 생각이 들었다. 내가 딱 좋아하는 일본의 모습이야! 새삼 일본 문화의 넓은 층위를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한 영화였다.
작지만 소중한 교훈, 내가 사는 세계와 그들이 사는 세계는 분명 다르지만, 충분히 공존할 수 있고, 가끔 교차점에서 서로를 마주할 때 나쁜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 상대의 세계에 관심을 조금 보여주면 좋겠다... 하는 것!
물론 메이와꾸가 될 정도로 너무 많은 관심은 안 됨.
그게 일본!
바튼 아카데미
훌륭한 학생은 훌륭한 선생님이 만든다고 흔히 알려졌지만, 그 역도 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영화. 초반 설정만 봐도 어떤 식의 이야기가 전개될지 뻔하게 보이는데, 사실 그렇게 전개되지 않는다. 다르게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결론은 제대로 도달하는 걸 보면, 아무리 식상한 설정이라도 작가의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다는... 글쓰기 가르침을 받은 느낌이다. 강력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라고 했는데, 방금 끝난 시상식 결과를 보니 안타깝게 되었다. 그래도 잊을 수 없는 선생님으로 기억될 것 같다.
난 어린 시절 유난히 선생님들을 좋아했는데, 시골에서 자라다 보니 뭔가 세련된 느낌을 주는 직업인이 선생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특별히 좋아하는 선생님이 있었는데, 나의 선생님에 대한 애정은 너무나 '에로틱한 영역'이어서 특별한 인간적인 교류를 원하지 않았고, 일부러 더 멀리하며 다가가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런 추억이 없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너무 슬프다. 좀 순수한 소년이었으면 좋았을 걸...
물론 폴 선생님처럼 학생에게 깊이 다가오려고 한 선생님도 없었다.(폴 선생님도 상황이 몰아가다보니 그랬던 거지만)
뭐랄까… 한 반에 60명가량의 학생이 있었고, 선생님들은 너무나 바빴거나, 권위를 세우거나, 촌지를 받느라 바빠서 지극히 평범한 학생 개개인에게 애정을 쏟긴 힘들었을 거다.
그냥 그런 시대였다.
이제 내가 그 선생님들의 나이가 되었다. 나의 시대는 부디 그들과 다르게 흘러가길, 노력할 힘을 낼 수 있길 스스로 바래본다.
가여운 것들
영화를 보는 내내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할리우드 미술팀이 작정하고 만들면 어떤 영화가 나오는지 이미 엠마 스톤의 '쿠루엘라'를 통해 전율을 느낀 적이 있었지만, 이건 또 다른 의미에서 할리우드 영화 미술의 금자탑이다. 그러고 보면 엠마 스톤은 '라라랜드'도 그렇고, '쿠루엘라'도 그렇고, 이번 영화도 그렇고, 정교하고 인위적인 세트 촬영에서 특히 빛을 발하는 배우 같다.
연기, 각본 다 좋았지만, 어쩔 수 없는 유교 꼰대라서 여배우가 계속 벗고 나오는 게 거슬렸다. 감독이 남자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나이 든 남자 감독이 예쁜 여배우를 벗기는 영화를 보면 속이 쓰리다. 남자 배우와 여자 배우의 나이 차가 많으면 더 그렇다. 최근에 이런 증상이 많이 심해졌다.
혹시 내가 게이여서 더 그랬을 수도 있다. 멋진 남자 배우가 계속 벗고 나왔으면 오히려 좋아했으려나? 모르겠다.
그냥 너무나 낯설고 도발적인 화면이어서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참 쉽지 않다.
동성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일단 거부반응부터 보이는 사람들을 요즘은 이해하게 된다니까...
이후에, 엠마 스톤이 제작까지 맡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여배우가 벗는다...는 것에 대한 나의 거부감이 얼마나 웃긴 건지 깨닫게 되었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내가 습득한 단순한 논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시도를 계속 경계해야 한다.
기생충, 슬픔의 삼각형, 바비, 가여운 것들.
현실을 은유적으로... 따위는 날려버리고, 아주 대차게 까버리는 영화들이 주목받는다. 할리우드 스타도, 락스타도 신비주의 따윈 안 먹힌다. 이제는 그런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총 열 편의 영화를 두고 보니, 확실히 아카데미는 아카데미구나 싶다.
지난 한 해 한국 영화도 이렇게 많이 안 봤다. 다른 영화제 영화도 마찬가지. 봉준호 감독이 로컬 영화제라고 말했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영향력만큼은 세계라는 말과 동일한 것 같다.
영화제의 아시안 패싱에 대한 영상들을 나도 봤다. 패싱, 맞을 거다. 보통 이런 시상식은 미리 예행연습을 한다고 하는데, 두 배우는 전년도 수상자를 어떻게 예우해 줘야겠다는 시뮬레이션 조차 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렇다고 그런 자리가 처음이라 당황했다는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노련한 사람들이어서 더 욕을 먹는 것 같다.
그러거나 말았거나. 주머니 송곳은 아무리 감춰도 언젠가는 삐져나온다. 그걸 아시아인들이 잔뜩 보는 자리에서 드러냈으니 진정으로 그들이 패싱을 했다면, 그 둘만 손해다. 윌 스미스 정도는 아니겠지만, 아마도 천천히... 서서히... 그 대가를 다 치르게 될 것 같다.
3월 28일 현재.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를 칭찬하는 평론가의 글을 1개 읽어봤는데, 뭔 말인지 잘 모르겠다.
나 혼자 무식한 느낌을 받았다. 계속 찾아봐야겠다는 숙제를 받은 기분이다.
별 4개를 준 이동진 평론가의 영상을 일단 저장해두긴 했는데,
과연 나는 그것을 플레이 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나만의 아카데이 시상식
남우주연.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여우주연. 추락의해부
감독상. 가여운것들
작품상. 추락의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