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 ‘라는 격언이 있다. 과연 그럴까? 배가 되고 반이 된다는 결과를 떠나서 애초에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작업이 가능할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삶 속에서 고유하게 겪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감정들은 개별성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겪는 감정을 타인과 나눈다는 것은 개별성을 허상의 감정으로 획일화시키는 어리석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고통은 어떨까? 기쁨이나 슬픔이라는 감정보다 더 극적이고 강렬한 ‘고통’이라는 감정은 나눌 수 있을까? 이 책(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은 그런 의문을 제기하면서 시작한다. 저자는 인권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마주하게 된 고통에 대한 현장을 신중하고 사려 깊게 이야기한다. 그 황량한 현장에서 겪은 성찰을 토대로 삼아 질문한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고통을 나눌 수 있을까? 우선, 무언가를 나누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말하기'다. 고통을 나누기 위해서는 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저자는 답한다. 고통은 말할 수 없다고..
왜 고통을 말할 수 없을까? 말을 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요하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말을 하고, 말을 함으로써 의미를 전달한다. 그리고 전달된 의미는 나와 타인이 공유함으로써 하나의 공통된 세계를 구축한다. 이 공통된 세계를 통해 소통하면서 고통으로 인한 실존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 고통은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고통을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고통에 빠진 사람들은 말을 하기 위해 언어를 찾는다. 그들은 소리를 지른다. 애환을 담아 울부짖는 것이다. 그러나, 소리는 언어가 아니다. 소리에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주문(방언)을 왼다. 말할 수 없음을 종교(신)에 기대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문은 고립시키는 언어다. 주문에는 보편성과 구체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모두가 알아듣고 공감할 수 있는 고통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은 고통 그 자체로 절대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의 절대성은 사람을 세계가 파괴된 외로움의 상태로 떨어뜨린다. 고통에 관해 말을 해도 그것을 말할 수 없다는 절망에 빠뜨린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과 싸울 수 있게 된다. 고통 자체는 절대적이기에 소통할 수 없지만 고통의 절대성 자체는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이 외롭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서로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된다.
그 존재가 바로, '곁'이다. 곁은 고통을 겪고 있는 그 과정을 말할 수 있는 존재다. 곁은 언어를 통해 함몰되고 무너진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 매개로 저자는 '걷기'와 '글쓰기'를 제안한다. 걷기는 우리의 시선을 내부가 아닌 외부로 향하게 하여, 글쓰기는 한나 아렌트의 '자기 복수성'을 근거로 스스로 곁을 구축하게끔 하여 고통으로 인한 자기 함몰에서 빠져나오게끔 한다.
스물여섯 시절, 남들은 한 번도 겪어보기 힘든 말 못 할 어려움을 겪으며 고통의 나날을 보낸 적이 있었다. 한 줄기의 희망이라도 찾고자 청와대로 시위를 나갔던 그 시절, 내가 고통으로 인한 자기 함몰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시위 현장에서 마주친 또 다른 고통받는 자들 때문이었다.
그곳에서는 이런저런 사연으로 모두가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고통의 내용은 다르지만 고통을 겪고 있음은 같다는 것이었다. 그 같음이 동질감을 불러일으켰고, 연대감을 주었으며, 동행을 만들어냈다. 내 곁에 '곁'이 구축된 것이다.
나는 또한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 사방이 막힌 것 같은 세계 속에서 일기장은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나의 고통을 일기장에 쏟아붓고 나면 소통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나의 고통에서 빠져나와 언어를 통해 나를 인정하고 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이 묘하게 경험담처럼 다가왔다.
타인의 경험을 경험할 수 없는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음일지도 모른다. 고통은 개인이 홀로 온전히 겪는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타자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을 나눈다는 건 어쩌면 또 다른 고통을 유발할 수도 있다. 이 아픔의 공약 불가능성, 또는 소통 불가능성에 대해 말하기 위해선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당신이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 이자크 디네센 -
고통은 끝이 나고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다. 고통이 끝나지 않았다면, 고통을 나눌 수 없음을 알고 그저 곁에 서서 동행하는 것만이 고통받고 있는 자를 위한 신중한 접근일 것이다. 나눌 수 없음을 나누는 그 우회로를 통해서 말이다.
#고통은나눌수있는가 #엄기호 #서평
#SUNWRI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