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 시대에 신은 어디 있는가
ㅣ신정론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신의 의로움과 선함을 변호하려는 시도. 신이 존재하는데 세상이 왜 이처럼 모순투성이인지, 왜 계속 죄악이 맹위를 떨치는지, 그렇다면 신은 공의로운 분이 맞는지 등의 문제를 다루는 - 또는 그로 인한 신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이론에 대응하려는 - 신학적 입장.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언젠가 친구가 물었다.
"신이 있는데 왜 착한 사람들은 고통받고 나쁜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아?"
나는 답변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착함(선)과 나쁨(악)의 기준이 신의 기준과 달라',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러한 세계조차 신의 섭리 가운데 있는 거야'라고. 그러나, 친구의 마음은 내가 해 준 답변에 어떠한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왜 어떠한 미동도 없었을까? 나의 답변이 너무 진지했던 것일까? 어려웠던 것일까? 나는 내 나름껏 이해하기 쉽게 답변을 해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서야 나는 내 답변에 문제가 있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친구가 질문한 언어의 세계와 내가 답변한 언어의 세계가 묘하게 비껴나갔다. 층위가 달랐다. 아니 결이 달랐다고 해야 하나. 나는 선한 사람이 고통받고 악한 사람이 형통하는 그 부조리함에 대해 그 어떠한 애도와 안타까움이라는 감정 없이 그저 교리를 섞어 가며 이성적으로 변증하려고만 했다. 당장 그 질문을 해결하려고만 했다. 그러나, 친구의 질문은 신정론에 대한 답을 달라는 말이 아니었다. 그 질문은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신의 위로와 보살핌은 어디 있느냐'였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일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매일의 뉴스와 담론 속에서 코로나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고, 분야를 막론하고 코로나의 원인과 대응법에 대한 서적과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연히 신학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팬데믹을 해석하는 다양한 서적들과 신학자들의 목소리가 등장했다. 나는 그중에서 최근에 떠오르고 있는 신학자, '톰 라이트'의 <하나님과 팬데믹>을 골라 읽어보았다.
모두가 힘들어하고 어려움을 겪는 지금 같은 시기에 성경적이고 지혜로운 말이 무엇일까?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답변을 줄 수 있으며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할까? 우리는 항상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을 파악하려고 하고, 해결책이라는 카드를 먼저 드내민다. 그러나, 톰 라이트는 '성급히 해결책으로 비약하지 않고 애통하고 자제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이 재난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을 이야기한다.
왜 이런 일(팬데믹)이 일어났을까? 톰 라이트는 신약학자답게 신약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렇다고 구약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성서 텍스트를 중심으로 구약 - 신약 - 바울서신 순으로 풀어나간다. 그는 팬데믹 상황에 대해 ‘왜’가 아니라 ‘무엇’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재난에 대한 음모이론들을 경계한다.
그는 구약의 논리를 그대로 인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구약의 논리는 대부분 인과응보의 논리다. 구약에서는 재난과 기근 등 어떤 부정적인 사건들의 원인을 개인의 잘못 혹은 죄에 대한 징벌로 치환한다. 하지만 이는 많은 모순과 오류를 낳는다. 구약의 논리로 현재를 해석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톰 라이트는 관점을 전환시킨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출발점으로 삼으며 현재를 해석한다. 예수의 시각과 예수의 방식, 예수의 관점을 통해서 뒤를 보지 않고 - 원인을 찾지 않고 어떻게 조치를 할지 - 앞을 내다본다. 표적의 메커니즘이 '예수'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바로 이 '예수 중심주의'를 통해서 섭리를 결정론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속죄를 인과응보로 이해하려는 논리를 깨뜨린다.
(p49-50) 세상 사건들을 해석하여 재림 시기를 알 수 있다는 주장은 스스로 예수님보다 더 잘 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복음 이야기를 살피지 않는 것은 신학적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을 향한 구원 계획을 드러내시려고 아들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거기에 비길 만한 더 이상의 표적이나 경고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세상 운영의 많은 부분을 위임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많은 부분에 대하여 인간의 책임을 물으신다. 재난 상황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재난을 주관하시지만 우리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슬퍼하셨다고 말했다. 톰 라이트는 이 복음서의 내용을 통해 우리가 책임져야 할 일들을 일러준다. 그는 우리가 재난에 대해 탄식하고, 슬퍼하며, 애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슬픔도 사랑의 일부다. 슬퍼하지 않는 것은 사랑의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슬픔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만큼 강해야 한다. 코로나로 인해 세상이 슬픔에 빠져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만큼, 그리스도인도 세상을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슬퍼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현재의 상황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며, 현재의 과정을 생략한 채 내세의 소망만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과연 세상에 위로를 줄 수 있을까? 성경은 아니라고 답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해야 할 일이 있다. 로마서 8장 28절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써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성을 보여준다.
(p90) 하나님이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통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일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해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앞서 말했던 세상의 슬픔에 대한 탄식과 애도를 가지고 세상 속에서 의료, 교육, 구제, 캠페인, 위로 사역 등을 해 나가야 한다. 이것은 눈물, 두려움으로 닫힌 그리스도의 무덤을 보며 소망과 희망에 대해 의심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경험하며 세상으로 나아갔던 제자들의 이야기와 동일하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은 닫힌 무덤 안에서 눈물로 자신과 세상의 의심에 맞서 행동과 상징으로 하나님 나라의 표적을 드러내는 자가 되라는 부르심인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전염병이 덮쳤을 때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행동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지키고 돕는 것'이라고 확실히 믿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교회와 세상에 대한 공적 책임을 가지고, 균형 잡힌 인간적인 접근법으로 재난 상황의 사회를 운영하는 다른 방법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창의적인 사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표적이 실제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저 멀리 내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곳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코로나 시대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신의 위로와 보살핌은 어디 있는가?
(p120) 치유와 소망을 주시려고 고통받고 죽어 가시면서 최전선에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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