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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Nov 04. 2020

[서평] 유원 / 백온유

-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용기


   삶이 메말라 가는 것 같아 소설을 찾게 되었다. 소설의 촉촉한 감성이 메마른 나의 삶을 적셔줄 것만 같아서.


   무뎌진 감성의 충전과 동시에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찾다가 [유원]이라는 소설이 눈에 띄었다. 표지가 주는 시원함과 제목의 간결함, 그리고 창비 청소년 문학상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신빙성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선택하게 이끌었다.


   첫 장을 읽을 때부터 전체적인 분위기가 안개에 휩싸인 듯했다. '미안해하며 아침에 눈을 떴다'는 소설의 첫 문장은 무언가 서글픈 느낌을 전달했다. 슬픔이 묻어나 있는 흐릿한 분위기 속에서 담담하게 써 내려간 것 같은 단조로운 톤의 전개 역시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불편한 진실. 내면의 상처. 잊고 싶은 기억. 남겨진 트라우마 같은.


   고등학생 2학년인 주인공 유원은 12년 전 화재 사고로 언니를 잃는다. 당시 언니는 유원을 살리기 위해 이불로 유원을 감싸 11층 높이의 창문 밖으로 내던진다. 그리고 한 아저씨가 11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유원을 받아냈고, 유원은 극적으로 살아남게 된다. 소설 [유원]은 이 사건으로부터 파생된 여러 관계들의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정체성, 트라우마, 화해라는 키워드를 통해 '성장'으로 나아가는 유원의 모습을 담고 있다.



ㅣ정체성 : 나로 이루어진 어떤 것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진 존재인가?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과거의 사건? 경험? 타인?.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질문에 간단명료하게 답하기란 쉽지 않다. '나'라는 존재는 무수한 과거의 조각들로 구성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정체성을 찾는 과정은 중요하다. 흩어진 과거의 조각들 속에서 진짜 나를 찾아야 내가 나로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정체성의 상실로 이어진다.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나를 통해서 다른 누군가를 떠올린다는 것, 내가 다른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정체성의 혼란을 넘어 존재의 상실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p148) 언니가 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품이다. 이미 끝난 언니의 삶을 연장시키며 보조하는 존재


   유원은 언제나 매개체였다. 친언니를 대신할 매개체. 사람들의 눈에 유원은 없었다. 사람들은 유원을 통해서 언니를 보았다. 유원의 존재 너머에 있는 언니의 그림자를 보았다. 사람들이 유원을 대할 때는 언제나 언니의 배경이 밑그림처럼 깔려 있었다. 그렇게 유원의 정체성은 언니의 그림자에 의해 지워졌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것만큼 비참한 일이 또 있을까? 나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유원에게 과거의 사고는 떠나보낼 수 없는 망령과도 같았을 것이다. 마치 이마에 번개 모양의 상처로 어디를 가나 유명인사로 통하는 해리포터처럼 말이다.


   따라서, 유원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외피를 벗는 것이었다. 타인으로부터 규정된 정체성이라는 껍질을 깨고 나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아 부화하는 것. 그렇게 삶을 살고 성장하는 것.



ㅣ트라우마 : 죄책감의 굴레 속에서


   유원이 유원으로 살 수 없는 것에는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기인했다. 자신을 살리고자 희생한 두 명(언니와 아저씨)의 의인들에 대한 죄책감. 그들에게 빚을 졌다는 마음은 유원이 자신의 삶을 유원답게, 편하게 살지 못하는 계기가 되었다.


(p126) 나는 더 나태하게 살아도 됐을 것이다. 사고가 없었다면

(p127) 나태하게 살면서도 죄책감을 덜 느꼈을 것이다. 실수를 두세 번 반복해도 초조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자꾸만 무언가에 쫓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나도 완벽했던 언니에 비해 부족한 나 자신의 모습 그리고 한 아저씨의 인생을 불구로 만들어 버린 나 자신의 존재는 유원에게 트라우마였다. 트라우마의 존재는 꿈을 통해도 나타나고, 내면의 상처를 방어하기 위해 까칠하게 말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자신을 살리고 구해준 사람을 증오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아가던 유원에게 수현이라는 친구가 찾아온다. 유원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수현에게 호감을 갖지만, 수현의 반전 고백은 자신이 마땅한 죄책감을 누려야 하는 존재임을 더욱더 증폭시킨다. 때마침 터지는 불꽃축제와 함께.



ㅣ화해 :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


   언니도, 아저씨도, 수현도 이해할 수 없었던 유원에게 정현의 존재는 화해로에의 문을 여는 역할을 한다. 유원은 정현의 경험 섞인 한 마디를 통해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p270)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 말이야. 행동의 의미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서 오히려 백 가지로도 천 가지로도 해석될 수 있는 그런 인물


   유원이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삶 속에는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삶의 맥락들이 존재했다. 특히, 수현의 삶이 그랬다.


(p152) 수현과 함께 있으면 모르고 싶었던 것들도 자꾸 알게 되고, 묻혀 있는 것들도 어느새 발견하게 되었다.

(p230) 자신의 아빠를 참아 왔듯이 수현이 '나'라는 존재 또한 참아 왔음을 알게 되었다


   유원은 수현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을 돌아보게 되고 모두와 화해를 해 나간다. 언니와의 화해, 아저씨와의 화해, 수현과의 화해 그리고 나 자신과의 화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유원은 패러글라이딩을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드리워져 있던 언니의 그림자를 지워낸다. 트라우마를 벗겨낸다. 높은 곳에 올라가 용기를 내야만 탈 수 있는 패러글라이딩을 통해서.


사진 출처 - woojihyun_  instagram


   책의 속표지에는 겉표지와는 다르게 세 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겉표지에 그려지지 않은 인물은 아마 유원의 언니일 것이다. 정현 대신 언니가 그려져 있는 것이 조금 아쉽긴 하다. 이해할 수 없음을 연극 인물을 통해 이해하고자 했던 정현의 용기가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한 사람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열쇠들이 필요할까? 얼마나 많은 용기들이 필요할까? 닫혀 있던 옥상의 문이 수현에 의해 열린 것처럼, 닫혀 있던 유원의 마음의 문을 열게끔 도와준 수현이야말로 진정한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서평] 유원 / 백온유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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