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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Jan 21. 2021

[서평]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스물한 살, 논산 훈련소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자대로 향했던 2박 3일의 여정. 그때의 여정은 내 일기장과 더불어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논산에서 퇴계원으로 질주하던 호송 열차는 나를 암흑과 미지의 세계로 데려다주는 것만 같았고, 306 의정부 보충대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나의 불안과 두려움을 증폭시켜주는 매개체와 같았다.


   그 여정 속에서 나는 어디로 갈지 또 무엇을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고 움직일 뿐이었다. 그 당시에 느꼈던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이 아직까지도 내 기억의 밑바닥 속에 미세하게나마 남아있는데, 그땐 이 감정들을 어떻게 이겨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시간이 해결해주었다고 생각한다. 2박 3일이라는 시간은 가까이서 보면 길지만 멀리서 보면 짧으니까.


   그런데 만약, 그 시간이 2박 3일이 아니라 2년 또는 3년이었다면? 아니,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야 했었더라면? 아마 나는 정신이 분열되지 않았을까?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찾을 수 있었을까? 불안과 두려움에 볼모로 잡힌 채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비극 속에서 낙관을 찾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것보다 수십 배, 수백 배 아니 - 고통의 양을 측정한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 수치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비극 속에서 무려 3년이라는 세월을 지낸 사람이 있다. 바로 이 책의 저자 '빅터 프랭클'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붙잡혀 간 유대인 출신의 신경정신과 의사이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함의 공간 속에서 3년의 세월을 견뎌냈다. 매일매일 생사를 가르는 죽음의 공포가 담긴 그런 비극 속에서 그는 어떻게 견디고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빅터 프랭클 박사는 강제 수용소에서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삶의 의미'였다라고 말한다. 꿈을 꾸지 않는 이 끔찍한 일일 정도로 수용소에서의 삶은 절망적이고 가혹한 현실의 연속이었다. 강제노동과 굶주림은 기본값이었으며, 언제 어디서 목욕탕(가스실)으로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는 매일매일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가며 버텼다고 말한다. 살아야 할 이유, 즉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견뎌낼 수 있다고 말이다.


(p70)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프랭클 박사에게 아내는 삶의 의미였다. 그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통해 비극 속에서 낙관을 찾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가야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 그리움, 기대, 낭만 등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경험을 통해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p77)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프랭클 박사는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창조적인 일을 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유머가 그렇다. 유머는 우리의 관심을 비극에서 희극으로 돌릴 수 있는 창조적인 장치다. 유머의 창조적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비극 속에서 낙관을 찾는 능력과 태도를 기를 수 있다.


(p120) 인간은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프랭클 박사는 환경결정론에 반대한다. 그는 인간의 정신적 자유만큼은 어떤 것에도 좌우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때문에 고통과 시련 역시 우리의 선택을 통해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p174)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수용소에서 탈출 후, 자신이 겪은 경험들과 생각들을 바탕으로 로고테라피라는 학문을 창안한다. 수용소에서 함께 지냈던 사람들을 관찰했던 것이 로고테라피 이론 증명의 경험적 토대가 되었는데, 그런 사실을 보면 수용소에서의 삶이 결코 무가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론 자체가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로고테라피는 실존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창안된 학문으로써 인간의 삶이 공허하고 우울한 것은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된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로고테라피는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과제를 삼는다. 한 마디로 살아야 할 의미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시기에 따라, 시간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명확히 대답해줄 수는 없다. 중요한 건 포괄적인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한 개인의 삶이 갖는 고유한 의미다. 따라서, 시련은 오직 자신의 과제다. 자신에게 닥친 시련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것을 나의 몫으로 인식하고, 책임을 지는 독자적인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로고테라피 치료의 본질이다.


(p181)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보고 있다.  




   조던 피터슨은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의 연속이며, 세상은 시련으로 가득 차 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삶은 고통이다. 삶을 산다는 것은 고통을 껴안고 지낸다는 소리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고통과 시련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그것들을 이겨낼 수 있는 기회 역시 상존하고 있기 때문에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가장 극한의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비로소 내게 중요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강제수용소에서는 돈도, 외모도, 좋은 직장도, 넓은 인맥도 모두 무용지물이다. 그곳에서는 오직 내가 살아가는 이유, 삶의 의미만이 유효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고통과 시련의 세계라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유물론적인 가치가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내게 닥친 과제들을 해결하며, 그것들 속에 담긴 의미를 발견해나가는 것이 아닐까.


   고통과 시련을 피하려고만 하고, 편하고 즉흥적인 만족만을 추구하려는 시대적 사조 속에서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의 의미를 발견해나가자는 프랭클 박사의 메시지가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메시지가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고통과 시련을 통해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발견해나가고, 삶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태도. 이러한 태도가 사회적 공감대를 얻고 하나의 시대상이 된다면 우리 사회가 조금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p187) 시련은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 자신의 시련에 수치심보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그것을 품위 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문화와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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