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와 친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용병’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프로 세계에서나 아마추어 세계에서나 ‘용병’은 스포츠인들의 입에서 꽤나 자주 오르내리는 표현이다. 프로세계에서는 외국인 선수를 부를 때 곧잘 사용하며, 아마추어 세계에서는 타 팀에서 빌려온 선수를 일컬어 사용한다. 물론 스포츠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 예를 들면, 연예계에서나 정치계에서도 - ‘용병’이라는 단어는 여기저기 고개를 내밀곤 한다. 그만큼 ‘용병’은 우리 사회 가운데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고, 상용화되어 있는 단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용병'의 사전적 정의는 '돈을 주고 고용한 외부 인력'을 의미한다. 언뜻 보기에 이 단어는 꽤나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특히,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반적인 고용관계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 자본주의적 관점이 어찌 되었든 - 우리 사회가 더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 '용병'이라는 단어를 버려야 할 때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이 단어에는 나와 다른 타인을 차별하고 배제시키는 ‘타자에 대한 배타성’이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용병'이라는 단어에는 타인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외부인과 내부인의 경계를 짓는 '타자에 대한 배타성'이 내포되어 있다. '용병'을 같은 팀원이나 동료로 생각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어떤 프로젝트의 목적 달성이나 매치의 승리를 위해 잠시 고용된 일회성 소모품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일례로, K리그에서 뛰는 외국인 선수를 '용병'으로 규정해버리면, 그는 단어 속에 내포된 의미에 걸맞게 소속팀과 소속 리그로부터 타자화되고 만다. 언어라는 것이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반영하고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비인격적 요소와 차별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언어(용병)를 사용하는 것은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현실화시키고 강화시키는데 동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용병'이라는 단어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그늘 아래 있다는 것도 눈 여겨볼 만하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외국인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고 차별과 배제를 감행한다. 이것은 외국인 선수가 위화감을 느끼게 되는 요인이 되며, 팀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즉, ‘용병’ 안에 내포되어 있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유발하여 타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배타성'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유난히 심한 곳에서 발견된다. 안타깝지만 대한민국이 그렇다. 예부터 민족과 국가라는 집단적 정체성이 뚜렷한 사회적 환경은 자국민과 외국인에 대한 선을 분명하게 긋고 외부인에 대한 이질감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것이 '용병'이라는 단어를 경유하여 우리 사회에, 특히 국내 선수와 외국인 선수의 구별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스포츠계에 문제의식 없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나와 타자의 경계에 선을 긋고, 타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접하지 않는 ‘타자에 대한 배타성’은 우리의 언어 세계와 사회적 환경 속에 여전히 숨어 있다. 우리가 인식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게 말이다. 이것들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만, 더 나아가 문제 의식을 가지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타자에 대한 감수성 회복과 차별과 배제 없는 시민 사회로의 성숙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를 우리의 언어 세계에서 퇴출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타자에 대한 포용성을 기르는 문화와 인식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자국민과 외국인을 가르고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강화시키는 단어들을 색출하여 버리고, 타인을 동료로 인식하는 언어와 문화를 함께 만들어가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