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 에세이
요즘 푹 빠진 CCM이 있다. 에어팟을 끼고 집을 나서면 가장 먼저 플레이리스트에 오르는 곡이다. 가끔 조깅을 할 때에도 선곡을 하여, 달리는 내내 거룩한 분위기에 휩싸이도록 만드는 곡이다. 이 곡은 지난달 16일에 발매되어 유튜브 인기 급상승 음악 15위에 오르며 무려 24만 8천여 회에 달하는 조회 수를 기록했다. 또한, CCM이 진입하기에는 어느 정도 장벽이 존재하는 대중음악 음원 사이트 멜론의 최신 24 Hits 일반 차트에도 진입하여 CCM의 역사를 새롭게 쓰기도 했다. 요즘 CCM계의 대세로 상징되는 팀의 곡. 바로, WELOVE의 '입례'다.
WELOVE(위러브)의 '입례'는 반복되는 멜로디 라인에 짧고 단순한 가사가 특징인 곡이다. 언뜻 보면 한때 유행했던 후크송 같은 진행방식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세션의 빌드업과 후반부 KEY UP을 통해 후크송의 단조로움을 상쇄하고 잔잔함 속에 웅장함을 더해준다. 이처럼 어렵지 않은 곡의 진행방식과 '입례'라는 제목은 전국의 많은 찬양팀들이 예배의 포문을 열도록 콘티의 첫 줄을 장식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흔히 예배를 여는 대표적인 곡으로 2000년대에는 '예배합니다', 2010년대에는 '나는 예배자입니다'가 있었다면, 2020년대는 '입례'가 그 자리를 꿰차지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이 CCM에 꽂힌 점은 다른 지점에 있다. WELOVE(위러브)의 '입례'는 음악적으로 화려하지도 않고, '시간을 뚫고'처럼 신학적 내용을 감성 있게 잘 풀어낸 가사도 없다. 그런데 내가 계속 묵상하고 환기하게 되는 가사가 한 구절 있다. 곡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 가사에 꽂혀서 도무지 헤어 나올 수가 없다. 이 가사를 묵상할 때마다 진리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사유할 때마다 철학적 개념이 오버랩되며, 향유할 때마다 삶을 깊이 있게 성찰하게 된다.
어쩌면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연하고도 진부하게 들릴 수 있는 가사. 그 가사는 이렇다.
마르지 않는 샘물로
우릴 채우시리라
독일의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은 ‘지향성’이라는 개념을 창안하며 '인간의 의식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지향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지향성. 지향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지향은 '어떤 목표로 뜻이 쏠리어 향함 또는 그 방향이나 그쪽으로 쏠리는 의지'를 뜻한다. 즉 무언가를 향하는 것,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 무언가를 찾고, 바라고, 추구하는 것. 그것이 지향성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식은 무엇을 지향하는 것일까? 그 대상은 다양하다. 아니 무궁무진하다. 경제적 자유, 사회적 지위, 안정되고 보장된 미래, 행복하고 편안한 삶, 성적인 매력과 쾌락, 정신과 육체의 건강, 원만한 인간관계 등등 인간이 지향하는 대상은 셀 수 없이 많다. 게다가 지향의 대상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고 다양하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생애주기에 따라 쉴 새 없이 변동한다. 가히, '지향성은 무한하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의식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인간의 의식 세계가 공허하기 때문이다. 텅 비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고, 바라고, 추구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욕망하며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빈 공간은 완벽하게 채워지지 않는다. 그 공허함은 충분하게 채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이 추구하는 것들은 유한한데 비해 인간의 지향성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무한성은 유한성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무한성을 채우기 위해선 똑같이 무한의 속성을 지닌 대상이 필요하다. 그러나 앞서 열거했던 인간이 지향하는 대상들은 모두 유한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언젠가 모두 가치가 하락하고 소멸될 것들이다.
예를 들어,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의 가치는 먼 미래에 현재의 가치로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명예도, 지위도, 권위도 마찬가지다. 성적 매력과 건강 역시 같은 레벨을 무한히 유지할 수 없으며, 우리 곁에 있는 좋은 사람들도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없다. 행복 역시 영원히 지속되는 무한한 행복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유한한 대상들이 자신의 무한한 지향성을 해결해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무한한 지향성은 유한한 대상들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때문에 인간은 지향의 대상을 바꿔야 한다. 유한한 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것을 지향해야 한다. 시간을 뚫고도 변하지 않는, 그 가치가 하락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불변히 존재하는, 인간의 무한한 지향성을 덮고도 남을 '마르지 않는 샘물'을 지향해야 한다.
성경은 그 '마르지 않는 샘물'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무한한 지향성을 모두 채우고 품어줄 수 있는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나오는 우물가의 여인은 늘 목이 말랐다. 무한한 지향의 갈증을 유한한 것들을 통해 해소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 여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마르지 않는 샘물'을 건넸다. 그것은 황량하고 공허한 사막 한가운데서도 영원토록 솟아나는 무한한 샘물이었다. 그 물을 마신 여인은 더 이상 유한한 것들을 지향하지 않았다.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무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후설이 지향성 개념을 창안한 것은 인간 의식의 근원에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아마 후설도 공허한 의식 세계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지향했을 것이다. 자신의 무한한 지향성을 채워줄 '마르지 않는 샘물'을 갈망하면서 말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요한복음 4장 13 - 1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