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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Oct 23. 2021

[서평]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1부

- 신학과 인문학은 무관할까?


   인문학? 그거 공부하면 하나님이랑 멀어지는 거 아니야?

   생각보다 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문학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다. 특히, 몇몇 그리스도인들은 철학을 공부하면 이상한 사상에 빠져 신앙을 잃게 된다거나 심지어는 적그리스도 같은 이단이 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통념을 깨고 어떻게 하면 기독교 신학과 인문학을 통해 지성 사회의 복음화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인지 늘 고민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중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학이란 인문학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인문학과 만나 빚어낸 거대하고 아름다운 정신적 구조물이기 때문이다.(7)


   물론 기독교 신학과 인문학은 사유 체계나 방법론적인 면에선 다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앞서 말했듯이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시대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는 있었지만, 인문학은 기독교 신학에 부단히 새로운 피를 공급해 왔다. 시대를 불문하고 인문학은 신학에 크든 작든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부단히 영향을 끼쳐 왔다.(15) 때문에 인문학이 기독교 신학에 대립되거나 적대적이라는 생각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허울뿐인 주장인 셈이다.



   이러한 연유로 김용규 저자의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를 읽게 되었다. 특히, 책 제목에 대한 답변을 내 머릿속에 채워 넣고 싶어서 다른 책들보다 더 곱씹으며 읽고 꼼꼼하게 정리해보았다. 비록 110페이지밖에 안 되는 얇은 책이지만, 내용은 총 균 쇠에 버금갈 정도로 방대하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시대적 사조와 흐름을 모두 아우르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늘날 분열과 투쟁이 넘쳐나는 이 파국의 시대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신학과 인문학의 대화에 있다고 말한다. 나 역시도 동의한다. 신학과 인문학에는 수천 년 동안 통합과 분열, 융합과 해체를 이루어낸 논리, 지식, 지혜, 경험이 쌓여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실마리가 담겨있다.


   이 책(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은 그 실마리를 풀기 위한 단초를 제공해준다. 탈근대의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신학과 인문학의 대화의 여정 속에서 그 대답을 찾아보도록 하자.



■ 고대: 정통신학과 플라톤주의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가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기독교는 당시 타종교와의 구분을 위해 독자적인 교리를 구상하고 사상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리스인은 이성을 통해 세계와 삶을 파악한 반면에 기독교인은 신앙을 통해 세계와 삶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인은 (그리스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계시로 주어진 말씀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이론 체계가 필요했는데, 그때 공헌을 한 것이 바로 그리스 철학의 ‘플라톤주의(오늘날에는 신플라톤주의)’였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설명할 것인가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플라톤주의 철학은 이 질문에 답변할 정교하고 체계적인 이론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일자(만물의 근원이자 진리의 근거), 정신(일자로부터 유출되어 창조를 위한 모든 참된 형상들을 자기 안에 만듦), 영혼(정신에서 유출되어 순차적으로 현실화하는 방식으로 창조)이라는 철학적 사변이었다. 일자, 정신, 영혼은 모두 하나이지만 하는 일은 제각각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론을 설명하는데 너무나도 안성맞춤인 사변이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는『고백록』에서 그리스 철학이 ‘표현은 다르지만 내용적으로는 기독교 진리와 완전히 같은 부분이 수없이 다양한 논거에 의해 납득되도록 서술되어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기독교 신학은 신앙으로 대표되는 히브리 계시(헤브라이즘)와 이성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철학(헬레니즘)이 상호작용을 하여 이루어진 거대한 정신적 구조물인 것이다. 때문에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나온 것은 없지만, 그리스 철학의 영향 아래서 정리되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21)


   물론 두 이질적인 요소가 기독교 신학이라는 하나의 체계 안에 있다 보니, 대립과 갈등이 없을 수는 없었다. 오늘날 ‘아리우스 논쟁’이라고 불리는 성육신 문제가 대표적이다. 아리우스는 예수의 성육신을 부정하며 논쟁을 벌였다. 이를 반박하기 위해 기독교는 우여곡절 끝에 니케아 공의회를 열었고, 논쟁 끝에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판명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이 교회 안에 공식적이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계기가 됨과 동시에 기독교 신학이 자신이 받아들인 그리스 철학의 부작용을 극복한 첫 번째 사례다.


   이처럼 기독교 신학은 시대의 인문학(플라톤주의 철학)을 배척하기보다 끌어안았고, 거기서 생기는 부작용을 부단히 극복하며 성장해왔다. 그 결과, 신약 성서의 정경화, 신앙고백의 확정, 교회 제도의 확립 등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정통신학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23)


             

■ 중세: 중세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고대에 플라톤주의가 한 일을 중세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오랫동안 플라톤주의가 기독교 신학 안에 뿌리내린 탓에 초기에는 변방을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아랍 철학자들의 저서를 통해 서구 세계 중심에 전해지자 진보적 성격의 신학자와 수도사들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활용하여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신)플라톤 사상에 근거하여 성서를 바라보았던 교부신학자들은 새롭게 들어온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경계했고, 이때부터 교부신학(플라톤)과 스콜라신학(아리스토텔레스)의 첨예한 대립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스콜라신학은 13세기 중엽부터 주목을 받으며 뒤늦게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 포문을 연 것이 중세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숭배받는 ‘토마스 아퀴나스’다. 그는 스콜라신학을 집대성했으며,『신학대전』이라는 위대한 저서를 통해 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꽃피웠다.


   정통신학(플라톤주의)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첨가됨으로써 철학의 비중은 더 커졌고, 이성의 역할 역시 더 강조되었다. 그 산물이 ‘자연의 사다리’와 ‘존재 유비’라는 개념의 탄생이다.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또 하나의 구원론으로 여기는 이 개념은 피조물인 자연에도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 있으므로 인간은 이성을 통해 그것을 파악함으로써 마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듯 점차 하나님께 다가가 마침내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28)


   이러한 개념은 구원이 신앙을 통해서뿐 아니라 이성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기조를 형성했고, 훗날 ‘에밀 브루너’ 같은 근대 신학자들이 이를 계승하여 자연신학을 제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자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에 강렬히 반대하며 『바르멘 선언』을 발표했고, 대부분의 성직자와 신학자들이 바르트의 편을 듦에 따라 논쟁은 바르트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도 기독교 신학이 자기 안에 들어온 그리스 철학(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부작용에 저항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간 사례로 볼 수 있다.(30) 물론 당시 기독교 신학의 위상은 철학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례는 기독교 신학이 인문학을 바탕에 두고 서 있었음을 보여준다. 중세 수도원학교의 교육과정인 일곱 가지 자유학예에서 문법, 수사학, 변증법 같은 인문학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도 이 같은 해석을 뒷받침한다.(32)


                              

■ 근세: 종교개혁 신학과 인문주의


   근세는 신앙에 대한 이성의 반란과 전복이 시작된 시기다.(32)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 등이 근세에 발생했다. 근세에는 휴머니즘, 후마니타스 같은 ‘인간을 존중하는 윤리적 태도’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중세의 신 중심적 사상과 문화에서 탈피하는 것을 목적으로 고대 정신을 재발견하여 인간 중심적 문화와 사상을 건립하고자 하는 지적 운동 ‘인문주의’의 탄생이 대표적인 예이다.(33)


   근세에는 ‘근원으로 돌아가라(ad fontes)’라는 구호 아래 중세의 그늘에 갇혀 빛을 보지 못했던 고대의 헬라, 히브리 문헌들이 다시 연구되기 시작했다.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융합, 즉 그리스·로마 문화와 기독교 문화를 하나로 융합하자는 것이다. 중세 가톨릭 교회가 헤브라이즘에 집착한 나머지 균형을 무너트렸기 때문에, 근세의 학자와 예술가들이 인문주의 운동을 통해 헬레니즘을 부활시켜 균형을 맞추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Renaissance: 부활)’라는 용어가 지닌 뜻이다.(37)


   이 여파로 인문주의와 기독교 신학이 결합한 기독교 인문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이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고수한 반면,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스토아 철학에 관심을 보였다.(37) 왜냐하면 신플라톤주의를 기조로 삼은 가톨릭 교회가 타락해버렸기 때문이고, 스토아 철학이 기독교를 포기하지 않고도 받아들일 수 있는 종교적·윤리적 이상들을 상당히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토아 철학은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칼빈은 철학, 문헌학, 논리학, 수사학 같은 인문주의 저술 방식을 따르며, 저서『세네카의 관용론 해석』을 통해 자신이 스토아 철학의 대가인 ‘세네카’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었다. 이와 연관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바울과 세네카가 서로 상호작용했던 사이라는 것이다. 물론 명석판정한 증거는 없지만 두 사람이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들이 여러 저술에 남아 있다. 칼빈이 바울의 위대한 계승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바울과 세네카와 칼빈 모두가 스토아 철학에 영향을 받은 인문주의자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들과 기독교 인문주의자들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 해도 둘은 함께 갈 수 없었다. 죄, 구원, 은총 같은 신학의 핵심 주제에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다.(42) 특히 인간의 본성과 구원론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인문주의자는 인간의 본성을 낙관적으로 보고 도덕적 행위가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공로주의 견해에 강력히 반대했고, 둘은 결국 갈라서게 되었다.


   이처럼 기독교 신학은 근세에도 스토아 철학이라는 인문학을 수용하는 동시에 거기서 생겨나는 부작용을 극복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갔다. 비록 500년쯤 전의 사건이지만, 인문주의라는 문예사조 안에서 철학, 문학, 문헌학, 수사학 같은 인문학이 여전히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44)



- 2부에서 계속



[서평]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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