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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Oct 24. 2021

[서평]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2부

- 신학과 인문학은 무관할까?



■ 근대: 자유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근대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출현,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등장, 사회적으로는 산업혁명이 등장했고, 개인의 자유와 자율적 인격을 중시하는 자유주의가 유행했다. 이러한 유행은 신학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슐라이어마허를 선두로 리츨, 헤르만, 하르낙 등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 시기에 대거 등장하였다. 이들은 그리스·로마 문화와 기독교 문화를 하나로 융합하고자 했던 근세의 기독교 인문주의자들과는 달리 자율적 인격에서 나오는 다양한 실천 영역을 중요시하는 자유주의 문화와 기독교 문화를 융합하고자 노력했다.(45)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 20세기 전반, 20세기 후반 등 총 3단계로 구분된다, 때문에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고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차이가 크다. 하지만 그 주된 내용을 들여다보면, 우선 계시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주관적·역사적 의미로 해석한다, 또 성서에 기록된 기적을 인정하지 않고 합리적 과학 지식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부성애와 인간의 형제애를 강조하고, 전쟁의 포기와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등 그 특성이 다양하다.(46)


   이 책에서는 구(舊)자유주의라고 일컫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은 ‘사회복음운동’이다. 개인의 구원에 집중했던 서구에서와는 달리 북미 대륙에서는 사회악과 부조리를 청산함으로써 불의한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할 수 있도록 사회제도 개선과 정치 개혁을 위한 기독교 내의 사회의식을 불러일으켰다.(47)


   그러나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는 법. 이 운동을 조직화한 사회복음운동가들이 앵글로색슨 테제를 내세워 제3세계 정복을 정당화하던 제국주의자들에게 동조했는데, 그 근거로 당시 유행하던 다윈의 진화론과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차용했다. 제3세계 선교라는 미명 아래 어떤 신학적 성찰도 없이 앵글로색슨족의 종교적 우월성과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다. 이러한 팽창주의적 선교관 및 제국주의의 흔적은 많은 부작용을 일으켰고, 우리나라에 전파된 기독교 문화 곳곳에도 공격적 포교 및 선교 방식 등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49)

 

   자유주의 신학은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스스로의 한계와 모순을 드러냈다. 자유주의 신학의 결정적 문제점은 인간 이성에 의존한다는 점인데, 이것은 기독교 신학을 인본주의적·개인주의적으로 탈바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이에 대한 반발로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및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과 가난하고 소외받은 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민중신학 등 급진 신학이 등장하게 되었다.(50)

 

   근대에는 자유주의라는 인문학이 기독교 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큰 변화의 흐름이 생기는데 기독교 신학이 ‘신중심주의’에서 ‘인간중심주의’로 차츰 흘러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극단적 형태는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신학에서 여지없이 나타난다.(51)



■ 현대: 포스트모던 신학과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던 신학은 20세기 중반부터 등장하게 된 신학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신학이다.(51)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학자마다 정의하는 바가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상대성, 다양성, 개별성, 타자성 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던 신학의 시초는 해방신학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지향하는 바가 같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출현하게 된 배경은 근대성(모더니즘)에 대한 반발 때문이다. 근대에는 객관성, 보편성, 획일성을 본질로 하는 근대적 이성을 통해 다름을 그름으로 규정하였고, 근대적 이성에 근거하여 옳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는 것들은 모두 계몽의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는 폭력 그 자체였다. 이들은 다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근대적 이성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근대성 안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에 대해 고발했다.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은 탈근대성을 주장한다. 이것은 포스트모던이 자연과학과 실증주의 철학 같은 근대적 이성의 공격을 받았던 기독교에게 탈출구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칼빈 대학 철학과 교수인 제임스 스미스는 포스트모던 담론이 기독교의 핵심 주장과 잘 어울릴 뿐 아니라, 기독교 신학과 교회의 든든한 우군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52)


   그러나 포스트모던 신학이 기독교에 기여할 부분 있다는 말은 수긍되는 말이지만, 의심 가는 주장이기도 하다.(55) 왜냐하면 ‘해체적 신학’의 등장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에 영향을 받은 해체적 신학은 “해체가 신의 죽음의 해석학이며, 신의 죽음이 해체적 신학”이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이것은 해체를 통해 신의 죽음, 자아의 사라짐, 역사의 종말 등 모든 형이상학과 이성의 종말을 고하고, 그것들이 지닌 폭력성을 제거하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극단적 상대주의와 허무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진 못했다.(57)


   이에 대한 대안으로 신, 진리, 자아 역사와 같은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구성적 신학(=건설적 신학)이 등장하기도 했다. 전면적 해체보다는 재구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인 셈이다.(58) 이러한 구성적 포스트모던 신학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근거하여 근대적 이성이 낳은 폭력을 생태학, 평화와 같은 모티브를 지닌 운동들로 재구성하는 토대를 제공한다. 그러나 과정철학은 신의 내재성만을 인정하고 초월성을 부인하는 우려를 낳아 정통신학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처럼 포스트모던 신학은 기독교에 침입해 있는 근대성의 폐단을 단절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긍정적인 기여가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전모와 정체가 불확실하고, 기대할 수 있는 성과가 불분명하며, 여전히 내부 충돌이 있다는 점에서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기독교 신학이 예나 지금이나 그 시대의 인문학의 영향을 받아 왔다는 사실이다.(59)



■ 미래: 호모 데우스의 시대


   히브리 대학교 역사학 교수 ‘유발 하라리’는 다가오는 시대를 ‘호모 데우스 시대’로 규정했다. ‘호모 데우스 시대’란 생명공학, 사이보그공학,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 과학을 통해 슈퍼휴먼이 된 극소수의 부자들이 불멸, 행복, 신성을 누리며 사는 시대를 말한다.(64) 그는 극소수의 부자들이 컴퓨터 알고리즘을 통해 나머지 인간들을 조종할 것이며, 역사상 유래가 없는 불평등과 절망의 시대와 함께 인류의 역사가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호모 데우스 시대는 자본주의와 첨단 과학기술의 동맹에서 시작된다. 이 둘은 자체 생존을 위해 끊임없는 성장을 요구하며 인간의 호모 데우스화(化)를 부추긴다. 브레이크 없는 성장의 신화는 생태계의 안정을 파괴하고, 사회의 불평등을 극대화시키며, 인간을 세계에서 밀어내는 파국을 초래한다. 우리는 왜 이러한 현실을 맞이하게 된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저자는 호모 데우스 시대의 출발점을 니체로부터 찾는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했다. 신의 죽음이란 신본주의 가치의 몰락을 의미한다. 본질, 생명, 지혜, 진리, 정의, 일자성 등 같은 신본주의 가치가 사라지고, 그 빈칸을 인본주의 가치(인간, 이성 합리, 객관성, 자연과학, 계몽, 실증, 자유, 평등, 박애, 해방, 혁명 등)가 대체했다. 신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선 것이다. 인간이 신이 되는 시대, 이때부터가 사실상 호모 데우스 시대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본주의는 허망한 꿈이었다. 이성적 인간에 의해 계몽된 세계는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원자폭탄 투하 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사건들을 유발했다. 자연은 파괴되었으며, 사회는 불안과 공포가 팽배했다. 사람들은 근대적 이성이 만들어 낸 위험들을 이성적 수단이나 방법으로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었고, 이내 갈 길을 잃어버렸다.


   현대 사회에서 갈 길이 없다는 말은 어떤 길로 가든 좋다는 것으로 치환된다. 갈 길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향락주의, 소비주의, 물질주의, 상대주의, 냉소주의, 열광주의 등 각자의 처지나 취향에 따라 자유로이 신념을 선택하고, 향유하고, 버린다. 어떤 특정한 길을 제시해줄 안내자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즉,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때 등장한 것이 호모 데우스에서 명명한 ‘데이터교’다. 실리콘밸리에서 태어난 신흥종교인 데이터교는 인공지능 데이터에 의존하여 사는 종교를 말한다. 데이터교에서 신은 컴퓨터 알고리즘이고 말씀은 데이터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서 인간은 일상의 모든 고민과 문제들에 대해 신이나 자기 자신에게 묻지 않고 구글이나 페이스북에 물을 것이다. 그리고 데이터와 데이터를 분석하는 능력이 권위의 새로운 원천이 될 것이다.(83)



■ 결론: 온전한 가치의 지향, 온전한 신학의 추구


   인류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각각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왔다.(84) 그래서 시대마다 가치관이 변화하는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변화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 그 변화가 이전 시대의 가치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인본주의는 신본주의를 밀어내고 등장했다. 하지만 신본주의의 가치를 파괴하고 외면한 인본주의는 계몽된 이성의 이름으로 세계대전과 대학살을 자행하며 유토피아 건설에 실패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탈근대주의(포스트모던)다. 탈근대주의는 인본주의(이성, 계몽, 진보, 혁명 등)나 신본주의(생명, 진리, 선함, 아름다움, 사랑)처럼 많은 가치들을 내포하는 거대한 이야기들을 거부한고, 개인의 심리, 성적 취향, 다양한 문화와 요리, 놀이, 주거, 관광, 레저, 패션, 스포츠, 영화와 같은 작고 일상적 주제만을 다룬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서점이나 미디어)을 조금만 돌아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작은 이야기도 중요하다. 이것들의 가치를 결코 폄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신본주의를 밀어낸 인본주의가 실패한 것처럼, 큰 이야기를 거부하고 작은 이야기로만 삶을 구성하게 되면 이 역시 실패하고 말 것이다. 작은 이야기로 구성된 사회는 각자도생의 삶을 가속화시킬 뿐만 아니라 인류의 삶과 세계의 방향을 사사화·파편화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은 이야기와  이야기는 병행되어야 한다. 작은 이야기 없는 큰 이야기는 공허하며, 큰 이야기 없는 작은 이야기는 맹목이기 때문이다.(98)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그리고 탈근대적 가치들을 모두 되살리고 세우는 것. 신본주의 가치를 복원하여 이를 토대로 인본주의 가치를 복원하고, 다시 그것을 토대로 탈근대적 가치를 구축하여 온전한 가치를 정립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온전한 가치의 지향점이며, 내세워야 할 담론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다. 각각의 가치들 속에서 정반대 되는 가치들을 어떻게 통합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기독교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는 종교다. 그래서 기독교가 희망의 종교이자 혁명의 종교로 불리는 것이다.(99) 앞서 살펴봤던 것처럼 기독교 신학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대립하며 충돌하는 가치들의 통합과 융합을 부단히 이루어냈다. 따라서 서로 대립·충돌하는 신본, 인본, 탈근대적 가치를 모두 통합하여 온전한 가치를 정립하는 데는 기독교 신학만 한 이론 체계가 없는 것이다.(104)


    

   기독교의 본질, 정신, 힘은 시대의 사상과 사조들의 도전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끌어안아 마침내는 자기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스스로 풍성하고 강해진 길을 걸어온 역사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시대의 인문학을 도외시하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성서의 말씀이 시대마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답을 주기 위해선, 그 시대적 상황과 맥락에 맞는 인문학적 통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그리스도인은 말씀뿐 아니라 그 시대의 인문학, 더 넓게는 그 시대의 모든 지적 사조와 경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신학을 바탕으로 시대의 인문학을 끌어안고 공부하여 자신의 것을 만드는 싸움을 부단히 해야 한다. 칼빈도 성경 못지않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동태와 지식에도 귀를 기울였고, 칼 바르트도 ‘한 손에는 성서, 한 손에는 신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그리스도인은 신학과 인문학의 대화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신학의 대중화와 인문학의 대중화를 꿈꾸고 있는 나에게 이 책(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은 꿈의 현실화에 대한 당위성과 실천 동기를 가득 부어주었다. 신학이 공허해지지 않고 인문학이 맹목적이지 않게 되기 위해서는 균형 있는 공부와 앎을 통한 통합적 실천이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다양한 가치들이 혼재해 있는 이 시대에 필요한 지향점이며, 서두에 언급했던 나의 고민과 질문에 대한 방향성이 아닐까 싶다.



[서평]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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