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강 행복의 윤리학: 내로남불 시대를 건너는 삶의 지혜
역곡동에 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방문하는 동네라서 그런지 새로움에 대한 기대감이 들었다. 철학학교 2강은 오프라인 참석으로 신청했기에 강의 장소가 있는 역곡동으로 직접 찾아간 것이다. 코로나 이후 낯선 사람들과 대면 모임을 한 적이 그리 많지 않아서 그런지 가는 발걸음 내내 대면 모임에 대한 어색함과 설렘이 묻어나 있었다.
역곡역에서 본 강의를 같이 신청한 지인을 만났다. 학부 때 종교철학을 전공한 동생인데, 아볼로 모임을 통해 알게 되어 종종 인문학 관련 대화를 주고받으며 지내고 있다. 역시 만나자마자 근황 토크와 함께 니체의 신체성 등등 철학 관련 이야기를 마구 나누며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같이 저녁을 먹고 강의 장소인 역곡동 모퉁이돌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 도착하니 입구부터 몸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온라인으로 참석했던 1강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여기서 또 니체의 신체성 이야기가 나와 한참 웃었다) 장소로의 움직임, 사람과 사람의 만남,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교류와 교감 등, 전인격이 반응을 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2021 골목학교 <철학학교> 3강은 '행복의 윤리학: 내로남불 시대를 건너는 삶의 지혜'라는 주제로 이쪽 업계(?)에서 꽤 유명하신 김동규 박사님이 강의를 하셨다. 박사님은 철학자답게 철학이란 삶의 방식을 바꿔내는 것이라는 정의를 내리시면서 강의의 포문을 여셨다. 그리고 삶의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철학자라는 거인의 어깨에 타서 멀리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 뉴턴의 말을 인용하며, 철학 공부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설파했다.
그렇다면 오늘 강의에서는 어떤 철학을 공부할 것인가? 박사님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이 화두가 되었던 주제인 행복론을 들고 나오셨다. 행복한 삶은 인류의 보편적인 욕구다. 때문에 행복에 대해 탐구하고 철학한 다양한 학자들과 행복론이 존재하고, 심지어 오늘날의 윤리론도 어떻게 행복해질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오늘 강의 주제도 행복의 윤리학인 만큼 박사님은 행복에 대해 수많은 철학적 사유를 남긴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소환하셨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영혼의 탁월성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그럼 영혼의 탁월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좋은 삶을 지속시키는 힘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질문이 생긴다. 좋은 삶이란 대체 어떤 삶인가? 왜 좋은 삶을 지속시키면 영혼이 탁월성을 얻고 행복해지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 존재론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은 좋음(최고선, good)을 목적으로 산다고 말했다. 즉 인간이 사는 이유는 좋음을 위해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좋음(최고선, good)이란 무엇인가? 좋음에는 3종류가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좋음을 목적으로 하는 3종류의 삶이 있다. 첫 번째는 향락적 삶이다. 향락적 삶은 감각적 쾌락과 본능을 좋음과 동일시하며 목적으로 하는 삶이다. 두 번째는 정치적 삶이다. 명예와 같은 것을 좋음과 동일시하며 목적으로 하는 삶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향락적 삶은 짐승과 다를 바 없고, 정치적 삶은 타인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행복으로 이르는 좋은 삶이 아니라고 말한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지막 세 번째 삶인 관조적 삶이야말로 행복으로 이르는 좋은 삶이라고 주장한다. 관조적 삶은 철학적 사유를 하는 삶인데, 이 활동이 그 자체만으로 부족함이 없는 자족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조적 삶을 목적으로 하는 삶이야말로 좋은 삶이며, 이 삶을 탁월하게 발휘할 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탁월성을 발휘하기 위해선 훈련과 습관 같은 실천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행복한 삶을 지속시키는 힘은 습관을 통해 완성되고, 습관에서 행복의 성패가 갈리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탁월성의 본성적 성질로 '중용'을 언급하는데, 중용이란 넘치지도 않고(무모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비겁하지도 않은), 적정한 품성 상태(용기)를 말한다. 이러한 중용을 지혜롭게 실천하는 것이 곧 탁월성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한 삶이란 관조적 활동을 통해 중용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삶이며, 이 탁월함은 훈련과 습관을 통해 형성된다. 그러나 그의 행복론에 의문이 들기도 한다. 선천적으로 관조적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람은 탁월성을 발휘하기 어려우므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일까? 또한, 그의 행복론이 철학적 사유 같은 이성적 활동에 치우쳐져 있어서 엘리트주의의 면모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 중용이라는 덕목과 습관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는 점은, 스스로가 의지를 내어 노력만 하면 충분히 행복한 삶을 선택하고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기에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삶의 방식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