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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Apr 27. 2020

장소의 부재

- 일상 에세이



   코로나 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지속되면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녔던 장소들이 기억 속에서 퇴색되고 있다. 내 지인 중 한 명은 벌써 두 달째 재택근무를 하고 있을 정도로 '생계를 위한 장소'까지 잊히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채워주던 여러 방면의 장소를 밟지 못함으로써, 사회적·심리적으로 미치는 분위기나 영향이 마이너틱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특별히, 내게도 장소의 부재가 주는 영향은 예상외로 컸는데, 그만큼 내 삶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각별한 장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 삶의 패턴을 들여다보면, 직장을 제외하고 주기적 혹은 간헐적으로 방문하는 장소들이 있다. 바로 교회, 도서관, 축구장이다. (언뜻 보니까, 굉장히 언밸런스한 조합이다) 주 1회 방문은 디폴트 값으로 주어졌던 교회라는 장소의 부재는 장소라는 부재의 차원을 넘어 교제의 부재, 공동체의 부재 등 다양한 부재들을 부차적으로 생산해냈다. 이것은 마치 수식 값에 오류가 난 것처럼 내 삶의 질서를 마구 흩트려 놓았는데, 교회 가는 것이 삶의 공식과도 같았던 나에게는 교회라는 장소가 변하지 않는 상수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는 견고했던 상수를 변수로 바꾸어버렸고,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헤매게 되는 부재의 혼란을 야기시켰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아닌가. 장소의 부재로 인한 빈 시간의 낯섦은 어느 순간 익숙해졌고, 곧이어 편안함으로 진화했다. 장소의 부재로 인해 얻게 된 편안함은 꿀송이처럼 달콤하기 짝이 없었다. 장소의 부재가 선사하는 자유와 편안함은 나태와 게으름이라는 본질을 교묘히 숨긴 채, 나의 말초 신경을 톡톡히 자극하였다. 그렇게 일요일이 점점 토요일화 되어 가는 현상을 보며 하루빨리 이 현상을 거슬러야겠다는 위기의식과 그냥 편안함 속에 파묻혀 잠이 들고 싶은 마음이 대립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그리스도인들도 이렇게 힘든데,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일요일에 교회를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일까?)


   도서관이라는 장소의 부재는 뜬금없이도 지출의 증가로 이어졌다. 책을 빌릴 수 없으니 책을 사게 되고, 책을 읽을 공간이 없으니(나는 집에서 공부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카페로 향하게 되는 현상은 태어나서 처음 겪는 기이한 지출 구조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도서관의 대체재가 정녕 카페 밖에 없는 것일까. 나 뿐만 아니라 온라인 강의를 듣는 전국의 대학생들로 인해 카페들의 매출은 아마 상당량 증가했을 것이다. 그나마 직장 근처에 있는 아크 앤 북이나 학교 도서관을 종종 이용하지만, 그래도 역시 집 앞 도서관을 가는 것이 가장 편한 것은 누구나 동의할 만한 일이다.


   사실, 축구장이라는 장소의 부재로 인한 영향은 초반에는 미미했다. 그러나 전 세계적인 팬데믹 현상으로 해외축구리그까지 중단되면서 축구장이라는 장소의 부재는 축구라는 스포츠 자체의 부재로 환원되어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새벽을 울리는 종소리는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으며, 주말 밤마다 끓어올랐던 해축러들의 열정과 향연은 폭발하지 않는 다이너마이트처럼 잠잠히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하아..지금 쯤이면 리버풀이 우승하고도 남았을 텐데..) 게다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현장의 분위기와 생동감을 느끼고 싶었던 K리그 투어 계획 역시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가히, 삶을 축구에 맞춘다고 할 만큼, 축구를 통해 삶의 낙을 누려왔었는데, 문득 생각해보니 감정적 격동과 더불어 삶의 즐거움 더 나아가 쾌락을 누리는 수단이 축구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보며 나의 취미가 얼마나 협소하고 획일화되어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누구나 자주 가거나 주기적으로 가는 장소가 하나쯤은 있다. 그 장소들에는 나의 마음, 의지, 기억, 모습, 행동 등이 담겨 있다. 그것들은 나의 삶을 다채롭게 형성하며, 삶을 지속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다. 그래서일까? 늘 가던 장소의 부재는 마치 삶의 일부분을 잃어버린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장소의 부재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인사이트 또한 있는 것 같다. 장소의 소중함을 돌아보게 된다든지, 다른 장소를 발굴하게 된다든지, 취미를 다양화한다든지 등등. 어찌 되었든, 장소의 부재라는 처음 겪는 현상이 삶을 통제하고 답답하게 하지만,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새롭고 능동적인 삶을 세워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다행인 건, 글쓰기는 장소의 부재 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sunwriter #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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