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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Apr 24. 2020

글과 삶 2 : 품질과 질서의 함정

- 일상 에세이



   글을 쓸 때 항상 두 가지를 고려한다. 하나는 ‘글의 품질’이고, 다른 하나는 ‘글의 질서’다. 글을 쓸 때마다 이 두 가지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단어의 전진이 없고, 문장의 진전이 없다. 나에게 글의 품질과 질서는 마치 법과 같아서 마땅히 지켜야 할 당위성이 부과된다. 지키지 않을 경우, 글은 메모장이라는 창고에만 가득히 쌓일 뿐, 시중에 공급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글의 품질과 질서가 무엇이길래 글쓰기를 어렵게 하고 공급을 방해하는 것일까?

   ‘글의 품질’이란 글의 완성도를 의미한다. 띄어쓰기, 맞춤법, 어휘의 적절성, 내용의 퀄리티 등. 글의 품질 지수가 적어도 2등급 이상은 나와야 한다. 요컨대, 표준과 정도와 수준이 에러 없이 올바르고 알맞은, 품격 있는 글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품질에 대한 집착은 글을 쓸 때마다 나를 피곤하게 하는데 특히, 공개된 공간에 글을 쓸 때는 ‘최상의 품질이 아니면 업로드할 수 없다’라는 고집스러운 신념이 잡혀있어 창작의 고뇌와 퇴고의 번민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현대인들은 품질에 민감함과 동시에 생산성 있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글들을 주로 소비하기 때문에, 품질이 낮은 글들을 탈고했을 때 부여되는 외면과 무관심을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태 속에서 품질이 좋은 글을 공급해야 한다는 강박적 의무가 무의식적으로 각인되는 것 같다. 각인된 의무감은 점진적으로 축적되고 누적되어 하나의 습관으로, 하나의 삶으로 체화된다. 그러다 보니, 글을 쓸 때 완벽한 글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게 되고, 셀프 강박에 지친 나머지 미완의 글이 메모장 속에 그대로 퇴적된다. 이렇게 쌓인 글화석(writing fossil)들이 내 메모장에 벌써 수십 편이나 된다.

   ‘글의 질서’ 역시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다. 여기서 질서는 문맥의 구조, 글의 통일성, 문단 간격 등의 의미를 넘어 좀 더 거시적이고 포괄적인 형식의 질서까지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에세이는 에세이 카테고리에, 독서 리뷰는 독서 리뷰 카테고리에 ‘ 같은 범주화된 질서나 ‘[SUN]’, ‘2020’ 같은 고정된 틀이나 일관된 형식을 맞추는 질서다. 보통 이러한 것들은 대표성을 띄기 마련이기에 어떤 부분에 대한 수정이 필요할 시, 전체를 수정해야 한다는 수고로움이 생긴다. 아무래도 틀과 형식의 전체적인 통일성만큼 눈에 편하게 들어오는 안정적인 질서는 없으니까. 따라서, 전체 수정이라는 수고를 면하기 위해서는 초반에 컨셉을 제대로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다만, 그 일이 오래 걸리면 걸릴수록 글의 공급 역시 무기한 중단된다. 즉, ‘질서가 공급에 앞선다’라는 얘기다. 질서가 공급에 앞서게 된 글들은 시의성과 주기성을 떨어뜨리게 되고, 모든 것들이 빠르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대 사회에서 끝내 잊혀지고 만다.

   결론적으로, 내가 글을 쓰면서 깨달은 점은 품질과 질서에 매몰되면 얻을 수 있는 창작물은 없다는 것이다. 예쁘고 보기 좋은 양질의 글들을 주기적으로 공급하게끔 하는 ‘품질과 질서’라는 가치에는 역설적으로 글을 제 때 제때 생산해내지 못하게 하는 함정 역시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글을 쓰거나, 작곡을 하거나, 어떤 창의적인 활동을 할 때는 ‘품질과 질서’라는 가치를 내려놓고, ‘나의 완벽하지 않은 모습도 보여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용기가 품질과 질서의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은 품질과 질서를 발견하게 하는 인사이트를 길러 줄 것이다.

   우리는 늘 품질과 질서에 대한 완벽함을 꿈꾼다. 더 좋은 품질이 될 때까지, 더 나은 질서를 만들 때까지. 그러나, ‘완벽함’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만 실재하지는 않는다. ‘완벽함’은 도달하기 위한 ‘과정’ 일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난 후 과거의 내 글을 다시 보았을 때, 부족한 점이나 미숙한 점이 보인다면, 그것은 내가 그때보다 더 성장했다는 증표이자, 내가 ‘품질과 질서의 완벽을 향한 과정’을 걷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일상 #에세이 #글과삶

#SUN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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