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구와 풋살은 엄연히 다른 스포츠이지만, 이 글에서는 통용해서 사용
최근에 회사에서 풋살모임을 가졌다. 작년 5월 그리고 10월 이후로 세 번째 모임이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모임 총괄을 담당했다. 날짜 선정, 구장 예약, 인원 섭외, 용품 준비까지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전부 준비하고 세팅했다.
회사 특성상 남자분들이 적어서 퇴사자, 스타트업 대표, 지인들까지 섭외했다. 총 15명이 모였고, 1월 19일 목요일 저녁, 구일 고척돔 풋살장에서의 23년 첫 풋살모임이 확정되었다. 3개월 만에 하는 회사 내 풋살 모임인 만큼, 다들 설레는 마음으로 모임 날만을 기대하고 기다렸다.
경기 당일 퇴근하고 구일 고척돔 풋살장으로 향했다. 들뜬 마음으로 지하철을 기다리는 그 순간 나는 엄청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바로 풋살화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풋살화를 가져오지 못했다니!! 축구공, 조끼, 핫팩, 물/음료 등은 모조리 챙겼으면서 정작 중요한 내 풋살화는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내 자책스러웠다. (충동적으로 아이파크몰에서 당장 풋살화 하나를 질러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풋살화가 없으면 볼을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실력을 100% 발휘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풋살화를 신지 않으면 볼을 찰 때 느껴지는 그 감각, 그 맛이 살지 않아서 풋살을 해도 아쉬움이 클 것만 같았다. 그토록 기대하고 기다렸던 풋살모임이었던 만큼, 자책감과 아쉬움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경기장에 도착한 나는 오늘 신고 나온 운동화로 볼을 차기로 했다. 경기는 5:5 3파전으로 진행됐다. 비록 풋살화를 가져오진 못했지만, 잘 뛰고 싶었고 이기고 싶었다. 내가 골을 넣지 못하더도 우리 팀이 이기길 바랬고, 최소한 승률 50% 정도는 달성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은 멤버들이 축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점차 누그러들었다. 그들의 축구에는 웃음과 장난스러운 대화들이 끊이지 않았다. 패스미스를 범해도, 슈팅이 불발돼도, 실책성 플레이를 해도, 그 어느 누구도 질책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모두가 축구를 그 자체로 즐기고 있었다.
이 모습이 참 순수해 보였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축구, 원하는 축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부와 관계없이 순수하게 축구 그 자체를 즐기는 것, 그 속에서 인간적인 것들을 함께 향유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스포츠의 본질이자 가치가 아닐까?
물론, 득점과 실력 그리고 승패 여부도 간과할 수는 없다. 실력이 있는 팀을 상대로 골을 넣고 승리하는 기쁨과 성취감도 분명 우리를 행복하게 하니까.
하지만 골과 승리만을 기억하는 승리지상주의 말고, 무한경쟁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경쟁 구도 말고,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 조금은 편하게 숨 쉴 수 있고, 안전하게 나 자신을 개방하며, 순수하게 무언가를 즐길 수 있는 그런 통로, 틈,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그것을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방식도 우리에게는 분명 필요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오늘 나는 풋살화 없이 축구를 했지만, 아쉬움 따위는 전혀 없었다. 축구를 순수하게 즐기는 사람들과 순수하게 축구를 하면서 내가 사랑하는 축구가 그런 통로이자 틈, 시간, 방식으로 향유된다는 것이 행복했기 때문이다.
경기 도중 흰 눈이 펑펑 내렸다. 마치 우리의 축구가 순수하단 걸 하늘도 알아차리고, 그 순수한 마음들에 대해 보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의 축구는 흰 눈처럼 순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