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된 트라우마가 남긴 깊은 상처
한 환자를 통해 알게 된 것
어릴 적 가정폭력, 학교폭력, 그리고 수개월간 지속된 성폭력을 경험한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소한 자극에도 쉽게 과각성 상태가 되었고, 이내 해리 상태에 빠졌습니다. 해리 상태에서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어 자해와 자살 시도를 반복했고, 결국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겪는 수많은 증상들을 하나하나 따로 다루다 보니, 정작 근본적인 문제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환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떤 개념이 필요할까 고민하다가 ‘복합 PTSD’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이에 대해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단일 트라우마와 복합 트라우마는 다릅니다
교통사고나 자연재해처럼 한 번의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사람과, 장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은 그 양상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PTSD 진단기준은 단일 트라우마 생존자의 증상은 잘 설명할 수 있지만, 복합 트라우마 생존자가 보이는 성격 변화, 해리 증상, 신체화 등의 복잡한 정신병리는 충분히 담아내지 못합니다. 이런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 바로 ‘복합 PTSD’입니다.
흥미롭게도 복합 PTSD 환자들은 일반 PTSD 기준을 거의 충족하면서도, 경계선 성격장애나 주요우울장애와 겹치는 증상들을 많이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현재 DSM-5(미국 정신의학회 진단기준)에는 독립된 진단명으로 포함되지 않고, PTSD의 ‘해리성 아형’으로만 기술되어 있습니다.
복합 PTSD의 주요 증상들
복합 PTSD 환자들이 겪는 복잡한 증상들을 영역별로 살펴보겠습니다.
1. 감정 조절의 어려움
사소한 스트레스에도 과도하게 반응합니다.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자해, 자살 시도, 약물 남용, 섭식 장애, 무분별한 성관계 등 극단적이고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2. 의식과 주의력의 변화 - 해리 증상
우리는 누구나 일상에서 잠깐의 ‘멍’ 상태를 경험합니다.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대화에 몰두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는 순간 말이죠. 하지만 병적인 해리는 이와 다릅니다. 몇 분에서 몇 시간, 때로는 그 이상의 시간 동안 기억을 완전히 잃게 됩니다.
자신의 기억, 생각, 감정, 신체, 행동이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분리되었다고 느낍니다. 자신이 몸에서 떨어져 나와 밖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인증), 세상이 비현실적이고 꿈같이 느껴지는 증상(비현실감)이 주로 동반됩니다.
3. 다양한 신체 증상
과민성 대장 증후군, 만성 두통, 경련 유사 증상 등 다양한 신체 증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4. 대인관계의 어려움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고 성숙한 인간관계를 맺기 어려워합니다.
5. 절망감과 비관적 세계관
깊은 절망과 무망감 속에서 인생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복합 PTSD는 어떻게 치료하나요?
현재까지 알려진 복합 PTSD 치료는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1단계: 안정화
환자가 자해, 자살 충동, 섭식 장애, 물질 남용 등 비적응적인 행동 대신 건강한 자기관리 전략을 사용하여 압도적인 감정과 충동을 조절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2단계: 트라우마 처리
트라우마 기억을 회상하며 그와 관련된 강렬한 감정을 의식 수준에서 통합하는 작업을 진행합니다.
3단계: 치료 성과의 통합
1, 2단계에서 이룬 변화를 재평가하고, 인식, 감정, 신념, 대인관계의 범위를 확장해 나갑니다.
마치며
트라우마가 자아의 일부가 되어버린 만큼, 간단한 약물치료만으로는 쉽게 나아지지 않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하며, 그만큼 긴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한 고단한 과정입니다.
그럼에도 이 환자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함께 꾸준히 견디고 지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회복은 가능하며, 그 여정에 동행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