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내가 취업한 지 2년 만에 때 이른 결혼을 하겠다니 처음엔 좀 당황하더니 오히려 잘됐다 싶어 졌나 보다. 안 그래도 학교가 멀어 무슨 수를 내긴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혼을 하면 공식적으로 새로운 보호자가 생기는 거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침 오래 사귄 남자 친구도 은행에 취업이 돼서 집을 구해야 하니 다소 급하더라도 빨리 해치우는 것이 좋겠다며 분주하게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집 근처 한정식 집에서 뻘쭘한 상견례를 하고 결혼 날짜를 잡아 일이 착착 진행되었다. 엄마는 그동안 모아둔 내 월급 통장을 보여주며 이렇게 저렇게 혼수 준비를 할 꺼라며 계획을 브리핑했다. 나는 어차피 내 돈이란 생각도 안 들었기 때문에 엄마에게 모든 걸 맡겼다.
난 이때까지 한 번도 내 돈을 온전히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돈을 어떻게 모으고 불리는지에 대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결혼을 하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도 내 통장은 엄마가 관리했으니 당연했다. 이것이 나중에 나의 재테크에 얼마나 큰 손해였는지 이때는 미처 몰랐다.
결혼식 일주일 전쯤엔 엄마가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둘이 함께 집으로 오라고 했다. 나는 딸을 시집보내는 엄마의 애틋한 마음에서 비롯된 당부 같은 거를 하려나 보다고 짐짓 분위기를 잡고 앉았다. 사위에게 내 소중한 딸을 맡기니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고 말하며 눈물이라도 흘리면 어쩌지 하고 살짝 걱정을 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엄마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우리 둘 다 일찍 결혼을 하니 서로의 부모님께 은혜를 갚을 기회가 없지 않으냐고 했다. 부모님의 은혜는 두고두고 갚는 게 아니었나 생각하며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는 자식을 기껏 다 키워서 취직까지 시켜놨더니 취업을 하자마자 가정을 꾸려버리면 부모 입장에서는 섭섭할 것이라고 남자 친구에게 말했다. 그러니 결혼을 하더라도 남자 친구를 거의 키우다시피 한 할머니와 대학생인 동생에게 매달 각각 10만 원씩 용돈을 드리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엄마가 이렇게 대인배였던가?
듣고 보니 나야 2년 동안 부모님의 은혜를 갚아왔지만 시부모님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새삼 엄마가 다르게 보였고 그동안 이렇게 훌륭한 인품을 숨기고 있었구나 생각을 하니 하마터면 반성마저 하게 될 뻔했다. 엄마는 말을 이어갔다.
대신 요즘은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니 나도 동생들에게 똑같이 용돈을 주는 것이 공평하다고 했다. 기한은 막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로 못을 박았다. 정리하자면 너희가 결혼을 일찍 하니 양쪽 집안에 20만 원씩 경제적 지원을 하라는 것이 엄마의 요지였다.
충효사상이 뼛속까지 가득 찬 경상도 남자 친구는 참 좋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렸고 나는 엄마의 말솜씨에 탄복을 했다.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우아하게 포장을 해서 우리에게 말을 해야 하나 고심한 흔적이 느껴졌다. 이번엔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해서 돈벌이를 해오던 딸이 시집을 가버려 못 내 아쉬운 계모가 생각났다. 시부모님 핑계를 대고 있지만 사실은 엄마가 더 안타까운 것 같았다.
신혼집을 계약하던 날 대출받은 은행의 넉살 좋은 차장은 사위가 은행원이라는 엄마의 말에 차장 연봉이 8천만 원 이라며 이까짓 대출은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 말라고 큰소리를 친 순간 환해지던 엄마의 얼굴이 생각났던 건 우연일까.
역시 엄마는 남달랐다. 결혼 생활이란 걸 해 본 적 없는 신혼부부에게 매달 40만 원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나는 그렇게 엄마 곁에서 떨어져 나갔다.
학교 근처에 대출을 보태 작은 아파트를 산 우리는, 아니 나는 진정한 자유를 만끽했다. 진정한 나의 안식처였다. 신입사원인 남편은 맨날 퇴근이 늦었기에 그곳은 완벽히 나만의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좋은 건 엄마가 없다는 것이었다.
신혼의 기쁨보다는 공식적으로 엄마를 벗어났다는 사실이 너무나 홀가분했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내가 나쁜 딸인 것 같아서. 다른 딸들처럼 엄마와 가끔 저녁도 먹고 쇼핑도 하는 아기자기한 그림은 결코 나오지 않았다.
결혼생활을 하며 생기는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해 엄마에게 이야기를 하면 그래도 돈은 잘 벌지 않냐며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직장도 있고 돈 잘 버는 남편도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거냐고. 엄마는 또 내가 배가 불러서 그렇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