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더 이상 내 고민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엄마가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신체적인 변화가 급격해서 마음은 돌볼 새도 없었다.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선 걱정이 되었다.
내가 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을 받는 아기는 왠지 아들이어야 할 것 만 같았다. 혹시나 둘째가 아들이라면 나 또한 우리 엄마처럼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생겼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다행히 출산 당일 끔찍한 고통을 경험하고 둘째 아이 생각은 단박에 지워졌다.
하지만 내가 낳은 딸이 나중에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이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여자들이 출산의 고통을 겪으면 엄마 생각이 나고 미안해진다고 하던데 나는 내 아이를 딸로 태어나게 한 것이 미안했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이 고통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엄마가 또 원망스러웠다.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아침에 진통이 시작되어 전화를 했는데도 당장 달려오지 않고 남은 가족의 끼니를 챙기느라 출산 후에나 병원에 도착했다. 엄마 집과 병원은 택시로 20분 거리였다. 퇴원하는 날 엄마에게 섭섭했다고 기색을 하니 본인이 온다고 뭐가 달라지냐며 남은 가족의 식사는 챙겨야 할 것 아니냐고 했다.
스무 살이 훌쩍 넘은 아들들 점심식사를 챙기는 것이 엄마에겐 훨씬 중요한 일인 것 같았다. 그걸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엄마에게 나는 할 말을 잃었고 나중에 내 딸이 출산을 하게 된다면 난 누구보다도 빨리 달려와 손을 꼭 잡고 용기를 주리라 다짐했다.
엄마는 이미 그전부터 누누이 아이는 키워줄 수 없다고 못을 박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육아휴직은 학교 분위기상 왠지 신청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고민하는 나에게 엄마는 이모가 하는 일이 없으니 이모한테 아이를 맡기고 주말만 데리고 가는 게 어떠냐고 했다. 그러면 주중에 피곤할 일도 없으니 너한테도 아이한테도 좋은 방법이라며.
생판 모르는 남에게 맡기는 비용만큼 이모한테 지불해가며 아이가 18개월이 될 때까지 주말 가족을 했다. 엄마는 이모가 내 아이를 봐주고 있어서 미안하다며 이모 집에 자주 반찬이며 김치를 해다 날랐고 그걸 내가 고마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이모한테도 미안하고 엄마한테도 미안한 처지가 되었다. 남들이 왜 엄마한테 안 맡기고 이모한테 아이를 맡기느냐 물어오면 엄마가 몸이 좀 안 좋다고 말하곤 했다. 엄마가 야속하긴 했지만 그걸 뭐라고 할 순 없었다.
아이가 18개월이 되면서부터는 같은 아파트 가정어린이집에 아이를 두고 출근을 했다. 매일이 힘들었지만 귀여운 딸아이의 얼굴과 하는 짓을 보고 있으면 사랑스러워서 다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야간 자율학습 감독을 해야 했는데 남편은 일주일에 단 하루도 칼 퇴근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여전히 회사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엄마 말대로 돈을 잘 벌어오므로 이해를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엄마에게 부탁을 했다. 엄마는 다행히 그 정도는 해주겠다고 했다. 너무나 고마웠지만 나는 곧 매우 불편해졌다.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여기까지 오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여기 오는 날은 다른 식구들 밥을 챙기느라 아침부터 얼마나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지를 강조했다. 아직도 엄마에겐 다른 식구들 끼니가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다. 나를 주려고 반찬과 김치를 싸오느라 무거워서 혼났다며 생색을 냈고 은근히 다른 집 딸내미는 엄마한테 이런저런 선물을 해 주더라며 부러워했다.
나는 눈치를 챘지만 끝까지 모르는 척했다. 다른 엄마들이 결혼한 딸들에게 하는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김치와 반찬이 정말로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는데도 꾸역꾸역 들고 와서 호객행위를 하는 엄마가 장사꾼 같아서 정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