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밤의 단독 콘서트
7080 음악은 한때 한국 대중가요의 중심이었다.
현재는 지나간 추억의 음악이지만 레트로 감성은 7080 세대를 파고든다.
'알래스카' 밴드는 모두 70년대생으로 7080 음악 같은 존재들이다.
가족 부양, 직장 내 입지, 건강과 노후등 현실적인 문제와 씨름하는 한편
지나간 것이 그리워 과거의 향수에 급히 젖어드는 세대.
7080 라이브 카페는 중년의 불안과 추억의 틈새를 공략한다.
청춘의 기억을 소환하며 음악과 술과 감성에 취해 서로를 위로하고 위안받는 곳.
사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한다.
현실에서 내 가족이 7080 라이브 카페에 빠져있다면?
나는 한동안 이해와 수용의 괴리에서 괴로워했다.
역설적이게도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때문에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7080 라이브 카페를 출입하는 오드럼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음악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공연장 '카네기 홀'이 있다면
우리 동네에는 '카네기 라이브 카페'가 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 중엔 알(알코올중독자)과 안나(중독자의 아내)도 있다.
안나 카레니나가 생각나는 그녀는 소설처럼 삶에서 허우적대는 중이었다.
'알'의 직업은 지하철 보안관이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지하철을 타고 안전감시 하는 것이 그의 임무.
와! 재미있겠다
그가 나를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쏘아보았다.
공인 4단의 유도선수인 것이 지하철 보안관이 되게 했지만 그것 때문에 괴로워했다.
국가대표선수라는 꿈을 좇던 그가 지하철 잡상인이나 취객, 성추행범
뒤꽁무니를 쫓아다녀야 하는 신세 말이다.
알코올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도 모두 그 이유었다.
누구나 자기 일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다.
꿈과 비교될 때는 더욱 힘든 법이다.
뉴스를 보면 연일 지하철에서 흉기범들의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들을 잡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알의 모습이 떠오른다.
알코올과 7080 라이브 카페는 그에게 훌륭한 도피처였을 것이다.
안나는 그래서 힘들다.
7080 캘리포니아는 오드럼의 새로운 개척지다.
졸지에 7080 라이브카페 순례를 다니는 내 팔자!
알이 노래를 끝내고 테이블에 앉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저번엔 형수님이라더니 웬 반말?
이어지는 뒷말은 참으로 경악스럽다. (첫 번째 경악)
보도방
뭐라? 접대여성을 공급하는 보도방이라고라고라고?
나는 열이 뻗치지만 침착하게 순간적인 아이큐 300 발사.
어머? 내가 아르바이트할 때 손님으로 만났던가?
안나가 급히 대신 사과를 한다
나는 이쯤에서 정리에 들어간다. 세 가지로.
1. 자신이 경험한 세계로 세상을 인식한다.
고로 알은 보도방 경험이 많다.
2. 나는 보도방에 취업할 정도로 젊지도 이쁘지도 않다. 고로 알의 눈이 삔 거다.
3. 알과 오드럼을 비롯하여 라이브 카페의 세계를 싹 다 정리해야겠다.
이 와중에 성과도 있다.
과거 나를 짝사랑했던 욱이 오빠가 십 년 전에 죽었다는 정보. (두 번째 경악)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가 있었다는 것을 술만 먹으면 말했단다.
그 여자가 설마 나야? 이 모든 것은 알을 통해 알게 되었다.
참 세상 좁다.
알은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사신처럼 등장했는지도 모른다.
알은 계속 연거푸 신청곡을 적어냈다.
라이브 카페 업계의 노래 비용은 3곡에 만원이다.
노래방에 가면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즐길 수 있지만 이곳을 고수한다.
노래방에는 없고 7080 라이브카페에만 있는 것 때문이다.
관객의 호응.
호응해 주는 여자가 있으면 벼랑에서 시멘트 바닥으로 뛰어내리는 게 남자다.
안나는 바다를 좋아한다.
그러나 한 번도 간 적이 없단다.
알이 술병이 나서 두 달간 병가를 냈을 때도 주야장천 7080 라이브카페만 갔다.
라이브카페 유흥비로 두 달간 400만 원을 썼다는 TMI(too much information)
7080 캘리포니아가 아닌 진짜 캘리포니아를 갔을 금액이다. (세 번째 경악)
제주도 7080 라이브 카페에 가고 싶다고 졸라서 제주도 여행이라도 해봐요.
내가 내린 처방이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던지 7080 라이브카페가 있다)
근대성의 위기가 가장 섬세하게 등록되어 있는 장소가 문화다
-테리 이글턴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다시 쓴다.
중년의 불안과 감성이 섬세하게 등록되어 있는 장소가 7080 라이브카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드럼은 진짜 카테기홀이라도 갔다 온 것처럼 이런 말을 늘어놓는다.
어디서 이런 음악을 듣겠어?
당신은 나 만나서 음악의 다양성을 맛보고 있잖아.
당신 오늘 아주 큰 경험한 거야.
(보너스 경악)
그리고 이런 말도 한다.
당신 그 오빠랑 결혼했으면 마흔 살에 과부 됐어.
지하철을 타면 알이 생각난다.
언젠가 방검복 남는 거 있으면 한 개 달라고 하자 그가 처세술을 알려 줬다.
흉기범은 보통 3미터 내지 5미터 뒤에 있으니 두세 걸음 걸은 후 뒤를 돌아보라는 것.
본인도 그렇게 걸어 다닌다면서 말이다.
두세 걸음 걷고 뒤쳐다보고 두세 걸음 걷고 뒤쳐다보고....
알은 바보 아냐?
그런 식으로 걷다가는 어지러움에 쓰러지고 말 거다.
나는 자동차에 백미러가 있으니 인간 백미러 설치 아이템을 제안해 본다.
거울을 목에 설치하고 다니는 거예요. 어때요?
그러자 알이 더 좋은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핸드폰을 셀카로 설정하고 걸어요.
허걱. 그거 좋은 생각이다.
바보 아닌데?
그러나 이런 식으로 걷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니다.
8월 18일에는 공원에서 여성이 출근길에 살해당했다.
'각자 조심해서', '운이 좋아서' 살아남는 사회로 향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적어도 7080 시절에는 뒤통수를 조심해야 하는 시절은 아니었다.
최소한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있었다.
공동체의 온기가 조금은 훈훈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언니, 저희 헤어졌어요.
이혼 도장 찍은 거예요?
아직은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될지...
안나에게는 집안도 집 밖도 살기 힘든 세상이다.
그래도 지하철은 달린다.
낡은 스크린 도어 교체작업 중인 지하철 4호선 사당역에 알이 있다.
무방비로 뚫려 있는 승강장에 무인경보시스템을 설치했다.
온종일 울려대는 삐~ 삐~ 삐~ 이 소리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여기저기서 삶의 경보음이 들려도 지하철은 달린다.
그래서 우린 이곳으로 달릴지도.
7080 라이브 카페로.
'패밀리가 떴다' 라이브 카페는 유일하게 이곳만 내 인증을 통과한 곳이다.
드럼이 치고 싶어서 잠이 안 오는 오드럼을 따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라이브카페에 입성한 곳.
옛날 포스터, LP판, 오래된 오디오 장비와 '추억 소한' 요소가 가득하다.
사장님의 노래를 듣고 나면 누구라도 이곳에 빠져들고 만다.
어느 날 오드럼이 사라졌다.
문득 시계를 봤는데 허걱.
12시 30분이다.
'도대체 또 어딜 간 거지?'
아니나 다를까. 7080 라이브카페다.
당신도 이리로 와. 여기 손님 한 명도 없어.
패밀리가 떴다 라이브 카페 사장님도 옆에서 소리친다.
어서 와요. 선물 줄게요.
노래 선물 말씀이신가요?
'김광석'을 닮은 마력의 사장님.
통기타 선율과 노래 선물은 절대 사양할 수 없다.
전화를 끊고 새벽을 달린다.
치마를 펄럭이면서. 목적지는 7080 패밀리가 떴다.
오드럼, 사장님(기타), H대 교수님(건반).
텅 빈 객석에는 오롯이 나 혼자다.
한 밤중의 단독 콘서트가 열린다.
사장님이 let it be(비틀즈)를 부른다.
let it be의 뜻은 그대로 두어라.
충청도식으로는 그냥 냅둬유.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새벽을 달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들은 맥주를 마시고 나는 뜨거운 물을 마시며 짧은 대화를 나눈다.
오드럼이 드럼에 빠져 있는 이유는 현재에 머물기 때문이라고.
내 해석을 곁들인다.
교수님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나한테 뭐가 있단다.
있긴 뭐가 있겠어요? 속에 사리가 있지요
나는 혹시 내 기가 느껴지냐고 농을 친다.
H대를 졸업한 친구가 생각나서 전공학과를 묻는다.
딱 보면 몰라? 디자인과 교수처럼 생겼지
가게 문을 닫을 때가 되자 사장님이 뜻밖의 선물을 건넨다.
할랄 인증을 받은 커피와 직접 만든 수제 비누를.
할랄 인증은 '허락된 것'을 뜻하는 아랍어로 '허용된'이라는 뜻이다.
무슬림에게 신뢰할 수 있도록 생산, 제조, 유통을 보증한다.
나는 종종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영적 계시가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패밀리가 떴다'는 그렇게 내게 인증된 7080 라이브카페가 되었다.
집에 오니 새벽 3시. 오드럼이 또 사라졌다.
아. 머리 뚜껑 열린다.
어디야?
왕뚜껑 먹어
탱탱볼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오드럼.
내 심장 BPM이 자꾸 올라간다.
오늘 하루 너무 알차고 재미있었어
초등학생 일기장 끄트머리에 등장할법한 멘트다.
자려고 누운 '티슈'(반려견)에게 사랑한다고 뽀뽀를 수십 번 하더니 공황장애 약을 먹는다.
너무나 재미있게 사는데 약을 먹다니....
며칠 후 오드럼이 너무 좋은 꿈을 꿨다며 로또를 샀다.
제1066회 로또 두장.
역시나 꽝이다.
오드럼이 비명을 지른다.
그 모습이 웃겨서 나는 데굴데굴 구른다.
그제야 꽁꽁 숨겨둔 꿈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라이브 카페에서 드럼을 신나게 치는데
손님들이 가고 난 뒤 바닥에 금목걸이와 금반지가 수북이 떨어져 있더란다.
꿈에서까지 7080 라이브 카페라니!
하지만 로또는 내가 당첨되었다.
유방암 투병 중인 시누가 갑자기 계좌번호를 묻는다.
올케. 내가 올케한테 금반지 해 주고 싶어 한 거 알지?
금덩이를 사 오려고 했는데 세공하려면 또 돈이 드니
내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금반지를 사라며 내 월급보다 많은 돈을 입금했다.
분명 로또는 꽝이었는데...
오드럼 체포하러 갔다가 바닥에 떨어진 금을 내가 주운게 아닐까?
삶은 언제나 망명이다.
우리는 처음으로 지구에 떨어졌고 낯선 땅에서 우리는 늘 헤맨다.
그런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음악이다.
망명지에서 필요한 것은 마음을 달래는 음악이며 그 음악이 추억을 품은 노래라면?
과거의 선율에 기대어 오늘을 버티는 중년들.
누가 7080 라이브카페 감성을 B급 감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청중과 연주자가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며 각자의 기억과 감성을 더하는 곳.
무대 위에서 누군가는 기타를 치고,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추억에 젖으며 조용히 박수를 보내는 곳.
시대의 감성을 공유하며 위안받는 곳.
그곳이 어디든지 카테기홀이고 예술의 전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