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감상일지: 미키 17
SF에서 사람 냄새가 진득하게 났다.
미키가 인간 따위가 아닌 인쇄되는 종이쪼가리와 비슷한 대우를 받는 순간. 그리고 미키 18이 미키 17에게 '내가 말했잖아. 네 잘못 아니라고.'라 말을 거는 순간.
SF란 거대한 틀 안에 숨어 있는 곳곳의 인간 냄새. 봉준호 감독이 의도 하에 집어넣은 지구촌 사람들의 현주소. 그러니까 지구 속, 한 꼭짓점에서 벌어지고 있을 법한 일들이 떠올랐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내내 담아낸 미키 17 속 우주는
우주임과 동시에 지구였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볼 것이다. 솔직히 미키 17의 SF적 설정에 관해서는 모두가 이야기할 것 아닌가. 다른 브런치에서 충분히 차고 넘치게, 그리고 멋지게 설명해 줄 것이다. (가령 미키 17이 죽음에 대하여 고뇌하고, 멀티플 현상이 벌어지고, 누구의 에고가 진짜이며 죽기를 두려워하는 인간적 사고방식에 대하여 심도 깊은 분석이 이어지는 식으로..., 난 그 정도의 지식과 사고력과 분석력은 없다.)
그러므로 그보다 친밀한 이야기에 대해 쓰겠다.
미키 17 만의 '땀내 나는' 포인트 말이다.
17의 의미는 '성장'이다.
미키 17은 소심하다. 예민하고, 섬세하다. 바보 같은 면도 있다. 반면 미키 18은 지랄 맞다 난폭하다. 까놓고 말해 폭력적이다. 대범하며 겁이 없다. 본인을 토막 내려는 친구 앞에서 비꼬는 용기도 갖추었다. 누르면 본인의 몸이 터져버리는 버튼을 누를 행동력도 갖췄다. 미키 18을 만나기 전의 미키 17이었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미키 18을 만난 후의 미키 17은 그럴 수 있게 되었다.
본인을 괴롭히는 망상에 '꺼져'란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자라났다. 왜일까?
영화 속 미키 17과 미키 18은 끊임없이 대화한다. 미키 18의 분노가 미키 17을 향하기도, 미키 18의 위로가 미키 17을 향하기도 한다(이렇게 말하고 보니 대화라기보단 일방적 전달 같기도 하다).
영화 속 한 부분에서. 미키 18은 17에게 소리친다. 멍청아. 허겁지겁 배양육 주워 먹는 널 두고 자애로운 척 위선 떠는 마샬을 가만히 뒀어? 걔가 네 머리에 총구멍을 들이밀어도 가만히 있었어? 거기다 대고 맛있는 저녁 감사합니다, 그랬다고. 겁쟁이. 쪼다. 나였으면 주먹으로 한 대 쳤다!
다른 부분에선 어떠했는가. 크레바스에 빠져 얼어 뒤지기 직전인 미키 17에게, 'have a nice death and see you tomorrow!' 따위의 인사를 건넨 티모를 노려보며 저 녀석 죽여버릴게. 죽이고 싶지 않아? 라 속삭이는 미키 18. 헛소리를 지껄이는 마샬에게 그러니 선거에서 떨어졌지! 란 일침을 날리는 미키 18. 그리고, 엄마가 죽은 것은 내가 누누이 말했듯 네 탓이 아니라 말해주는 미키 18.
기시감이 느껴졌다. 미키 18은 내가 침대에 누워, 오늘 하루를 복기하며 덧붙이는 첨언이자 후회이자 부끄러움이자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닮았다. 침대 위 내 머릿속에 든 또 다른 나와 같단 의미다. 그런 회고가 있었기에 그다음 날의 나는 더 나아질 수 있었다. 어제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어제의 내가 했던 말을 발판 삼아 나아갔다. 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즉, 성장했다.
물론 이 영화는 익스펜더블의 존재론적 가치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SF가 맞다. 여러 윤리적 가치. 여러 논점. 어쩌고 저쩌고 SF 설정에 대해 다루는 영화가 맞다. 그러나 그럼과 동시에 성장을 매개로 한다. 오늘보다 어렸던 어제의 내가 이불속에 누워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이 떠오르게끔 한다.
그러한 대목에서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왜 미키 17인가요? 원작보다 더 죽인 이유가 있나요?" 란 물음에 "더 죽이려면 미키 87, 미키 124, 혹은 그 이상으로 갈 수 있었겠죠. 미키 17의 성장기라 17입니다. 18세에는 성인이 되니까요."
감독이 친히 의도를 드러낸 순간.
미키 17에서 '17'은 열일곱 살이란 나이에 메타포적으로 담긴 성장이다.
미키, 소모되는 기분은 어때?
영화 속 미키 반스는 소모품이다. '죽기'가 업이다. 죽기. 죽기. 또 죽기. 다시 죽기. 또다시 죽기. 그러니까, 고의적으로 죽임 '당하기'. 그리곤 다시 태어나길 반복한다. 미키 1, 미키 2, 미키... 17로 프린팅 된다. 봉준호 감독은 이에 대하여 이처럼 묘사했다. “마치 사무실에서 HP 프린터로 서류를 출력하듯 유기물을 조합해 인간을 뽑아내는 휴먼 프린팅." 그 기술 덕에 미키의 몸뚱이는 영원하다.
그러나 그 수없는 죽음과 멸시와 비난 속, 미키 반스가 정녕 영생을 누리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란 질문에 그렇다 대답하긴 어렵다.
소모되는 미키. 보험도, 산업재해도, 노동조합도, 연금도 없는 미키. 너에게 주어진 '일'을 하라며 비상식적인 노동현장에 내던져진 미키. 위험의 최전선에 서 우주선 속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다른 대우를 받는, 영생을 누리는 미키.
문득 지구 속 누군가들이 떠올랐다.
최근 유행했던 중증외상센터를 보고, 실제 중증외상센터의 상태는 어떠한지 찾아보았었다. 그때 목격했던 지표. 이국종 교수의 인터뷰. '자동차나 오토바이 사고로 다치거나 고층건물 옥상에서 추락하거나 길을 걷다 차에 치인 44세 무직자 이씨. 34세 마트판매원 김씨. 48세 일용직 노동자 이씨. 24세 생산직 노동자 최씨. 53세 생산직 노동자 신씨. 24세 음식점 배달부 주씨……'
그들이 떠올랐다. 누구보다 취약한 환경에서 노동하는 사람들. 고되고 힘들고, 어떤 경우엔 부상에 대한 리스크를 크게 짊어진 채 현장에 나서지만 보호받기 어려운 사람들. 대체 가능하단 이유로. 돈이 없다는 이유로. 평범하단 이유로. 단상 앞에 서 소스를 찬양하며 내려다보기 바쁜 사람들보다 '하등하다'므로 어제와 같이 오늘도 어딘가의 최전선으로 향하는 누군가. 미키는 그들을 닮았다.
미키는 우주가 죽인 적 없다. 인간이 죽였다. 우주선 속 사람들은 미키에게 말한다. 네가 선택한 직업이잖아. 네가 우주선에 올라타고자 선택한 '익스펜더블'이잖아. 그러니까 가서 죽어. 죽는 게 네 일이니까. 그러라고 너 뽑은 거야. 그러므로 그들은 손쉽게 미키를 죽인다. 방사능 코앞으로 내밀어 미키가 서서히 방사능에 잠식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서도 장갑을 벗어 보라 종용한다. 항체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를 외계 바이러스에 노출시키고 또 노출시킨다.
미키의 죽음. 그리고 교체. 또다시 태어난 미키 1.
미키의 죽음. 그리고 교체. 또다시 태어난 미키 2.
미키의 죽음. 그리고 교체. 또다시 태어난 미키 3.
미키의 죽음, 그리고 교체....
그래서 미키 17에선 사람 냄새가 난다.
미키의 죽음이 시사하는 바.
슈퍼히어로나 초능력자가 아니라 평범하고 가여운 인간이 출력되는 모습.
미키의 숫자가 시사하는 바.
미키 17의 성장이자 열일곱 살 누군가가 겪었을 기복, 그리고 그로부터 나타난 성장.
산업재해 보장도, 노동조합 가입도, 연금도 없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순간. 인류의 성장이란 허울 좋은 헛소리 하에 철저한 멍청함을 내보이는 정치인들의 순간. 모든 감정이 스파링 하기 바쁜 미성년들의 질풍노도 순간까지.
그것이 미키 17에서 나는 '사람 냄새'의 원인이다.
평범하고도 지구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우주이기에.
그래서 미키 17의 냄새가 익숙한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