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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연 Nov 08. 2024

백돌 한 알에도 그림자는 있다

지구감상일지: 다크 나이트


작년 11월 15일 다크 나이트가 상영관에 걸렸다. 그로부터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친구와 지나가듯 영화를 봤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우린 마주 보며 감탄사로만 가득 찬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인생 영화를 묻는다면 '프리가이'로만 답할 수 있던 나에게 새로운 선택지가 하나 추가된 날이었다.


영화는 우리에게 선과 악, 각각에 치우친 인물들을 내세우며 묻는다. 완전한 선이란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완전한 선이라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는 그런 선을 실현하기 위해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해도 되는가. 그렇다면 그 정의롭지 못한 행동은 정의에 속하지 않는다고 봐야 하는가. 과연 무엇이 정의고, 무엇이 대의를 위한 행동인가? 시퀀스마다 이런 질문들이 녹아있다. 


그래서 좋은 영화다. 모든 캐릭터를 통해 이 메시지를 고뇌해 볼 수 있는 영화.


조커는 단 하나만을 원한다. 바로 브루스의 '정의'가 무너져 내리는 것. 그가 가면 쓴 무법자를 자처하며 고담시에 가져온 미약하지만 낯선 평화를 무너뜨리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 우선적으로 브루스를 무너뜨리려 한다. 네가 가면 쓴 무법자 행세를 해봤자 나와 같은 이방인일뿐이라고. 우리 둘 다 환영받지 못하는 괴짜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정의'를 위해 달려간단 점은 너나 나나 같잖아 시종일관 말해댄다.


You'll be in a padded cell forever.
Maybe we could share one.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선인 척 내세우는 사람들,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지키려 노력하는 선한 시민들조차도 광기에 절여지기 시작하면 나와 별다를 바가 없어진다. 조커는 그렇게 말하며 고담 시를 시험한다. '정의'의 편에 선 하비 덴트, 총장, 판사를 죽이려 들며 이를 증명하려 한다. 시민들에게 너희가 리스를 죽이면 너희의 가족이 누워 있을 대형 병원을 폭파하지 않겠다 말하고, 각각 죄수와 시민이 탄 배 두 척에 버튼을 던져주며 먼저 눌러 상대편 배를 폭파시켜야 너희가 살 수 있다 말하며 악으로의 몰락을 종용한다.





조커는 배트맨의 물리적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그가 스스로를 완성시키는 선한 존재라 믿기 때문. 그가 죽어버리면 조커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 그래서 조커는 배트맨의 사회적 죽음을 유도한다. 심지어는 브루스의 오토바이 코앞에 우두커니 선 채로 그를 치어 죽이길 원하기도 한다. 그게 브루스가 세운 '정의'를 무너뜨리는 짓이니까. 시민들로 하여금 배트맨에게 얼굴을 내보이라 외치게 만드는 것. 그가 고담 시에 정립한 무언가가 무너지도록 만드는 것. 그 혼돈은 배트맨에게도 초래된다. 조커는 계속해서 묻는다. 네가 말하는 정의란 게 이런 거야? 네가 고작 가면 따위를 벗지 않고, 밤마다 자경단 놀이나 하면서 실현한답시고 말하는 '정의'가 사람들이 죽어나는 것과는 관련이 없는 거냐고. 


그는 '정의'란 것이 무너진 세상을 원할 뿐이다. 그걸 배트맨의 패배와 굴복으로 세상에 전시하고 싶은 인물이다. 그는 각자의 정의, 신념. 그것들이 굴러가는 원동력을 자극하며 계속해서 시험한다. 너라면 안 그럴 것 같아? 너라면, 네 이기심보다 대의를 택할 수 있겠어? 그리고 그 시험은 배트맨과 시민, 그리고 하비 덴트에게도 향한다. 고담 시의 백기사로 칭송받던 하비 덴트에게. 판사와 총장, 그리고 본인이 조커에게 죽을 뻔해 모두가 도망갔을 거라 생각했던 그다음 날 바로 경찰서에 등장해 네가 원하는 대로 되진 않을 것이라 호언장담하던 하비 덴트에게도.


안타깝게도 하비 덴트는 무너졌다. 뒷면이 없던 그의 동전엔 뒷면이 생겨났다. 선으로 가득하던 그에게 악이란 그림자가 드리우게 된 것. 정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트맨이 내세우고 싶었던 인물은 결국 복수란 이름 하에 총구를 들이미는 인물이 되었다. 분노에 몰락한 것이기도, 스스로의 정의를 정립한 것일지도 모르는 상태로. 덕분에 배트맨은 이겼으나 졌다. 조커를 포박하는 것엔 성공했으나, 그의 아이콘을 잃어버렸으니. 조커가 원하던 '선의 몰락'을 하비 덴트가 입증하는 꼴이 되어버렸기에 배트맨의 완벽한 패배였다.



Because he's not a hero.
He's a silent guardian. A watchful protecter.
A Dark Knight.


그래서 배트맨은 사라진다. 조커의 승리를 원하지 않기에. 모든 죄악을 본인에게로 돌린 뒤 사라진다. 투페이스 하비 덴트의 선한 얼굴만을 시민들에게 남겨주기 위해. 그가 가졌던 정의감을 내세우기 위해. 그렇게 그는 영웅이 되지 않은 채, 끝까지 살아남은 악당이 되어 퇴장한다. 


그렇게 브루스는 스스로의 '정의'를 지켰다. 그로부터 수많은 목숨 값이 있었으나, 어쨌든 지켜냈다. 다른 히어로들처럼 레이저를 쏘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초인적 힘을 가지진 않았으나 브루스에겐 지키고픈 정의이자 대의가 있었다. 조커가 무너뜨리고 싶어 했던 단단한 대의. 그것을 직접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영화. 우리의 신념은 무엇이고 우리의 정의는 무엇이며, 우리가 스크린 속 누군가였다면 이를 지켜나갈 수 있었을지 고뇌해 보게 되는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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