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감상일지: 프리 가이
누군가 인생 영화를 묻는다면 나는 프리 가이라 답한다(약간 체면이 필요할 경우 다크 나이트라 대답하기도). 그럼 십중팔구 ‘그게 뭔데 씹덕아’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라라랜드, 비긴어게인, 위대한 쇼맨 등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 생소하다는 눈빛. = 설명을 요하는 눈빛. 그럼 나는 얼버무리고 만다. 말을 장황히 늘어놨다간 그들의 눈빛 속에 든 생각이 더욱 짙어질 것이기에. ‘보면 알아’란 말로 퉁친다.
그러면 관심은 사그라드나, 나 혼자 불충된 상태로 남아버린다. 내가 ‘보면 알아’라 말해놓고 항상 아쉽다. 조용히 아쉬워한다. 내가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나열하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 우다다다 말하고 싶다. 단 한 번도 해소해보지 못한 영역. 오늘에서야 해소해보려 한다! 그러니 다음 장부터는 ‘왜 프리가이가 좋은가’에 대해 서술될 것이므로, 스포가 가득 담겨 있다. 영화를 본 후 읽는다면 오천 배 좋으리라.
모두가 이야기를 가진 영화
프리가이는 게임 속 NPC가 자아를 갖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영화는 인게임을 주 거점으로 삼아 흘러간다. 주인공인 가이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흘러가기에, 그가 마주치는 다양한 NPC들이 영화의 자잘한 문단을 채워준다. 정말 ‘자잘’하다. 매일 들러 커피를 테이크아웃해 가는 카페 직원. 플레이어들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미녀. 그리고 들어오면 위협당하는 역할인 은행 손님 등. 모두의 알고리즘은 고작 한 줄이다. 커피 만들기, 아양 떨기, 항복의 의미로 손 들고 다니기. 단순하고 명료한 행동. 소모되는 부품.
이는 가이도 매한가지였다. 이름부터가 GUY잖아. 그 또한 "Don't have a good day. Have a great day!"란 한 문장만을 외쳐대는 일개 NPC였다. 카페 직원부터 가이까지. 별 다를 바 없는 한 줄짜리 코딩 덩어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가이는 사랑을 맞닥뜨렸다. 때문에 변했다. 매일 같은 곳을 맴돌며 "Don't have a good day. Have a great day!"란 말을 하던 일상에서, 사랑을 쫓아 생전 가보지도 않은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해본 적 없는 말을 하고, 플레이어를 공격하고.... 사랑이 뭐라고 물감이 퍼지듯 자아를 만들어냈다. 가이는 그렇게 주인공이 됐다. 그리고 본인의 물감을 흩뿌렸다. 다른 NPC들에게도.
별안간 카푸치노를 주문해 카페 직원이 ‘커피’가 아닌 ‘카푸치노’를 만들 수 있게 만들었다. 미녀에게 남자 위주가 아닌 본인의 삶을 살라 말하고, 은행 손님에게는 손을 내려보라 권유한다. 그렇게 가이가 만들어낸 한 방울의 물감은 모두의 이야기로 번져가 영화를 은은히 장식한다. 드물게도 친절한 영화다.
나는 러브레터일 뿐이에요
AI와 인간이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 이는 대개 그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끝난다. 혹은 어찌어찌 장벽을 넘어선 사랑을 하거나. 그러나 프리 가이는 다르다. 다른 결말을 초반부터 쌓아 올린다. 가이가 속한 게임을 누가 만들었는가. 가이가 게임 속에서 그녀를 보고 단숨에 반한 이유는 무엇인가. 현실과 게임. 게임과 현실을 번갈아 비추며 은은한 정답을 내비치다, 가이와 밀리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졌음을 관객이 확신할 무렵 말한다.
I’m just a love letter to you.
And somewhere out there is the author.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 가이가 저 말을 내뱉는 순간 밀리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누군가 당시의 나를 목격했더라면, 밀리와 나의표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닮았음을 인정할 것이다. 사랑에 빠진 인공지능이 사랑을 남의 것으로 돌렸다. 본인의 사랑은 본인의 것이 아님을 고한다. 난 만들어진 존재임을 인정하고 스크린 속에 남겠다 선언한다. 여태 영화 속에서 흔히 나타난, 인간이 되고 싶어한 AI와는 다른 행보였다.
그래서 더 인간 같았다.
이름조차 GUY일 뿐인 무명 NPC가.
가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남지 않았다. 그가 누군가로부터 탄생했으며, 그녀에게 반한 것이 어떠한 코딩 블록 하나에서 발화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것의 저자는 따로 있다고. 그는 그저 러브 레터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여주인공은 달려간다. 항상 그녀의 곁에 존재해 온 키스에게.
사랑을 깨달은 인공지능 중 가장 인간다운 선택을 했다고 느껴졌다. 본인의 감정이 본인의 것이 아님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 사랑을 담담히 전해주겠다는 용기. 본인이 사랑하는 감정을, 그 대상을 위해 기꺼이 뒤로 물러설 수 있는 선택. 정해진 목표만을 추구하는 AI였다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으리라.
프리 가이는 그래서 사랑스러운 영화가 됐다. AI와 인간이 사랑에 빠진다는 흔하고도 흔한 레퍼토리에서 현실적 감각을 한 스쿱 넣어 아름다운 엔딩을 만들어냈다. 가장 인간다운 선택을 한 인공지능의 이야기. 프리 가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