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은 해가 따뜻하고 바람은 선선해 아이들 데리고 나가 놀기 딱 좋은 달이다. 우리 가족도 주말을 이용해 캠핑을 떠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하는 캠핑이라 짐도 많고, 빠진 것은 없는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이번 캠핑장 예약 전쟁에서는 내가 승리자였으므로(캠핑장 예약날은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신청이 몰려서 우리 부부는 핸드폰, 데스크톱, 노트북까지 동원하여 예약 전쟁에 참전한다.) 신분증과 가족사랑카드(세 자녀 이상 다둥이가족은 캠핑장 사이트 이용료 50% 할인)를 챙겨 들고 관리실에서 간단한 확인 절차 후 쓰레기봉투를 받아 들고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남편이 물었다.
“사이트 어디야?”
“응, D-49번, 저쪽으로 가야 돼.”
“와... 역시 금요일부터 시작한 사람들 많네~ 자리가 거의 다 찼어. 여기야? 47번? “
“여긴가 보네. 예약하면서 봤을 땐 배전함이 멀었는데 이상하네, 배전함이 바로 앞에 있네.”
”배고프다~ 어서 치고 밥 먹자. 자장면부터 시켜 놓을까? 배달 오는 시간도 있으니. “
오랜만에 하는 캠핑에다 5월이지만 한낮의 태양이 너무 뜨거웠고 막둥이는 어서 자전거 타러 나가자 조르는 통에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 듯했다. 여자의 귀티는 하얀 피부에서 나온다던데 난 올해도 망했다. 늘 캠핑장비를 치면서 하는 생각이지만 ‘아, 내가 여길 또 왜 왔지?’.
캠핑장에서는 더러 싸우는 부부를 목격할 수 있다. 이 좋은 데까지 와서 왜 저렇게 싸운담?
몸이 고되고 신경이 날카로워졌을 땐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해야 하는데 서로 날이 서게 힘든 노동의 강도가 감정조절을 힘들게 한다.
우리 부부도 싸우냐고? 싸울 깜냥이 돼야 싸우지.
1부터 9까지 준비란 준비는 내가 다 하고 남편은 트레일러 운전 자격증으로 카라반만 옮기니까 싸움이 될 수가 없다. 뭘 동등하게 해야 싸울 거 아냐.
겨우 어닝을 펼치고 그늘막까지 세팅 한 뒤, 테이블과 의자를 꺼내려니 마침 식사가 도착했다.
역시 노동 후에 먹는 밥은 꿀맛이었다. 일 할 때는 느껴지지 않던 바람도 선선하니 너무 좋았다.
그래, 힘든 과정은 다 끝났다. 이제 즐길일만 남았구나.
속도를 줄이며 승용차 한 대가 우리 사이트 앞에 서더니 한 아저씨가 내렸다. 손에는 관리실에서 받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우리 사이트의 푯말과 쓰레기봉투에 매직으로 써진 숫자를 번갈아보며 약간 인상을 쓴 채 우리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남편과 나는 동시에 직감했다. ‘자리 잘 못 잡았구나!!‘
아저씨는 불편한 표정으로 뭐라 그러셨고, 우리 부부는 연신 꾸벅이며
“아 죄송합니다. 어떡해요, 저희가 번호를 착각했나 봐요. 어쩌죠. 정말 죄송합니다. “
온갖 캠핑 장비를 펼쳐놓고 밥까지 차려 먹고 있었으니 아저씨도 난감하셨을 거다.
왜 47과 49를 헷갈린 걸까.
난 분명 49번이라고 얘기했고, 남편은 내가 47번 자리를 보면서 여기가 맞다고 했단다.
내 성격을 그렇게 모르나, 어젯밤부터 홈페이지 들어가서 확인한 숫자가 49번이라고. 배전함 위치까지 보는 여자라고 내가.
관리실 들어가서 ‘몇 번이었더라, 잠시만요~‘ 하는 그 순간이 싫어서 전날 밤부터 외우고 또 확인한 번호가 49번이라고.
푯말을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남편 말을 듣고 맞다고 한 내 잘못이다. 바쁘게 움직였던 젓가락들이 뚝, 밥 맛과 함께 떨어졌다.
지인들에게 동네 호구로 불릴 만큼 바보 같은 우리 둘은 본의 아니게 불편을 준 그 가족에게 너무 미안해서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게다가 우리가 원래 예약한 자리가 49번, 지금 잘 못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47번이니 적어도 1박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일 게 뻔했다.
그 가족의 동태를 곁눈질로 살피며 남편이 복화술로 얘기했다.
“둘이 싸운다, 봐 바.”
“싸운다고? 설마. 우리가 잘못했는데 왜 둘이 싸워.”
“아줌마 표정 봐 바. ‘자리 빼라고 해야지, 그냥 돌아왔냐’고 아저씨한테 뭐라 한다, 지금.”
“미쳤어, 이렇게 다 쳤는데 어떻게 빼. 이거 정리하는 거 기다리는 시간이 더 걸리겠다.”
“아줌마 표정 장난 아니라니까? 와... 어쩌지?”
“뭘 어쩌긴 어째? 사이트 크기도 똑같고, 해봤자 바로 옆집이고. 저 집도 이 자리를 고르려고 한 게 아니고 어차피 예약할 때 되는 거 아무거나 잡았을 거 아냐, 됐어.”
“되긴 뭐가 돼? 자기 같으면 그랬겠어? 나를 들들 볶았을 거면서.”
“내가? 내가 그런다고? 여보... 난 그런 사람 아니야, 그렇게 몰라? 이걸 어떻게 다 접어, 말도 안 되지.”
“뭐라도 사들고 가서 사과해야겠다.”
“여보가 가, 난 못해. 아까도 아저씨가 왔으니까 남자들끼리 해결해. “
조금 더 했다간 우리까지 분위기가 험악해질 것 같아서 서로 다른 곳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늘 같은 곳을 바라보는 부부라도 이럴 땐 다른 곳을 바라보는데 진화 작업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불편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를 그렇게 모르나? 내가 그렇게 야박한 여자라고?
처음엔 가시 돋은 미움이었다가, 서운함이었다가, 궁금함이 일었다.
도대체 남편이 보는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10년 만에 첫 이사를 하고 새로 들인 소파. 판매직원이 고양이 스크래치에도 끄떡없다는 말에 500만 원이 넘는 돈을 들여 가져온 첫날 스크래치가 났다.
“여보, 나 이거 못 써. 그 아저씨가 잘 못 판 거잖아. 가서 환불해 와.”
키즈카페에 놀러 간 날. 두 딸이 울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어떤 아줌마가 우리 때문에 자기 아기가 넘어졌다고 엄청 소릴 질렀단다.
“여보, 가서 뭐라 그래. 거긴 원래 큰 애들 노는 데고, 영유아존은 따로 있어. 자기가 자기애를 잘 봐야지. 이상한 아줌마네. 왜 안 가??”
윗집인지 윗윗집인지 또 음식물 쓰레기를 창밖으로 버려 베란다 난간에 찌꺼기가 앉았다.
“또 시작이네. 여보!!! 올라가서 얘기 좀 해봐!!”
나는 나름 합리적인 요구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내 입으로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불편한 상황에서는 늘 남편을 앞세웠다. 남편도 싸움을 싫어하고, 싫은 말을 못 하는 성격인데, 그저 남편 뒤로 숨어해 주기만을 바랐다.
가까운 가족에게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된다는 말은 식상했다. 내 남편은 나를 늘 예뻐하고 사랑하고 아껴줘야 되는 사람으로 생각해 주길 바랐나 보다. 어쩌면 남편은 나를 조금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미안했다.
결국 나는 차를 가지고 나가 싱그러워 보이는 청포도와 그 집 아이에게 줄 막대 초콜릿을 들고 다시 한번 사과를 하러 다녀왔다.
늘 남편을 앞세웠던 불편한 자리였지만 이번만큼은 혼자 가서 사과를 하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