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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영 May 27. 2023

남녀관계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

천하의 나쁜 년 = 지고지순한 조강지처




내 친구는 아들을 하나 둔 돌싱이다.

하얗고 빛나는 피부에 적당히 마른 몸매, 타고난 귀티가 좔좔 흐르는 내 친구를 만나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거울 앞에서 준비하는 시간이 평소보다 곱절 오래 걸린다.

오랜만에 만나 커피를 마시고 얘기를 나누던 중 친구의 전남편이 애인이 생겼더라는 얘기를 했다. 이제 한 아이의 부모라는 것 외에는 둘 사이에 남은 법적 남녀관계는 없으니 당연한 얘긴데도 여전히 그런 얘길 들으면 기분이 묘해진다. 어떤 기분일까?


친구 전남편의 아이에 대한 사랑은 끔찍할 정도로 깊어서 아이의 학업, 교우관계, 기념일 등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관심 가져주며,

가까이에 살면서 자주 만나는 건 물론이고 아들과 단둘이 해외여행도 곧잘 떠나는 정말 좋은 아빠이지만

내 친구와의 결혼 생활과 이혼 과정에 있어서는 양쪽 모두가 꽤 힘든 시간을 보냈다. 감히 말하지만 세상에 쉬운 이혼은 없는 것이다.

어느 날, 친구가 친정 엄마에게 남편의 새 애인 소식을 전하며

“그 여자도 처음에야 좋겠지~ 곧 실체를 알고 나면 피곤해질 거다.” 며 실소하자, 어머니께서 일침을 놓으셨다.

“ㅇㅇ아, 니 착각하지 마래이. 니한테나 나쁜 놈이지, 딱 맞는 여자일지 우찌 아노?”






단 세 번의 연애만에 결혼에 골인한 남편과는 다르게(세 번도 적은 경험은 아니지만)

나는 짧고도 다양한 유형의 연애를 했다.


스무 살에 만났던 남자친구(이하 ‘오빠’라고 칭함)는 지금 기억에 2년 정도를 만나는 동안 내가 일방적으로 잠수이별을 네댓 번은 한 것 같다.

그때의 나를 변호해 보자면,


변호 1. 말 없고 엄한 경상도 아버지 밑에 자라나 애교도 없고 무뚝뚝한 나는 성인이 되어 이성에게 받는 사랑과 관심이 색다르고 그렇게 달콤했나 보다.

변호 2. 성숙하게 이별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저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뿐, 얼굴을 보고 이별을 고할 용기가 없어 비겁하게 선택한 방법이 잠수였다.


나는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남사친들에게는 늘 여지를 남겨주는 애 태우는 여자였고,

(내가 예쁘고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만의 마이너리그에서 말이다.)

새로운 남자는 식상한 현재의 남자친구보다 늘 유리한 위치에서 게임을 시작했다.


한 번은 친구의 부탁으로 미팅 땜빵을 나간 자리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와 썸을 탔다. 자연스럽게 오빠에게는 연락하는 횟수가 뜸해지면서 하루하루 더 깊은 수심으로 잠수이별을 하던 날이었다.

썸남과 놀다 집 앞에서 헤어지려는데 으슥한 골목 어둠 속에서 오빠와 오빠의 양아치 같은 친구가 나타났다. (지금 생각하니 참 그 오빠도 비겁하네)

썸남도 유도를 하던 남자였지만 운동 중 다친 팔은 깁스 중이었고 키가 멀대같이 큰 형님들이 둘이나 거친 사투리를 쓰며 얘기 좀 하자는데 얼마나 졸았을까.

괜히 여자 하나 잘못 만나서 뭔 상황인지. ’ 저도 피해자라고요! 저 여자, 남자친구 없는 줄 알았어요!!‘라고 외치고 싶었을 수도.

셋이 무슨 얘길 하며 돌아왔는지, 그 썸남은 말이 없었고 나도 역시 미안하고 쪽(?) 팔리는 마음에 연락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그 후에 오빠랑은 다시 관계가 이어졌지만 결국 또 다른 남자가 생겨 우린 이별했다. 마지막 이별 방식도 역시 잠수였는데, 아직도 오빠에게 받은 마지막 문자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또 시작이니...



그 문자를 마지막으로 그는 날 놓아주었다. 아무리 해도 갱생이 불가능한 여자라고 생각했나 보다.

지금 생각하면 모쏠이었던 그 오빠에게 나 같은 여자는 너무 하드코어였다. 천하의 나쁜 년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이제는 날 잊었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 알고 지냈던 그의 친구들과 술 한잔 하면서 ‘그런 년’도 만났었다, 나를 욕해도 할 말이 없다.






나의 돌싱 친구도 지금은 4년째 예쁜 연애를 하고 있다. 나이 먹고 하는 연애는 어떠냐며 내가 궁금해하면 친구는 스무 살 수줍은 얼굴로 남자친구 얘기를 조심조심 꺼내는데 그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다. 지금의 남자친구를 전남편보다 먼저 만나 먼저 결혼을 했다면 인생이 어땠을까, 아쉬워하면서 나에게 묻는다.

“너 보면 진짜 신기해. 아니, 남편이 아직도 그렇게 좋고, 설레고, 보고 싶고 그래? 10년이 훌쩍 넘어서도 그렇게 좋아할 수 있는 거야?. “

그러면 나는 친구가 했던 예의 그 수줍은 얼굴을 빌려와 말한다.

“응, 좋아. 없으면 보고 싶고, 생각나고.. 내가 많이 좋아해. 이게 이상해?”


숱한 연애를 하면서 나는 나보다 더 지독한 남자도 만나보고, 나무같이 한결같은 남자도 만나며 연애를 배웠다.

그리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 12년 차까지 큰 부부싸움이나 큰 탈 없이 여기까지 행복하게 잘 살아왔다. 물론 내가 이제야 좋은 여자가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남편의 노력이 90%인 걸 알고 있다.

천하의 나쁜 년도 두꺼운 콩깍지를 십수 년째 쓰고 사는 날이 온다.



그러니

커플들이여,

안 되는 거 고쳐 쓰려하지 말고 새 인연을 찾으라.

솔로들이여,

내 짝은 따로 있으니 집 밖으로 나가 수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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