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6일 토요일,
우리 가족은 제주도에 있었다.
제주도엔 형부가 있다.
지금 나의 형부는
제주에서 '2달 살이'를 하고 계신다.
언니는 형부와 별개로 여전히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그래서 주말마다 제주도에 가려니 비행기 티켓값으로 수억이 깨진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그러면서도 이 기회에 우리 가족 다같이 얼굴이나 보자며 친정식구들을 죄다 초대했다. (형부의 의견은 안물안궁 ㅋ)
하지만 작은아빠와 작은엄마는 별로 내켜하지 않았고, 울 오빠는 중2 딸아이의 학원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작은아빠의 자녀들인 내 사촌동생 둘과 우리 가족 뿐.
울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못한 탓에, 울 삼남매는 우연인듯 필연인듯 작은아버지의 품 안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작은아버지도 딱히 자상한 어른은 아니었지만 울 아버지보다는 나았고, 작은엄마 역시 다정한 어른은 아니었지만 제 발로 찾아든 우리들을 내치지 않으셨다.
어린시절 방학이 시작되면 우리는 집에서 쫓겨나듯 작은아버지 댁으로 보내졌고, 그래서 사촌동생들과 우리는 그 시절 제법 친했다. 역시 얼굴을 자주 보면 정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른이 되고보니, 어린 사촌동생들은 그저 우리가 반가웠겠지만, 방학때마다 시댁의 조카들을 받아줘야 했던 작은엄마는... 정말로 속에서 천불이 났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작은엄마 진심으로 감사해요 ㅠㅠ)
사촌동생 1호는 나보다 4살이 어리고
사촌동생 2호는 나보다 7살이 어리다.
사촌동생 1호와 나는 초딩시절 '펜팔 친구'였을 정도로 가까웠다. 마산에 살고 있던 나는 정성껏 그린 편지지와 편지봉투에 예쁜 만화그림을 넣어 1호에서 보냈고, 서울에 살고 있던 1호는 세련된 편지지를 사서 나에게 답장을 보내왔다. 그리고 집안형편이 좋지 않았던 나를 위해 새 우표를 동봉해서 보내주기도 했었다.
사촌동생 2호는 기질이 정말 순해서 언니들이 시키는 일은 뭐든 다 했다. 7살이나 어린데다 기질까지 순한 2호가 너무 예뻐서 나는 2호를 자주 데리고 돌아다녔다. 안아주고 업어주고 뽀뽀하고 평소 어른들께 받고싶었던 애정표현을 2호에게 다 퍼부었다. 그래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종종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 다 키웠잖아."
나 : 내가 너 다 키웠잖아. 내가 매일 너 업어주고 기저귀 갈아줬던거 기억 안나? 그러니까 니가 나한테 잘 해야지~
내가 이렇게 공갈협박(?)을 하면
(기저귀를 갈아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ㅋㅋ)
2호 : 응. 기억 나. 그때 언니가 기저귀를 엄청 이상하게 입혀줘서 너무 불편했던 기억이 아직도 나네.
사촌동생 2호도 지지 않고 이렇게 맞받아친다. ㅋㅋㅋㅋㅋ 그 언니에 그 동생 ㅋㅋㅋ
나보다 3살이 많은 나의 언니는 중학시절 이후로 이상하게 나이를 거꾸로 먹더니 점점 나보다 어린 짓을 해대곤 했다.
책을 엄청나게 읽고, 교과서 정리도 완벽하게 하고, 글씨도 예쁘게 쓰고, 그 예쁜 글씨로 소설이며 시며 못 쓰는 것이 없어서 한때는 나의 우상이었던 나의 언니는, 그 많던 독서력이 무색할만큼 이상하게 점점 생각이 짧아지고 철이 없어졌다. 아마도 그 시절, 마산 대표로 중2병을 앓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밖에서 만난 사람들은 언니가 집안의 막내일 거라고 생각했고, 내가 집안의 장녀일 거라고 짐작하곤 했었다. 심지어 우리 둘을 모두 아는 사람들도 '동생이 언니보다 철 들었네.' 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었다.
언니는 30대 초반까지도 나를 무척이나 힘들게 했다. 언니와 함께 살며 참 많은 부분을 내가 다 기억하고 챙겨줘야 했던 것이다.
그랬던 언니가 갑자기 철이 들어 나에게 잘해주기 시작한 것은, 내가 가출했다 돌아왔던 32살 이후부터 였다. 그랬다. 나는 10대 시절에도 하지 않았던 가출을 30대에 했었고, 그 일이 계기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전부터 조금씩 철이 들고 있었던 것인지, 이후로 언니는 참 많이도 내 입장을 고려하고 내 생각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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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에서 돌아와 직장도 다니지 않고 되는대로 막 살고있었던 내게 '너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라고 말하고 싶어 좀이 쑤시는 가족들을 모두 막아준 것이 언니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일 년에 한 두번 연락할 정도로 소원했던 언니와 나였는데, 이후로 언니는 자주 내게 연락을 해왔고, 자주 나를 찾아와 맛있는 것을 사주었다.
그 즈음 언니에게
"요즘 왜 이렇게 나한테 돈을 많이 써?"
라고 물었더니, 언니가 대답했었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너한테 돈을 쓴 기억이 없더라고. 학교 후배들이랑 교회 동생들한테 참 많이 사줬거든. 그랬는데 정작 내 동생한테는 뭘 사준 기억이 없더라고.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너한테 많이 사주려고."
결혼 이후 그럭저럭 무난하게 잘 살고 있던 우리가족은 올해 크게 휘청거렸다. 저축해둔 돈을 모두 날렸고 대출이자가 목을 조여와 뜬 눈으로 밤을 새우는 날이 이어졌다. 그런 우리의 사정을 아는 언니가 제주여행을 제안하며 비행기 티켓값을 보내주었다. 받기 미안했지만 언니가 보내주는 돈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제주도에 갈 수도, 언니와 사촌동생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안그래도 가족들은 모두 서울에 사는데, 결혼 이후 나 혼자만 부산으로 떨어져 나와 일 년에 두어번 얼굴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코로나 이후로는 그것마저 힘든 일이 되어 마지막으로 사촌동생들을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족은
언니와 형부가 주는 돈을 감사히 받아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우리 아이들은 비행기를 탄다는 것 자체로도 신이 났지만, 이모들을 한 명도 아닌 세 명이나 한꺼번에 만난다는 사실에 들떠서, 제주도에 가기 2주전부터
"엄마 엄마~ 우리 몇 밤 자면 제주도에 가?"
하고 물었었다. 그 중에서도 그나마 자주 만났던 첫째이모(나의 친언니)를 노래 부르더니, 제주에서 이모들을 만나자 마자 두 녀석 모두 첫째이모랑 손 잡고 가겠다, 첫째이모 옆에 앉아서 밥을 먹겠다, 첫째이모랑 같은 차를 타겠다고 고집을 피워대서 우리 부부는 무척이나 수월하게 지낼 수 있었다. ㅎㅎㅎ (언니 고마워!!)
식사를 하고 간단하게 제주 관광도 하고 형부가 지내고 계신 '제주 한달살이' 주택에 당도하자, 이번엔 작은이모들이(나의 사촌동생들) 다이소를 통째로 털어온 듯한 스티커와 색칠북 선물로 우리 아이들의 혼을 쏘~옥 빼 놓는 것이 아닌가!
"아니, 부산이랑 서울의 수준 차이가 이 정도야? 우리 동네 다이소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런거 없던데 서울 다이소에서는 별걸 다 파네?"
덕분에 평소에는 엄마 껌딱지에 엄마 머리칼을 뜯어먹어야 소화가 되는 아이들의 습성 덕분에 밥을 먹을 때도 편히 먹어본 적 없던 내가, 제주에 와서야 비로소 편하게 밥도 먹고 술도 마실 수 있었다! 이모들 만만세!! 이래서 다들 이모들만 찾는구나 ㅠㅠ
다음날 새벽
우리는 일출을 보기 위해 5시부터 샤워를 하고 준비를 했는데, 정작 집주인인 형부와 언니는 도저히 못 일어나겠단다. 언니가 "내가 아이들이랑 같이 있을테니 너희끼리 다녀와." 라고 말해주어 무척이나 가볍게 오름을 오를 수 있었다.
원래는 성산일출봉을 오르려고 했는데, 전날의 형부 말씀이 성산일출봉보다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지미봉 오름이 훨씬 좋더라고 하셨다. 심지어 '지미봉'은 형부의 집에서 차로 5분 거리.
언니 덕분에 맘 편히 아이들을 놔두고 오름에 오를 수 있었다. 원래는 아이들을 다 데리고 오려고 했었는데, 오름의 오르막이 어찌나 가파르던지 아이들과 함께였다면 절대 오를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11월의 새벽은 추웠다. 아이들과 함께였다면 우리 아이들은 분명 감기에 걸렸을테고 열까지 났다면 코로나 양성반응으로 오해받아 육지로 돌아오지도 못했겠지...
수평선 위로 낮게 깔린 구름층 때문에
일출은 기대하지 않았는데
해가 떠오르는 딱 그곳에
구름층과 수평선 사이로
딱 한 뼘의 공간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미봉 정상에 함께 있던 몇몇의 사람들과 우리들은 일제히 환호를 내질렀다.
"일출을 그냥 보는 것도 좋은데
내 동생들이랑 같이 보니 더 좋다... 넘 좋아!"
우리는 다같이 껴안으며
2022년에는 분명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며
서로가 서로에게 덕담을 나눠주었다.
2021년은 참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서 가족의 소중함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된 해였다.
서울에 계신 작은엄마도 자주 전화해서 나의 안부를 물어봐주셨고, 평소 회사에 있을 때는 전화통화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던 언니였는데 막상 나에게 힘든 일이 닥치자 근무중에도 몇 시간이고 나의 울음과 한탄을 들어주었다.
가족들과 나의 형제들이 있었기에
나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고
곧바로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래서 힘든 와중에도
더욱 노력할 수 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언제든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제주에서 돌아온 후 어찌된 영문인지 나는 골반뼈와 허리가 틀어져서 일주일간 끙끙 앓아야 했고 (기내와 공항에서 둘째를 너무 자주 안고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던 것 같다 ㅠㅠ) 그래서 그 일주일간 남편이 집안일과 아이들 목욕을 도맡아 해주었다.
나는 엄마이기 이전에 아내이고,
아내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언니이자 동생이다.
나를 둘러싼 내 주변 사람들이
한 명이라도 지금과 같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을까?
제주에서 돌아와 그동안 우리가 쓴 경비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형부는 형부대로 자신이 쏜다고 하고, 동생들은 동생들대로 '아이들 용돈 주려고 했는데 깜빡했으니 경비는 안줘도 된다'고 한다. 1박2일동안 제주의 여기저기를 돌며 어마무시하게 먹고 마셨는데, 우리 가족은 단돈 1원도 부담하지 않게 된 것이다...
고맙지만 마음 한 켠이 무겁다.
우리집의 경제적 사정을 알고 있어서, 다들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정말로 성공할 것이다. 정말로 유명한 작가가 될 것이고, 돈도 많이 많이 벌 것이다. 내가 받은 도움과 내가 받은 이 따뜻한 마음을 몇 배로 돌려주고 언제나 당당하게 마음껏 사랑을 표현하며 살아야지.
고마워 내 언니♥
고마워 내 형부♥
고마워 내 동생들♥♥
당신들이 있어서
나는 점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져
언제나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