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존심

by 파란동화


이웃님의 블로그에서 과거 자신이 교편을 잡았던 학교의 교감선생님 이야기를 접했다. 중학교 교감으로 정년퇴임을 하신 후 현재는 택시운전을 하고 계시다는 얘기였다.




'교감선생님'이라고 하면, 아무리 '교권이 땅에 떨어진 시대'라 해도 누구나 존경의 눈길을 보낼만한 그런 직위다. 하지만 '택시운전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히' 대하는 직업이다. 딱히 무시하진 않아도 딱히 존경할 것도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중한 대접을 받던 '교감선생님'이, 자신을 하대하는 손님이나 만나지 않으면 다행인 '택시운전사'를 직업으로 선택했을 때, 그 분 마음 속에는 아무런 심리적 저항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웃님의 포스팅을 읽고 댓글을 달려고 창을 열었더니, 이런 댓글이 눈에 보였다.






이 글을 읽다보니 저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대기업 전무까지 지내시다 퇴직 후
미군부대 청소부를 택하시고 그 안에서
다시 청소감독으로 10년 지내셨습니다.
그저 은퇴 후 편히 사실 수도 있었는데…

-어느 블로거의 댓글-





대기업 전무까지 지내셨던 아버지가, 퇴직 후 '청소부'의 길을 선택하셨다고 한다. 대기업 전무로 퇴직을 하셨다면 은퇴 후 평생 낚시만 하며 살아도 생활비가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대기업 전무정도 지내면, 퇴직후 함께 하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스스로 '청소부'의 길을 택하셨다니...










대한민국 남자들은 '명함'으로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명함'과 명함에 찍힌 '직책'이 곧 그들자신이라고 했다. 명함 외에는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남자들이 많다고 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은퇴 후에도 과거의 명함을 잊지 못하는 남자들이라 했고, 과거의 명함이 높고 단단했을수록 과거와 현재의 괴리를 인정하지 못해 허망해한다 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남자들도 있는 것이다. 교감선생님을 하고도 택시운전대를 잡고, 대기업 전무를 하고도 빗자루를 잡는... 참으로 존경스러운 어른들.




그런데 나는 왜 이 대목에서

나의 남편이 생각났던 것일까.




나의 남편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in서울 4년제 대학을 나왔다. (물론 SKY는 아니지만) 남편은 하던 일이 잘못되어 올해 1월부터 실직상태에 있었고, 두 달 정도를 백수로 지내다 3월부터 친척어르신이 운영하시는 회사에 현장직으로 출근했다.




말이 좋아 현장직이지

사실은 '노가다'를 하게 된 것이다.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게 되기 직전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일이 잘 못 되어도 어떻게든 내 가족은 내가 먹여 살린다,

노가다를 해서라도 대리운전을 해서라도,

혹은 둘 다를 해서라도 가족을 책임지겠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하지만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2개월을 쉬어야 했고, 나는 그 2개월 동안 피가 마르는 줄 알았다.




저축에 대출까지 끌어당겨 투자한 돈은 돌려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그럼에도 다달이 나가야 하는 이자는 몇 배로 불어나 있었다. 거기에 더해 몇 개월 전 무리해서 이사를 하는 바람에 전세자금대출에 대한 이자와 새집에 들어간 가전제품에 들인 돈이 다달이 200만원 이상 지출되었고, 설상가상 남편은 퇴직하기 직전 4개월치의 급여가 밀려있었다. 밀린 월급과 퇴직금은 소송을 해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 남편은 실업급여 대상자도 아니었다...




그러니 나는, 남편의 상황을 이해해 줄 여력이 없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직전 회사와 소송을 벌일 것인지, 소송없이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그 가능성을 타진하느라 새로운 직장을 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는데, 무슨 일을 해서라도 가족을 책임지겠다던 남편이 한 달 넘도록 집에만 있자 나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왔다.




내가 보기에 우리는 '생각을 하고 이런 저런 가능성을 타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당장 밖에 나가서 단 돈 10원이라도 벌어와야 했다. 기가 죽어 매일 아내의 눈치를 보던 남편은 곧 친척어른의 회사에 출근한다고 했다. 전기공사를 하는 회사인데 그 회사에서 남편이 하게 될 일은 현장직, 즉 '노가다'라고 했다.




나는 일 할 수 있는 곳이 생겨 다행이라고 대답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사회 초년생의 월급을 받으며 10시간 가까운 노동에 토요일에도 평일처럼 일해야 했지만, 그렇게라도 일 할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남편은 일주일쯤 일하더니 육체적으로는 힘들어도 머리를 비울 수 있어서 오히려 좋다고 했다. 표정도 좋아보였다.




나는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었다.




6개월쯤 지났을 때 어머니를 통해 내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내 남편은 '노가다'를 뛰는 것이 너무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사무직으로 일하던 사람이 평소에 운동도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10시간씩 육체노동을 하게 되었는데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정도는 나도 예상하고 있었다.




남편은 처음 일주일 동안 너무 너무 힘들어서 "이 일은 못하겠습니다. 그만 두겠습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첫 아이의 얼굴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고 한다. 연로하신 어머니와 결혼 후 고생만 시킨것 같은 아내와 애교가 너무나 예쁜 둘째는 떠오르지 않는데, 오로지 첫째의 얼굴만 계속해서 떠오르더란다. 그래서 그만둘 수 없었다고 한다.




내 남편은 남몰래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몸이 힘들어서 울고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서 울었다고 한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계속 첫째의 얼굴이 어른거렸고, 그래서 남편은 힘들어도 버텼다고 한다. 딸을 생각하며 버텼다고 한다.




나는, 남자들도 몸이 힘들면 운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남자들도 우리 여자들처럼 화장실에 숨어서 울기도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화장실에서 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울 곳이 화장실밖에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화장실에서조차 큰 소리로 울 수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나와 함께 살고 난 이후로

그런 일을 겪은 남편이

무척이나 애처로웠다.




그럼에도 내색 않고

언제나 웃으면서 귀가했던 남편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나는 내가 더 힘든줄 알았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남편의 힘겨움은 알고싶지도 않았다. 그렇게나 힘들었음에도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힘들다 투정한번 못한 남편은... 그래서 얼마나 더 외로웠을까.




힘겨움을 감추려 애써 웃으며 퇴근했지만 다정하게 맞아주지 않는 아내를 보며... 얼마나 더 서글펐을까.




뒤늦게 어머니를 통해 그 얘기를 전해들었을 때,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애잔한 마음, 그리고 남편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뒤죽박죽으로 엉켜서 내 마음을 짓눌렀다.




"그렇게 힘들었어?" 남편에게 물으니

"그땐 그랬지. 다 지난 일이야." 대답하며

별일 아니라는 듯 하하 웃는다.










나는 택시운전사가 된 교감선생님과

청소부가 된 대기업임원 아버지의 얘기에서

내 남편의 뒷모습을 본다.




가족들에게 밝고 자신있는 모습만 보여주며

힘든 모습은 혼자서 삭이는 그 뒷모습에서

세상 무엇보다 드높고 강렬한 '남자의 자존심'을 본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는

내 남자의 자존심.




나는 살면서

이보다 멋진 남자는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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