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방령의 백두대간 등산로 앞에서 자동차 한 대가 멈춰섰다. 운전석에서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중년 여성이 내리고, 조수석에서는 등산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내린다.
"아저씨!"
반가운 마음에 아저씨를 불러세웠다. 정령치에서 함께 캔맥주를 마신 아저씨였던 것이다. 같은 날 백두대간을 시작해서 여기서 또 만났다. 벌써 네번째 만남이다.
"어? 뭐야? 여기서 뭐해?"
"저 어제 괘방령 산장에서 숙박했어요."
"종주 시작 안해?"
"좀 쉬었다가 천천히 가려구요."
"여보, 이 아가씨가 내가 말했던 그 아가씨야.
여기서 또 만나네. 하하하"
아줌마도 나를 보며 반갑게 눈웃음을 지어주신다. 아저씨는 등산로 입구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고, 아줌마는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주었다. 그리고 아저씨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나 먼저 갈게." 라는 인사를 남기고 등산로 안으로 성큼 성큼 사라졌다.
아줌마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아저씨가 사라질 때 까지 바라보셨다. '뭐하러 저런 고생을 사서 할까? 그냥 좀 편하게 살지.' 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저씨의 뒷모습이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아줌마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차를 몰아 왔던 길을 돌아간다.
캔맥주 아저씨는 내가 만난 최초의 성공한 사람이었다.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사업체를 직원들에게 맡기고 본인은 안식년을 가져도 될 정도로 안정적인 데다, 돈도 많고 매일 운동을 해서 건강하다. 건전하고 발전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고, 그 취미를 즐기는데 아내가 지원을 나와줄 정도다.
보통의 아내들이 남편들의 취미를 질색팔색 하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특히나 남편들의 취미라는 것이 돈 쓰면서 집 밖으로 나도는 것이라면 누구든 싫어할 만 한데, 어떻게 캔맥주 아저씨는 아내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아저씨의 성공한 삶이 부러웠다. 돈과 건강과 가족과 취미를 모두 가진 아저씨가 부러웠다. 나도 아저씨처럼 되고 싶었다. 대간 종주를 지원해주는 아내 대신, 대간 종주를 함께 해주는 남편을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인 걸까?
산장으로 돌아와 늦은 아침을 먹고 사장님부부와 우두령으로 향했다. 백두대간을 타고 넘어 온 거리에 비해 자동차로 가는 것이 훨씬 멀게 느껴졌다. 차를 타고 산을 둘러가는 것 보다 차라리 등산으로 가는 것이 직진일 때도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된다.
우두령에 차를 주차해놓고 백두대간의 남쪽 등산로로 들어섰다. 어제 내가 지나온 곳인데 이 곳이 그 곳인지 참으로 알 수 없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과 햇빛이 쨍쨍한 날이 이렇게나 다르다.
한소끔 오르막을 오르고 난 이후에 우리는 대간길을 이탈하여 능선으로 들어섰다. 남자사장님이 먹을 수 있는 나물을 알려주시며 이런 것을 뜯으라고 하셨다. 산에는 주로 취나물이 많았는데, 우리는 취와 곰취, 단풍취, 어수리, 우산나물 등을 채취했다. 간간히 보이는 고사리도 놓칠 수는 없었다.
산행과 나물채취 합쳐서 산에서 4시간 반을 보내고 산장으로 돌아왔다. 마침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사장님네 아들과 함께 고기를 구워 오늘 뜯어 온 나물에 싸 먹기로 했다. 자연산 곰취는 쓴맛이 상당히 강해서 상추와 함께 먹어야 했고 나머지는 다 그럭저럭 먹을만 했다.
사장님은 '어수리' 라는 식물이 식용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고 하셨다. 사모님과 내 손에 어수리를 하나씩 쥐어주시며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어야 하니 다같이 먹자고 하신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사장님의 중학생 아들은 화들짝 놀라 어수리를 내려놓았다. 다행히 어수리를 먹고도 우리는 모두 살아남았다.
다음날 아침. 나는 다시 대간종주를 이어가기 위해 산장을 나섰다. 이틀 밤을 같이 보냈다고 사장님 내외분은 나를 마치 친조카 대하듯 하셨다. 산장 밖으로 까지 나와 배웅해 주신다. 따뜻한 사장님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힘찬 걸음을 옮긴다. 그간의 힘겨움과 외로움이 사장님들 덕분에 말끔이 씻겨 나갔다.
괘방령에서 가성산과 눌의산을 지나 추풍령까지 이어지는 대간길은 고도도 낮고 수월했다. 가장 높은 봉우리인 눌의산 정상이 744m 였으니 얼마나 편한 길이었는지. 햇살도 적당하고 바람도 시원한 날이었다. 하지만 오늘도 황사가 가득한 것인지 고도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아래의 마을이 뿌옇게 보였다. 조망지에서 내려다보는 재미는 포기하고 숲길을 걷는 재미로 길을 이어간다.
예상보다 너무 일찍 추풍령에 닿아버린 나는 대간길 옆 배밭에서 홀로 과실작업을 하시는 할머니를 도와드려야 겠다는 기특한 마음이 생겼다. 사실은 여기서 물을 채워야했기에 일손을 좀 도와드리고 마음 편히 물을 얻고 싶었다.
"도와주면 내사 좋지 뭐~"
라고 굳이 마다하지 않으시던 할머니. 농사일이 처음인 도시처녀의 손길을 반갑게 맞아주신다. 소사고개의 사과나무밭을 그냥 지나친게 서운했던 나는 추풍령의 배밭에서 그 서운함을 달래기로 한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만 가보라는 말씀을 안 하시는 할머니. 잠시 쉬지도 않으시는 할머니. 나는 빠져나올 타이밍을 잡지 못해서 그렇게 두 시간 반 동안 허리가 휘도록 배나무 밭에서 일을 했다.
도저히 허리가 아파서 더는 못 하겠다 싶어 할머니께 그만 가보겠다고 말씀 드렸더니
"벌써?"
하시는 할머니. 벌써라니요. 저 두시간 반이나 일했어요. 잉잉.
"네. 할머니. 시간이 없어서 그만 가봐야겠어요.
그런데 저기... 물 좀 얻을 수 있을까요?"
"물은 여기 없지.
집에 가야 있는데 나는 더 일해야 해.
집에 못 가."
허거덩!!! 이건 전혀 예상 못한 반응이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여긴 시골이라 인심이 좋아~
가다가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물 좀 뜨겠다고 해 봐."
나는 속으로 눈물을 찔찔 흘리면서 앞으로는 아무리 시간이 남아돌아도 한 시간 이상은 봉사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그 넓은 배밭에서 홀로 일하시던 할머니는 내 덕분에 외롭지 않고 일손을 덜으셨을 것이다. 내가 한 것이 정녕 도움이 되었는지는 수확을 해봐야 알겠지만.
할머니와 나는 하나의 가지에서 가장 큰 과실만 남겨두고 나머지 잔챙이를 잘라내는 작업을 했는데,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쳐다보며 해야 하는 작업이 정말로 힘들었다. 목에 디스크가 올 것 같았고 허리도 함께 꺾여 담이 올 것 같았다. 두 시간 반 동안 나는 몇번이나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두드렸는데 할머니는 단 한번도 쉬지 않으셨다. 세상의 모든 농부와 할머니들이 한꺼번에 존경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나오다가 은편리마을 노인정을 발견했고 그 곳 주방에서 물을 채웠다. 노인정은 문이 열려 있었지만 안에 사람은 없었다. 노인정 시설이 너무 좋아서 여기서 하루를 묵어가고 싶었지만, 이장님 찾아뵙고 허락을 받아내야 할 것이 귀찮아서 물만 채우고 조용히 나왔다.
추풍령은 차도와 대간길이 교차하는 지점인데 그냥 지방도 하나만 교차하는 것이 아니고, 4번 국도와 경부고속국도 그리고 기차선로까지 한꺼번에 교차하는 지점이다. 한마디로 마을을 끼고 걷는 구간이 엄청 넓다. 거의 모든 대간꾼들이 여기서 다음 경로를 찾지 못해 알바를 하는데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기서 거의 한시간이나 알바를 해야 했다.
길을 찾다찾다 못 찾아서 남의 포도밭을 가로질러 개구멍으로 들어가 철도를 무단횡단하고, 철길을 따라 걷다가 목책 아래가 뻥 뚫린 개천 위를 지나고, 개천의 끝지점에서 철로 휀스를 옆으로 기어 돌아 드디어 건너편의 임도에 도착! 아아아... 암릉에 로프가 있는 등산코스보다 추풍령에서 길 건너기가 더욱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으르렁대며 목줄이 끊어져라 날뛰는 진돗개 두 마리를 피해 이리저리 우왕좌왕 왔다갔다 한 끝에 겨우겨우 다음 코스로 이동하는 이정표를 발견! 으윽... 대간길은 산에서나 마을에서나 쉬운 것이 없다.
이어 금산에 올라 추풍령휴게소가 내려다보이는 안부에 야영지를 정하고 텐트를 설치하니 오후 7시 반. 이미 날은 캄캄하다. 이번 봄 종주에서 이렇게나 늦은 시간까지 걸은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일단 저녁부터 끓여먹고 지도를 다시 보며 내일과 모레의 일정을 가늠해본다. 3일 후 서울에서 약속이 있어 모레 저녁에 서울로 돌아가야 했는데, 그 즈음 탈출할 경로가 아무래도 애매하다.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국도나 지방도는 많지만 탈출한 국도에서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가자면 택시비가 4만원 이상 나올 것 같았다. 나는 히치하이킹을 선호하는 사람이지만 간혹 한 시간 넘게 차 한대 지나가지 않는 국도나 지방도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잠만 자고 내일 아침에 왔던 길을 되돌아 추풍령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자 싶었다. 대간길에서 추풍령 역까지는 30분이면 도착할 가까운 거리였고, 탈출이 용이한 곳에서 종주를 마무리해야 돌아올 때도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나의 백두대간 일시종주는 16일만에 일단락되었다. 지리산의 천왕봉에서 이 곳 추풍령까지 오는데 보름이 걸렸다. 봄산행의 기쁨은 거의 발견하지 못하고 폐해만 잔뜩 안고있었던 나는 지난 가을산행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이런 기분으로 다시 대간종주를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며 서울로 돌아갔다.
약속을 핑계삼아 집으로 돌아온 나는 대간종주를 접으려고 했다. 봄과 여름을 모두 건너뛰고 가을에 다시 대간종주를 이어가자 싶었다. 서울로 돌아온 후 첫날과 둘째날은 무지하게 바빴다. 그런데 삼일 째부터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할 일도 없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결국
일주일만에 다시 대간길로 돌아왔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6~7구간
진행 구간 : 괘방령(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의 경계)-가성상-눌의산-추풍령-금산 비박-서울로 귀가-일주일 후 다시 추풍령(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의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