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외로운 방랑자와 괘방령산장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비가 와서 사진 한장 못 찍고, 날이 추워 잠시 쉬지도 못하고, 그저 발치만 바라보며 걸었다. 오늘은 무조건 괘방령까지 가야 한다. 괘방령에 있는 산장까지 가야한다. 괘방령은 지방도와 만나는 곳인데 그 곳에 있는 산장이 대간꾼들에게는 매우 유명했다.




식사와 술과 숙박까지 되는 곳으로 대간 종주를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반드시 들르는 곳이었다. 대간과 지방도가 만나는 곳, 바로 그 곳에 산장이 있어서 대간길에서 이탈하여 마을로 내려갈 필요도 없는 곳이었다. 오늘은 무조건 그 곳에 가서 숙박을 해야 했다. 이런 장대비와 이런 추위 속에서 비박을 할 수는 없었다.




황악산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한소끔 오르막을 막 올라왔을 때, 오르막 이후의 평지 저편으로 까만 엉덩이가 보였다.




헉!! 멧돼지다!!!




나는 깜짝 놀라 그대로 얼어버렸다. 내가 진행해야 할 방향에 멧돼지가 서 있었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는데 멧돼지는 뭘 하는 건지 꼼짝않고 서 있었다. 나의 우비가 펄럭이는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리는데도 녀석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이상하다... 멧돼지가 저렇게 둔할 리가 없는데... 용기를 내어 두어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멧돼지인줄 알았던 엉덩이의 주인은 다름 아닌 흑염소. ㅎㅎㅎ 살이 하도 쪄서 멧돼지인줄 알았다. ㅎㅎㅎㅎㅎ 뿔도 있고 야생의 산에 저 혼자 있기에 처음에는 산양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괘방령 산장에서 전해 듣기로는 오대산 이남에 있는 것은 산양이 아니라 인근 농장에서 탈출한 쇼생크염소라고 했다. ㅎㅎㅎㅎㅎ




나는 꿈에 그리던 산양을 만난 것인줄 알고 얼마나 기쁨에 들떴었는지 모른다. ㅎㅎㅎ 비가 너무 내려서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황악산을 지나 괘방령에 도착한 것이 오후 6시. 장거리였는데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날이 추워서 쉬지 않고 걸은 덕분이었다. 산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무척이나 아늑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 사진출처 : 등산 인플루언서 블로거 '란/ 오즈의 마운틴' 2013년 10월 백두대간 ※




산꾼은 단 한명도 보이지 않고 마을에서 올라온 듯한 손님들이 서너 테이블 무리를 지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후 6시에 마을 손님들이 벌써 이렇게나 많다니. 도시 사람들이 아직 회사에 있을 시간에 시골 사람들은 벌써 거하게 취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실내의 따뜻한 온기와 맛있는 음식 냄새가 추위에 젖은 나를 감쌌다. 한쪽 벽에는 그동안 다녀간 산꾼들의 등산리본과 뱃지들이 빽빽했고, 다른 공간에는 드럼과 기타와 키보드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한 잔 드신 어떤 어르신이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우비를 입었음에도 속옷까지 젖어버린 나는 주인을 찾아 두리번 거렸다.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고 잠시 후 주방에 있던 여자사장님이 나오셨다. 사장님은 나에게 식사인지 숙박인지 묻지도 않고




"아유, 다 젖었네.

일단 샤워부터 해요.

이쪽으로 들어와요."




라고 말씀 하셨다. 주방 안쪽으로 사장님 부부가 사용하는 안채가 연결되어 있었다. 거실에는 중학생 아들이 tv를 보고 있었고, 사장님은 나에게 거실 옆의 욕실을 이용하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거실로 들어선 나는 먼저 인사를 했다.




"네... 안녕하세요."

중학생 아들은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인사를 받는다. 나같은 손님들이 자주 오는 듯 별로 놀라지도 않는다. 중학생 아들의 관심은 오로지 tv 속 여자 아이돌의 노래와 춤 뿐이었다.




덕분에 편히 배낭을 열어 새 옷을 꺼내고 편히 욕실로 들어간다. 뜨거운 물로 몸을 씻어내니 추위가 조금씩 물러난다. 하아... 너무 좋다... 이곳에 산장이 있고 샤워를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오늘같은 날씨에 민가를 찾지 못해 비박을 해야 했다면 나는 분명 열감기에 걸리고 말았을 것이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사장님께서 김치찌개가 담긴 밥상을 넣어주셨다.




"따뜻한 데서 몸 좀 녹이고

한 잔 할 생각 있으면 밖으로 나와요."




이런 배려라니. 눈물나게 행복하다. 안채의 거실에서 주인 아들과 함께 tv를 보며 겸상으로 저녁을 먹었다. 보일러가 틀어져 있는 실내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따뜻한 밥을 먹으니 너무나 좋다. 중학생 아들은 여전히 나에게 관심이 없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어 더 좋다.




밥을 다 먹고 상을 내어드리고 배낭 정리를 했다. 물기를 닦을 수 있는 것들은 닦아서 재정비를 하고, 비에 젖은 것들은 방 한쪽에 널어놓았다. 9시쯤 중학생 아들은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손님들이 있는 홀로 나왔다. 여느 대간길의 쉼터와 다르게 이 곳 괘방령산장은 늦은 시간까지도 손님이 많았다. 대간꾼들의 성지라고 했는데 대간을 타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남자사장님은 기타를 연주하고 여자사장님은 손님들의 테이블에 앉아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런 낭만이라니. 한번쯤은 이런 인생을 꿈꾸기도 했다. 매일 음악과 술이 있는 인생. 산을 타는 뜨내기 손님과 마을에서 오는 단골 손님을 모두 잡을 수 있는 곳이라면 먹고 살 걱정도 접어놓을 수 있겠지. 와! 이런 멋진 곳의 산장이라니! 산을 좋아하고 백두대간을 종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 볼 그런 곳이었다.




혼자서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는지 곧 사장님 내외분이 내 옆으로 오셨다. 이런 곳에서 산장을 운영하며 사시는 모습이 부럽다고 말씀드렸다. 나도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사장님들은 웃으시며, 막상 살아보면 낭만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사장님 내외분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끝에 여자사장님이 이런 제안을 해오셨다.




"내일 비가 그치면 산나물을 뜯으러 갈건데

혹시, 여유되면 같이 갈래요?"




눈이 번쩍 뜨이는 제안이었다. 내가 매일 산에 다니면서도 식물에 대해 아는게 하나도 없다고, 그런 것도 좀 배워야 할텐데, 라고 말했더니 이런 제안을 해 오신 것이다.




"네! 네!! 갈래요~"




대간산행에 지쳐있던 나는 당장에 그러겠다고 약속을 해버렸다. 그리고 제발 제발 내일 아침 비가 멎어 있기를, 새벽동안 비가 그쳐 내일 아침에는 해가 쨍쨍 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맥주를 마시고 안채의 방으로 들어와 잠을 청했다. 창문 너머로 개구리 소리가 끊임 없이 들려온다. 개구리네 아들 손자 며느리까지 떼로 합창 하는 듯 소리에 깊은 울림이 있다. 개구리 소리를 자장가 삼아 달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비는 말끔히 그쳐 있었다. 꺄오올! 소원이 이뤄졌구나!! 오늘은 대간 종주대신 나물 따러 갈 수 있겠어! 산장의 아침은 여느 가정집과 마찬가지로 분주했다. 중학생 아들은 등교준비로 바빴고 사장님 내외분도 아들 아침식사 준비하랴 전날 다 치우지 못한 홀을 재정비하랴 바쁘셨다. 나는 산장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날의 퍼붓는 비로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주변 경치를 오늘 둘러본다.





※ 사진출처 : 등산 인플루언서 블로거 '란/ 오즈의 마운틴' 2013년 10월 백두대간 ※




산장 주변으로는 공원처럼 작은 숲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그 앞으로 장승들도 서 있고 커다란 돌탑도 있었다. 그리고 어마하게 큰 '괘방령' 표지석도 있었다. 어제 저녁에 내려온 길이었는데 어제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렇게나 떡하니 있다. 저렇게 커다란 표지석과 돌탑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니. 어제의 장대비가 어느정도였는지 다시 한번 실감난다.




그런데 '괘방령' 이름이 재밌다. '괘방' 이란 옛 조선에서 과거시험의 합격자를 방으로 써붙여 알린 것을 뜻한다. 과거시험은 오로지 궁이 있는 한양에서만 치뤄졌고, 그래서 전국의 선비들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선 반드시 한양으로 가야했다. 이때 영남지역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백두대간의 고개를 넘어가야만 했는데




'죽령' 은 죽죽 미끄러진다 하여 피하고

'추풍령' 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하여 피하고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의 '문경새재' 를 통해 넘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문경새제의 길이 막혀 부득이 추풍령을 넘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추풍령으로 곧장 향하지 않고 그 아랫고개인 '괘방령' 으로 우회해서 갔다고 한다. 경사스러운 소식은 장원급제를 뜻하고, 합격자 명단인 '괘방'에는 그 해 합격한 사람들이 모두 게시되니, 괘방령보다는 문경새재를 압도적으로 선호했으리라.




괘방령 이후로 지나게 될 추풍령과 문경새제는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넘나드는 고개였다. 오죽하면 문경새제에는 관문이 3개나 될까. 그에 반해 괘방령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고개는 아니었다. 추측건데, 이름 없는 작은고개를 과거시험 보러 가던 선비들이 자신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괘방령' 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아닐까? 믿거나 말거나 나 혼자만의 생각이다.




그런 재밌는 상상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자동차 한 대가 올라오더니 백두대간 등산로 앞에서 멈춰선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6구간

진행구간 : 바람재(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의 경계)-황악산-운수봉-여시골산-괘방령 숙박-산장에서 하루 통으로 쉼(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5월 14일~15일 / 월~화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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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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