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산삼을 먹었는데 종주를 못하면 말이 안되지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서울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추풍령으로 내려왔다. 일주일만에 다시 기차를 타니 설렌다. 날씨가 좋으니 덩달아 기분도 좋다. 그런데 추풍령에 당도하여 기차에서 내려서자 마자 대기의 열기가 훅 끼쳐 들어온다. 겨울이면 도시보다 시골이 훨씬 추운 느낌인데 그건 여름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도시보다 시골이 훨씬 더운 느낌이다.




덥다 덥다.

훅훅 찐다.




일주일동안 집에서 먹고 자고 뒹굴다 돌아왔더니 완만한 능선에서도 힘에 부친다. 보름 넘게 매일 등산을 했는데도 어쩜 이렇게 체력이 저질일까? 매일의 등산으로 근육은 점점 붙는데 체력은 오히려 망가져 가고 있었다. 먹는 것이 부실하고 기력을 쥐어짜듯 왼종일 걷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종주 첫날이라 배낭도 미친듯이 무거웠다.




그나마 추풍령 이후의 산길이 온통 나무그늘의 숲길인데다 산에는 간간이 바람이 불어서 견딜만 했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산에는 이정표가 없었다. 임도가 나타나니 여기가 '사기점 고개' 인가보다고 혼자서 생각한다.




사기점 고개 이후 임도를 따라가는 길에는 아카시아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카시아가 좋았다. 봄에서 여름으로 깊어지는 계절이면 밤에도 진하게 느껴지는 아카시아의 향이 너무나 좋았다. 나에게 아카시아나무 서른 그루를 선물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이에게 시집을 가리라! 한적한 시골에 집을 짓고, 집으로 향하는 길 양쪽으로 아카시아가 가득했으면 좋겠다. 매일 아카시아의 향을 맡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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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락 내리락 산길 숲길을 걷다보니 어느덧 '작점고개' 에 닿았다. 지방도와 만나는 작점고개에 배낭을 내려놓고 찻길을 따라 식수를 보충하러 간다. 첫날이라 배낭이 너무 무거워 당장 마실물만 가지고 출발했었다.




인터넷으로 미리 정보를 찾아보니 작점고개에 물이 콸콸 나온다고 했다. 과연 내가 도착했을 때도 콸콸 흐르는 물소리가 나를 잡아당긴다. 우와~ 이렇게나 시원한 물줄기라니! 나는 물도 채우고 세수도 한다.




작점고개로 내려서기 직전에 지방도쪽을 내려다보니, 반대편 대간입구에도 정자가 하나 있고 능선 위 전망 좋은 곳에도 정자가 있었다. 능선 위의 정자는 대간길에서 조금 벗어난 곳 같았는데 막상 작점고개에 닿고 보니 그쪽 정자로 가는 방향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오늘은 시야가 깨끗해서 오랜만에 일몰을 보고 싶었는데 능선 위의 정자를 찾을 수 없으니 무척이나 안타깝다.




북쪽의 대간길에서는 지겹도록 봤던 일몰과 일출이 남쪽의 대간길에서는 이토록 만나기가 어렵다. 오늘도 탁 트인 정상부가 아닌 숲이 가득한 능선에 야영지를 정한다.




서울에서 내려 온 첫 날이라

많이 걷지 못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내려 온 첫 날이라

다시 비박이 설레었다.




다음 날은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5시에 눈을 뜨고 7시에 종주를 시작했는데 어제만큼이나 날씨가 좋았다. 햇볕은 강렬했지만 바람이 시원하고 이어갈 대간길은 모두 숲길이었다. 나들이하듯 산책하듯 길을 이어간다. 용문산을 지나 국수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만하고 편한 길이다.




오전 11시. 용문산 국수봉에 도착했다. 이 봉우리를 기점으로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이 끝나고, 이제부터는 경북 상주로의 진입이 시작된다. 보통 백두대간 등산로를 기준으로 동과 서의 행정구역이 나뉘게 되는데, 상주권에 들어서면 백두대간의 동과 서가 모두 상주시 관할이다.




용문산 국수봉에서 속리산의 형제봉 직전까지는 동서 모두 상주시 관할이고, 형제봉부터 속리산 국립공원으로 들어서면 능선의 동쪽은 충북 보은이 차지하고 서쪽은 여전히 경북 상주가 차지한다.  그러다가 속리산의 문장대를 지나면 그때부터는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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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재에 도착하기 직전, 하얗고 노란 꽃들에 정신이 팔려 한발 한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꽃들 사이로 빠알간 열매가 보인다. 앗! 산딸기잖아?!! 기분이 좋아서 배낭을 내려놓고 딸기를 따 담았다. 룰루~ 이따 점심먹고 후식으로 먹어야지~




큰재의 폐교를 개조해 운영한다는 '숲속학교' 는 폐교를 개조한 정도가 아니라 폐교를 허물고 완전히 새로 지은 아주 멋진 곳이었다. 토요일이라 도시의 아이들이 단체로 체험학습을 온 것 같았다. 숲속학교에 도착한 것이 12시 45분 이었는데, 점심을 다 먹은 아이들이 게수대에서 식판을 헹구어 한쪽에 모으고 있었다.




숲속학교의 나무그늘 아래 평상이 있기에 배낭을 내리고 앉았다. 뛰어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간단하게 점심을 먹기로 한다. 외부인이 들어와 있는데도 아무도 내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평상에는 학부모로 보이는 어른들이 서너명 앉아 있었다.




깔깔거리며 뛰노는 아이들을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어린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이란 낯 모르는 사람도 미소를 짓게 만드는 마법의 힘을 지니고 있다. 어느덧 나도 평상에 앉아 있는 학부모들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니 절로 엄마미소가 나온다.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저 나이때는 나도 분명 세상을 다 가진 듯 신나던 때가 있었겠지만, 지금 내게 남은 기억은 아주 어릴때부터 집안일을 하던 기억, 신문배달로 돈을 벌던 기억, 술취한 아버지와 화난 새엄마에게 맞은 기억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그저 먹고 자고 뛰어놀기만 해도 부족할 시기에, 나는 집안일을 하고 돈을 벌고 밤낮으로 매를 맞아야 했다. 나의 어린시절을 통째로 도둑맞은 기분이다. 저 아이들처럼 저렇게 아무 고민없이 뛰어놀았던 시기가 나에게도 있었을까?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평상에 앉아 점심을 먹고 좀 전에 딴 산딸기도 먹었다. 하지만 산딸기는 아직 여물지 않아 단맛은 전혀 없고 온통 신맛과 떫은 맛 뿐이었다. 제대로 여물지 못하고 사회로 던져진 나도 이랬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나' 라는 아이는 부드러운 면이란 전혀 없이 시고 떫은 면만 가득하여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아이였을 것이다. 결국 나는 딸기를 다 먹지 못하고 다시 풀숲으로 돌려보냈다. 결국 나도 세상에 적응을 못하고 산으로 도망친 것 처럼.




충분히 쉬고

개수대에서 식수를 가득 채워

다시 길을 이어간다.




큰재에서 회룡재로 이어지는 길은 숲이 무척이나 예뻤다. 키 큰 나무들과 키 작은 풀들이 하늘과 땅을 온통 초록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번 종주를 시작했던 5월의 첫날은 대간길에 아직 봄이 오지 않은 듯 했는데, 어느덧 봄을 넘어 깊은 여름같은 대간길이 되었다. 룰루 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길을 이어간다. 능선은 완만하고 길은 예쁘고 햇살도 좋은데 바람까지 시원하다. 봄 대간을 시작하고 가장 기분 좋은 날이다.




회룡재로 넘어가기 전, 회룡목장으로 가는 임도와 만나는 길에서 심마니 아저씨 두 분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반갑게 인사를 드렸더니 아저씨들은 나에게 혼자냐, 어디서 왔냐, 어디까지 가냐, 물으셨다. 그리고는 갑자기 산삼을 나눠주겠다며 배낭을 내리신다. 깜짝 놀란 나에게도 배낭을 내리고 좀 앉아보라고 하신다.




'산삼' 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인 나는 기대에 찬 눈으로 아저씨들의 배낭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저씨들이 조심스레 신문지를 풀어 내어주신 산삼은 두께가 볼펜심지만 했다. 푸하하하하~ 산삼이 너무 앙증맞아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게 뭐에요? 하하하하하~"




하지만 아저씨들은 정색을 하신다. 이래 봬도 요놈들이 다 일이 년 묵은 놈들이라며 자신들의 생수로 산삼에 붙은 흙을 깨끗하게 씻어주셨다. 아저씨는 나더러 뿌리부터 꼭꼭 씹어 줄기와 잎사귀까지 모두 삼키라고 알려주셨다. 산삼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너무 애기 산삼이라며 대놓고 웃었는데, 심마니 아저씨들은 내게 애기 산삼을 네 뿌리나 주셨다. 내가 잎사귀까지 제대로 씹어 삼키는지 감시하듯 지켜보시고는, 다 먹고나자 박수를 치신다.




축하해, 아가씨.
이제 대간 종주는 문제 없겠어.
산삼을 네 뿌리나 먹었는데
완주를 못하면 말이 안되지.
안 그래?




그리고는 내 엄지손가락보다 굵은 더덕을 세 뿌리나 챙겨주셨다. 몸에 좋은거라고 그냥 먹으면 배탈이 날 수 있으니 깨끗하게 씻어서 껍질을 벗기고 먹으라며 신신당부 하신다. 아저씨들은 내게 산삼과 더덕을 나눠주시고는 쿨하게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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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는 인복이 없어도 이렇게나 없을 수 있을까 싶었던 내가, 산을 다니면서는 인복이 많아도 이렇게나 많을 수 있을까 싶었다. 길가다가 만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산삼과 더덕을 나눠주는 일이 흔한 일인가? 원래 산이란 이런 곳인가? 아니면 내가 운이 좋은 것인가? 더욱 기분이 좋아진다. 하늘을 뚫고 날아오를 듯한 기분이다.




앗!
설마 이것이
산삼의 기운?
벌써?!!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7구간

진행 구간 : 추풍령-금산-사기점고개-작점고개-1km 비박-용문산-국수봉-큰재-회룡재-개터재-2km 비박(경북 상주시)

진행 날짜 : 2012년 5월 25일~26일 / 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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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d4d88ae0-744d-481a-99b2-6837e655a004.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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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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