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백두대간에서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은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자다깨다 자다깨다를 반복하다 5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행히 비는 그치고 구름사이로 오늘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지기재 산장 사장님은 나를 다시 신의터재까지 데려다 주셨다.




"종주 잘 해요.

가다가 모르겠는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고."




마지막까지 젠틀한 사장님. 사장님은 내가 등산로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꽤 오랫동안 지켜봐 주셨다.




비가 오고 난 후의 대간길은 산뜻하고 청초하고 시원했다. 이 맑은 길을 걷는 것이 행복할 정도였다. 어제만큼 완만한 능선길이지만 어제와 다르게 농가를 따라가지 않고 숲길 산길이 이어진다. 조망지 하나 없는 숲길의 연속인데 비온 후의 청초함과 시원함 덕분에 길이 지루한줄도 모르고 걸었다.




그런데 가도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길, 이정표도 별로 없이 비슷한 풍경만 반복되는 이 길에서, 나는 왠지 길을 잃고 같은 곳을 맴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 맞을까? 나는 내 삶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맞을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지어 이어진다. 고도가 너무 낮아서 그렇다. 산이 너무 편해서 그렇다. 도시에서나 하던 생각들이 다시 나의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백두대간이 끝나면 나는 무얼 해야할까? 대간종주를 마무리한다고 해서 나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기업에 취직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해외로 원정등반을 가게 될 것도 아니다. 하루하루 먹고 살아야 하니 다시 예전처럼 별 볼일 없는 회사에 취직을 할 것이고, 예전처럼 잠이 오지 않는 밤들이 이어질 것이다.




나는 실패한 인생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백두대간에 올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나를 다시 살아가게 해 줄 강력한 동기를 찾고 있었다. 몸과 마음을 극한으로 내몰면 그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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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를 만나고 싶었다. 그간의 삶을 위로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상대는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밖에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엄마, 꿈에서도 만나본 적 없는 엄마였지만, 깊은 산에 홀로 고립되어 있으면 어느결엔가 엄마가 내 옆에 앉아 있을 것 같았다. 나의 볼을 만지고 어깨를 안아주고 나와 함께 누워 밤하늘의 별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 줄 것 같았다. 그럴 것만 같았다...







< 숲에서 길을 잃다 >



엄마가 보고싶어 숲엘 갔지

숲에 가면 엄마가 있을 것 같았지



길을 막고 풀을 뜯는

산양을 보고

엄마야? 엄마 맞지?

하지만 산양은 등을 돌려

저만치 가버리고



인기척을 알고도

다가오는 오소리에

아, 엄마야! 엄마 맞지?

하지만 오소리는 찰나의 눈맞춤으로

멀리 멀리 달아나 버리고



별 뜬 밤, 밤새도록 우는

삵의 소리에

엄마, 나 여기 있어!

하지만 삵은 더이상

다가오지 않았지



모두가 엄마 같았지만

아무도 엄마 아닌듯

숲은 점점 커져만 갔고

나는 점점 맴을 돌았지



2012. 5. 28/

백두대간 윤지미산/

파란동화






가도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길, 이정표도 없이 비슷한 풍경만 반복되는 이 길에서, 나는 왠지 길을 잃고 같은 곳을 맴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엄마에게 가는 길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처음부터 엄마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풍경이 반복될수록

우주의 고아가 된 기분이었다.




11시 10분. 윤지미산에 도착했다. 드디어 숲길의 반복이 끝나고 하나의 기점에 닿은 것이다. 바위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넓은 터가 있기에 이른 점심을 먹기로 한다. 마지막에 치고 올라온 오르막과 갑자기 가라앉은 기분 때문에 체력까지 곤두박질 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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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으며 한시간 가까이 쉬다가 화령재로 하산하여 또 30분을 쉰다. 넓고 예쁜 정자가 있으니 아니 쉬어갈 수 없다. 화령재에서 다음 코스인 봉황산 방면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국도를 따라 10분 정도 걸어야 한다.




화령재에서 봉황산으로 오르는 길도 어렵지 않았다. 아니, 쉬웠다. 원래 오늘의 비박은 봉황산에서 하려고 했는데 중간에 1시간 반을 쉬고도 오후 4시에 닿았을 정도로 쉬웠다.




그래서 오늘도 계속 걷는다. 이상하게 6시 전에는 텐트를 펼칠 수 없었다. 6시 전에 텐트를 치면 밤이 너무 길어지고 그러면 나는 또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었다. 봉황산 정상을 지나 660봉에 닿기 직전에 기가막힌 야영지를 발견했다. 그냥 넓은 공터였을 뿐이지만 아무데서나 자고 비탈에서도 자는 나에게는 천혜의 야영지로 보였다.




여기서 잘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길을 이어간다. 아직 4시45분 밖에 되지 않아 딱 한시간만 더 걸어보자 싶었던 것이다.





SE-bbf2beb5-eb42-4d78-a9e1-66948fc8852a.jpg?type=w1 ※ 사진출처 : 등산 인플루언서 블로거 '란/ 오즈의 마운틴' 2013년 10월 백두대간 ※





그런데

그로부터 25분 후




억수같은 비가

미친듯이 내리붓는다.




이런 젠장!

아까 거기에 텐트를 칠 걸!!




천둥 번개는 또 어찌나 심하게 쳐대는지 고막이 찢어질 것 같고 시력이 상실될 것 같았다. 번개가 칠 때는 커다란 나무 아래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니 본능 적으로 커다란 나무를 찾게 된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것이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저 나무에서 그 다음 나무로, 그렇게 전력질주를 하며 길을 이어간다.




아까 거기서 비박을 했어야 했어. 텐트만 일찍 쳤어도 이 비를 피할 수 있었는데. 후회를 하며 계속 뛰다 걷다를 반복한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덩어리 하나가 툭 떨어진다. 뭐지? 솔방울인가?




갑자기 덩어리들이 투두두둑 여기 저기 떨어진다. 투명하고 하얗고 예쁜 덩어리들이다. 이게 뭐지? 신기한 마음에 비가 오는 것도 잊고 그것을 주워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동그란 형태에 주변으로 사자갈기 같은 모양이 붙어있다. 아니 어쩌면 어렸을 때 그렸던 햇님 모양 같기도 하다. 투명하고 하얗고 동그랗고...




아앗!!!

우박이다앗!!!




우박이 우박이

직경 2cm나 되는 우박이

내 엄지 손가락 마디보다 큰 우박이

미친듯이 쳐 내리고 있는 것이다!!!




꺄아아아~!!!!

우박이다아~~~!!!!




나는 너무 신기하고 좋아서 팔랑팔랑 뛰어다니며 우박덩어리들을 주워 모았다. 도시에서 맞던 우박과는 크기부터가 달랐다. 빛깔도 더욱 투명하고 아름다웠다. 우박을 잘 못 맞으면 피부도 뚫린다는 말은 나의 뇌에서 사라져버린지 이미 오래였다. 내가 이 녀석들을 만나려고 아까 거기서 비박을 하지 않은 거구나! 역시! 끝까지 걷다보면 이런 행운을 만난다니까? 룰루 랄라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우박보다 더 신기한 것은 날씨였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던 빗줄기는 우박이 내림과 동시에 거의 잦아들었는데, 그 와중에 햇빛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떤 대단한 호랑이가 장가를 가길래 햇빛 아래 비도 아닌 우박이 쏟아지는 것일까? 역시 대간은 대간이다. 바람과 빗줄기와 우박의 스케일이 모두 상상을 초월한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

투명하고 영롱한 우박들이



보석처럼 반짝 반짝 빛을 내며

나의 앞길을 장식하고 있었다.



다른 노력은 필요치 않았다.

그저 반짝이는 보석을

따라가기만 하면 그 뿐.




우박은 5분쯤 내리다 그쳤다. 우박이 그치니 다시 빗줄기가 강해진다. 빗 속을 걷다보니 어느새 국도와 만나는 '비재' 까지 내려와버렸다. 국도를 건너 산 능선으로 접어들자 비탈진 공터가 나타난다. 나는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이 비탈에 텐트를 펼쳤다.




다행히 텐트를 펼치는 동안 빗줄기가 보슬비로 약해져 있었다. 부랴부랴 짐을 풀고 급해도 땀을 흘렸으니 몸도 닦고 옷도 갈아입고 텐트로 기어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을 닫고나니 다시 빗줄기가 강해진다. 역시! 나는 타이밍의 여왕이야! 우박을 만난 덕분에 아직도 기분이 좋았다.




자고 일어나면 비는 완전히 그쳐 있을 것 같았다. 그냥 나의 느낌이 그랬다. 빗 소리를 들으며 야영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비탈진 경사에 텐트를 쳐서 몸이 계속 미끄러지는 것 같은 느낌만 빼면 오늘도 썩 괜찮은 비박이었다.




다음날은 늦잠을 잤다. 알람을 못 들어 늦잠을 잔 것이 아니라, 아침까지도 텐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귀찮아서 일부러 더 잤다. 텐트 안에서 꾸물꾸물 하다가 7시쯤 일어나 텐트를 접고 종주를 시작했다.




밤부터 비는 개어 있었지만 숲이 우거진 곳에서 잤더니 잎새 위에 고여있던 빗방울들이 아침까지도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아침도 먹지 않고 육포를 우걱 씹으며 길을 이어간다.




빗방울이 계속 떨어지는 나무숲이 아닌, 볕이 드는 너른 곳에 앉아 젖은 장비를 말리며 아침을 먹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침을 안 먹은 빈 속으로 시작부터 오르막인 속리산 구간을 오르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헉헉대며 한꺼풀 오르자 멋들어진 조망바위가 나타났다.




고작 50분 오르고 조망바위에 젖은 텐트를 널어 말리며 1시간 10분을 쉬었다. 바위에 기대어 산아래 경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신선이 된 기분이다. 사람이 돈 없이도 살 수 있는 존재라면 나는 진정 산을 돌아다니며 살고 싶다. 산신령께 치성을 들여 무에서 물을 빚어낼 수 있는 능력을 하사받아 매일 이런 멋진 곳에서 세상을 굽어보며 살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경치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함께 할 누군가가 없다면 그 곳은 천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나는 나를 아끼고 사랑해 줄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엄마를 잃어버린 텅 빈 마음에 끝없이 애정을 쏟아부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간절히.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8구간

진행 구간 : 지기개산장 숙박(경북 상주시)-신의터재-윤지미산-화령재-봉황산-비재 비박-속리산 진입(경북 상주시)

진행 날짜 : 2012년 5월 28일~29일 / 월~화

SE-55b312a3-af3c-418e-b556-1e6e840d64a8.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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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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