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산이 나를 지켜준다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하지만 회룡재를 지나면서부터 나는 다시 급격히 지치기 시작했다. 산삼을 네 뿌리나 먹고도 기운을 못 쓴다. 정말이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몸뚱이다. 물을 가득 채운 배낭은 점점 무거워지고 가도가도 조망지 하나 나타나지 않는 꽉 막힌 숲길의 연속이었다. 오늘은 '개터재' 까지만 걸으려고 했는데 비박지를 찾다보니 2km나 더 걸어버렸다.




더 이상은 이동할 힘이 없어서 약간 경사진 곳이라도 비박을 하기로 하고 배낭을 내렸다. 항상 비박지를 정하면 텐트부터 설치하고 다른 일을 했는데, 오늘은 배낭을 풀어 밥부터 지어 먹었다. 아침식사를 일찍 했더니 배가 너무 고파 견딜 수 없었다. 밥부터 먹고 한숨을 돌렸더니 그제야 살 것 같다.




드디어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텐트를 설치하고 옷도 갈아입고 할 일을 했다. 텐트 앞에 서서 갈아입은 옷을 정리하는데 바시락 바시락 동물 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던 일을 멈추고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니 저쪽 등산로에서 너구리가 기어오고 있었다.




백두대간 등산로를 따라 너구리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ㅎㅎㅎ 뭐야? 너도 백두대간 종주중인 거야? 너구리는 지척에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고 냄새를 맡는 것인지 땅에 얼굴을 들이밀고 계속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두 손을 내밀고 앉아있으면 녀석이 내 손 위로까지 기어 올라올까? 너구리가 너무 귀여워서 꼬옥 끌어안아 쓰다듬고 싶었다. 하지만 야생 너구리는 아무리 귀여워도 손을 내밀어서는 안 된다. 너구리는 '개'과 포유동물이라서 접촉만으로도 광견병에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불과 2m 앞까지 기어온 너구리는 그제야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갸웃 하며 나를 빤히 바라본다. 저 나무는 뭐지?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여기에 이런 나무가 없었는데? 언제 이렇게 큰 나무가 생긴거지? 라고 생각하는 듯 고개를 연신 갸웃 거렸다. 꺄아~! 귀여워!!!




나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우며

"안녕?" 인사를 했다.




안녕? 잘 지냈니?
나는 네가 무척이나 보고싶었단다.




그랬더니 화들짝 놀란 너구리가 쏜살같이 도망친다. 꺄악! 나무가 말을 한다! 이상해!!! 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ㅎㅎㅎㅎㅎ 도망치는 너구리를 보며 웃음이 터져나왔다.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는 와중에도 너구리는 절대로 등산로를 벗어나지 않았다. 녀석은 정말로 대간 종주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숲속학교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얻고 산삼도 얻고 야생동물과의 인사도 얻었다. 백두대간에서 가장 많은 것을 얻은 날이다. 행복하고 행복하고 행복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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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기 전 10분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후 10분




나는 텐트 안에 누운채로

자연이 선사하는 세상을 감상한다.




별이 쏟아질 때도 있고

나뭇잎이 살랑일 때도 있고

햇빛이 찬란할 때도 있다.




어떤 풍경이든 다 좋다.

나는 자연 한가운데 누워

세상 모든것이 잠들었다 깨어나는 소리를

듣는다.




이 느낌이 좋아서

산에서 계속 지내고 싶었다.

도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오랜 등산으로 지쳐 있다가도 도시로 돌아가면 금세 산이 그리웠다. 나는 등산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텐트부터 챙겼다. 내게 산을 올라갔다 그냥 내려오는 것은 목욕탕에 갔다가 때를 밀지 않고 그냥 나오는 것과 같았다.




나에게 등산은 곧 비박이었다.




비박이 있어야만 제대로 등산을 한 기분이었다. 마을 어귀나 산 자락에서 하는 캠핑은 의미 없었다. 깊은 산 속이나 높은 산 정상부여야만 비박의 의미가 있었다. 사람소리가 없는 곳이어야 했고 음악이나 다른 잡소리가 끼어들어서도 안됐다.




외부의 소리라곤 살풋 걷는 나의 발소리와 조용한 숨소리만이 전부였다. 나는 산을 다니면서 음악을 들은 적도 없었고 '야호' 소리를 내지른 적도 없었다. 자연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자연이 내게 하는 얘기를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걷고있을 때는 나의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 길이 힘겨우면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비박을 하며 산의 한가운데 숲의 한가운데 누워있으면 나는 없고 자연만 있는 것 같다. 눈을 감으면 물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고 눈을 뜨면 숲의 비호를 받는 것 같았다. 온 산이 나를 지켜주는 것 같았다.




안녕? 잘 잤니?
덕분에 나도 잘 잤어.
밤새 지켜줘서 고마워.




속삭이듯 소근 소근 아침인사를 전한다.

어제만큼이나 기분좋은 오늘이 시작되었다.




오늘의 경로도 어제만큼이나 편안하고 수월했다. 날씨 또한 어제 그제와 마찬가지로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이 함께 한다.




그런데... 대간길의 고도가 어찌나 낮은지 임도와 농가를 너무 많이 만난다. 얼마나 많이 만났는지 나중에는 짜증이 일어날 정도였다. 나는 분명 백두대간을 걷고자 이 고생을 하는 것인데 시골마을이 끊임 없이 나타나니 실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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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마치, 지리산 둘레길을 걸을때의 심정과 흡사했다. 산길 흙길을 기대하고 찾아간 지리산 둘레길에 어찌나 차도가 많던지. 심지어 지리산 둘레길 4코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새카만 아스팔트를 따라가는 길이었다. 내가 아스팔트나 걷자고 서울에서 함양까지 내려왔던가, 번민과 실망이 나를 잡고 놔주지 않았었다.




오늘의 종주길에서도 처음 농가를 만났을 땐 인삼밭 포도밭이 신기하고 예뻐서 계속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는 농가와 밭이 보이면 실망스러워서 짜증이 났다. 역시 대간은 대간이다. 긴장을 풀면 이렇듯 기대를 배신한다. 고도가 낮은 길, 마을과 과수원을 끼고 걷는 길이 계속 계속 이어진다.




그나마 가장 높은 곳이 '백학산' 인데 이 곳의 해발이 618m 다. 사과밭이 있던 소사마을보다 이곳의 산 정상이 더 낮은 것이다. 백학산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숲길은 걷기도 편하고 그늘져서 만족스러웠지만 개머리재가 가까워지자 다시 농가와 과수원이 나타난다. 이 땡볕 아래 그늘 하나 없는 마을길을 따라 걷는다.




오늘의 목적지는 '지기재' 를 지나 '신의터재' 까지 가는 것이었는데 대간길이 너무 완만해서 오후 3시에 벌써 도착해버렸다. 근처 농가에서 물을 얻어 대간을 계속 이어갈까 어쩔까 망설이다가, 처음의 계획대로 민박집에 전화해서 픽업을 요청했다. 앞으로 속리산을 지나려면 힘 꽤나 써야 할테니 쉴 수 있을때 쉬자는 생각이었다.




오늘의 숙박지는 대간꾼들에게 유명한 '지기재산장' 이었다. 산장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곳 신의터재보다 지기재와 더 가까운 곳이다. 사장님은 서울분이신데 백두대간 종주 후 이곳에 터를 잡고 산장을 운영하며 대간꾼들에게 도움을 주고 계셨다.




지기재산장의 가장 큰 메리트는 원하는 장소까지 사장님이 픽업을 와 주신다는 것이었다. 나도 지기재가 아닌 신의터재에서 전화를 드렸는데 흔쾌히 와주시겠다고 하셨다. 사장님을 기다리며 신의터재를 둘러본다.




신의터재는 낙동강과 금강이 나뉘는 분수령이라고 한다. 한반도의 물줄기는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동과 서로 나뉘는데 그 중 호남지역으로 흘러가는 금강과 영남지역으로 흐르는 낙동강이 이곳에서 나뉘는 것이다. 백두대간을 따라가다 보면 '분수령' '발원지' 이런 곳을 많이 만나게 된다. 어디로 흘러가든 그 기준에 백두대간이 있는 것이다.




산장 사장님을 만나 '지기재산장' 에 도착했다. 오늘은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손님이 나 혼자밖에 없었다. 종주를 일찍 끝낸 덕분에 등산복을 빨아 아직 남은 볕에다 널어놓고 배낭도 재정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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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까지 챙겨먹고 사장님이 계신 안채로 건너가 어제 심마니 아저씨들께 받았던 더덕을 나눠드리려고 했다. 사장님은 내 손에 들린 더덕을 보시더니 하하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 하셨다.




"우리집 뒷마당에 더덕 천지야.

아가씨 많이 먹어. 모자라면 얘기하고.

뒷마당에 있는 것도 뽑아다 줄게."




손이 부끄러워진 내게 사장님은 다음 말도 덧붙이셨다.




"미안해, 아가씨. 오늘은 집사람이 서울로 올라가서 나 혼자 뿐이거든. 집사람이 있었으면 같이 술잔이라도 기울일텐데 나 혼자라서 혼자 온 아가씨한테 술을 대접하기가 좀 그렇네. 다음에 친구들이랑 같이 오면 꼭 술 한잔 대접할게"




이토록 젠틀한 사장님이라니! 비록 더덕은 거절 당하고 술 대접도 못 받았지만 기분만은 몹시도 편하고 좋았다. 산장의 벤치그네에 앉아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도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대간길 근처에 집을 마련해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9시쯤 잠을 청했는데 새벽 2시쯤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깨어버렸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고 있었던 것이다. 비가 올 것 같은 생각에 산장 마당에 널어놓았던 등산복을 걷어왔는데, 아니나다를까 20분 후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천둥 번개까지 쩡쩡 울린다.




오늘 비박을 하지 않고 산장을 찾은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빗소리가 거의 폭우 수준이다. 비박을 하다가 이런 장대비를 동반한 천둥번개를 만났다면 맨몸으로 비를 맞는 기분이었으리라.




내일도 이렇게 비가 오면 곤란한데...

라는 생각을 하다가 남은 잠을 설쳐버리고 말았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7구간

진행 구간 : 개터재 2km 비박(경북 상주시)-백학산-개머리재-지기재-신의터재-지기개산장 숙박(경북 상주시)

진행 날짜 : 2012년 5월 26~27일 / 토~일

SE-57671c7d-1e0f-4d6c-8c53-0fdb8670f8fc.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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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시원한 주말 되시고

월요일에 다시 만나요!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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