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다시 길을 이어간다. 다행히 아침의 50분이 가장 힘든 구간이었던 듯, 이후로의 길은 오르막 내리막이 있어도 완만하고 수월했다.
정오 쯤 '못제' 에 도착했다. 못제 는 '재' 가 아닌 '제' 다. '고개' 가 아닌 '연못' 이라는 뜻이다. 백두대간 마루금의 유일한 연못이라고 한다. 못제 안내 설명판에는 진짜 연못처럼 넓은 물 웅덩이 사진이 있었는데,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연못의 모습이 아니었다. 넓고 움푹한 느낌은 있으나 물이 고인 곳은 없다. 어제 그런 장대비가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못제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하지만 더욱 가까이 다가 가면 늪지대에 발이 빠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을 돌려 돌아나오려는데 못제 저편으로 푸드드드득 새들이 도망친다. 어미새와 그 뒤로 아가새들이 쫑쫑거리며 도망친다. 제대로 날지 못하는 아가새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미새는 날아오르지도 못하고 쫑쫑거리며 아가새들을 인솔한다.
"아니야! 나는 너희들을 해 칠 생각이 없어.
도망치지 않아도 돼! 내가 떠날 게."
못제 가까이 다가가지 말 걸 그랬다. 괜한 호기심때문에 새 가족을 놀라게 만들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제발 나의 미안한 마음이 전해졌기를... 제발 놀란 아가들이 진정 되었기를...
곧 헬기장에 도착했다. 여기서 점심을 먹으며 또 1시간 10분을 쉬었다. 너른 볕에 텐트와 침낭도 널어 말리며. 이렇게 쉬면서 길을 이어가니 참으로 좋다. 등산이 등산같지 않고 종주가 종주같지 않다. 나는 그냥 나들이를 나온 사람, 소풍을 나온 사람 같다.
이젠 더 이상 말릴 것도 없으니 쉬지 말고 대간을 이어가자 싶었다. 하지만 오후 2시반에 도착한 형제봉의 조망이 기깔나게 좋은 것이다!
암릉 봉우리 위로 올라서면 산 아래가 사방팔방 내려다 보였다. 신록으로 가득 찬 세상이 나의 발아래 나의 품안에 이토록 끝없이 펼쳐진다. 가슴이 벅차 오른다. 심장이 두근거려 숨 쉬는 것이 힘들 정도다. 그래서 또 30분을 쉬어버렸다. 이 멋진 곳을 두고 어떻게 그냥 간단 말인가.
형제봉의 바위에서 내려오니 나무 아래에다 누군가가 손그림으로 백두대간 진행 방향을 그려놓았다. 그런데 그 그림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형제봉 봉우리를 돌아 내려가라는 것이다. 저 방향으로 돌아 내려가면 그 길이 내가 올라왔던 길 아닌가? 나는 친절한 손그림을 무시하고 선명한 등산로를 따라갔다.
그리고 알바에 당첨되었다!
길을 잃은 것이다. 처음에는 선명하던 등산로가 가면 갈수록 좁아지더니 나중엔 길이 아닌 그저 완만한 능선 위에 서 있게 되었는데, 능선 아래로 절같은 건물이 내려다보였다. 지도에 표시된 관음사라는 절이 저것인 것 같았다. 젠장! 북쪽으로 가야하는데 남쪽으로 내려선 것이다.
으아아! 아까 그 손그림 이정표가 맞았어. 내 생각이 틀렸던 거야. 나는 잘 못 된 길로 20분이나 들어섰다가 다시 형제봉을 찾아나섰다. 그리고 이번에는 손그림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 보았다. 울창한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길이 두어 그루의 나무를 지나자 선명히 나타났다. 아! 이래서 그림을 그려 이정표를 세워 놓았구나! 나처럼 알바하는 사람이 무진 많을 것 같았다.
형제봉을 지나 피앗재에 도착했다. 30분이면 도착할 완만한 능선길을 알바 덕분에 1시간 넘게 걸려 도착했다. 오후 4시. 이쯤 비박을 하면 좋겠다 싶었지만 물이 없었다. 나는 물을 구하기 위해 백두대간을 버리고 마을로 연결되는 만수동계곡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계곡을 만나면 물도 채우고 몸도 좀 씻고 싶었다. 어제는 비를 너무 맞았고 오늘은 땀을 너무 흘렸다. 온 몸이 찝찝하고 불편했다. 계곡을 찾아 내려가는 길에 '피앗재 산장' 을 홍보하는 안내판이 계속 보였다. 아까 형제봉에서부터 보였던 안내판이다. 이 곳 만수동계곡 쪽으로 내려가면 산장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피앗재에서 10분쯤 내려왔을까? 등산로 한 옆으로 노랗고 커다란 물탱크가 서 있었는데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저장하는 것 같은 물탱크의 상단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어제 내린 비로 물탱크가 가득 찬 모양이었다. 계곡은 등산로에서 한참 내려가야 나올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물탱크에서 쏟아져나오는 물을 받아 물통을 채웠다.
물통부터 채우고 세수도 하고 양치도 한다. 2m가 넘는 물탱크의 꼭데기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니 꼭 샤워기에서 물이 나오는 것 같았다. 가만. 샤워기라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등산로는 넓었지만 오가는 사람은 없었다. 오후 4시 50분. 이 시간이면 산을 올라오는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옷을 훌훌 벗고 몸을 씻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시원하고 개운했다. 날이 날인지라 심장이 얼 것처럼 차갑지도 않았다. 그저 시원하고 그저 개운할 뿐이었다. 머리도 감고 몸도 씻고 비누 하나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개운하게 씻었다. 재빨리 몸을 닦고 새옷으로 갈아입으니 4시 57분. 완벽해!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다시 산으로 올라섰다. 물도 빵빵하고 몸도 깨끗해졌다. 매일 이런 비박을 할 수 있다면 굳이 민박을 해야 할 필요도 없겠다 싶었다. 그런데 산으로 올라선지 5분도 되지 않아 다시 천둥이 우르르 한다. 번개까지 쩡쩡 내리꽂는다.
설마 어제처럼 또 비가 오는 건 아니겠지? 두어발짝을 더 걷다가 아까보다 더 큰 천둥소리에 반사적으로 다시 몸을 돌려 마을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앗재 산장에 전화를 걸어 오늘 숙박을 할 수 있는지 여쭈었다. 노란 물탱크에서 얼마나 더 가야 산장이 나오는지도 여쭈었다. 우산은 없고 우비만 있는데 비가 오면 다시 온 몸이 쫄딱 젖을 판이었다.
걸음을 서둘렀다. 하늘이 계속 우르르 소리를 낸다. 삽시간에 먹구름이 몰려들어 갑자기 밤처럼 어두워졌다. 걷고 뛰고를 반복해서 10분만에 피앗재산장에 도착했다. 호랑이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헉헉대며 산장에 도착했다. 마당에 나와계시던 사장님은 나를 그런 나를 보며 웃으신다.
"전화 주신 분이죠?"
"네!"
나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강한 빗줄기가 쏟아진다. 나는 부리나케 처마 아래로 들어섰다. 다행히 비를 하나도 맞지 않고 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휴우... 다행이다. 저 장대비를 오늘도 맞아야 했다면 너무 우울했을 거야. 이젠 더이상 갈아입을 옷도 없었다.
그래, 차라리 잘 된 거야. 오늘은 따뜻한 방에서 몸도 지지고 젖은 등산복도 빨아야겠다 싶었다. 사장님은 방을 안내해 주시며 식사는 어떻게 할 건지 물으신다. 아직 배낭에 누룽지가 많아서 알아서 먹겠다고 말씀드렸다.
방으로 들어와 젖은 등산복부터 빨고 배낭을 뒤집어 물건들을 재정비하는데 사장님이 다시 오셨다.
"식사할 것 챙겨서 이쪽으로 건너 와요.
반찬이라도 같이 먹어요. 김치도 없을텐데."
나는 머뭇거리다가 식사거리를 챙겨서 안채로 건너갔다. 하지만 사모님은 이미 나의 밥까지 퍼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돈 안 받을테니까 편하게 드세요.
백두대간 뛰려면 잘 먹어야 해요."
밥을 떠서 한 숟가락 먹었다. 밥이 무척이나 찰지고 맛있었다. 이어 김치를 먹고 반찬을 먹는데 그 하나하나가 전부 다 맛있었다. 사모님 손맛이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2인분의 식사비를 드리며 말씀 드렸다.
"저 내일 아침밥도 같이 먹을게요.
너무 맛있어요!"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와 산나물이 있는 밥상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특이하게도 김치찌개에 표고버섯이 많았는데, 알고보니 사장님께서 표고농사를 지으신다고 했다. 탱글탱글한 표고와 쫄깃한 시골 돼지와 푹 익은 김치의 조화가 환상적이었다.
네 종류의 산나물은 익숙한 듯 낯설었는데 하나하나 전부 맛이 다르면서도 부드럽고 맛있었다. 씹을수록 고소한 향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내가 싫어하는 쓴 맛의 나물은 하나도 없었다. 전부 사장님이 속리산 자락에서 채취한 자연산이라고 하셨다. 듬성한 시골밥상 하나로 이렇게나 행복 할 수 있다니. 진정 눈물나는 맛이었다.
사장님 내외분도 백두대간 종주 이후 이 곳에 터를 잡으셨다고 말씀하셨다. 사장님이 백두대간을 꿈꾸셨고 사모님은 산 좋아하는 남편을 따라 다니셨다고 한다. 등산도 시골생활도 사모님 입장에서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남편이 하자고 하니 같이 한다고 하셨다.
지기재 산장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었다. 지기재 산장의 사장님도 본인이 좋아 백두대간 인근에 터를 잡았고, 그래서 억지로 따라 내려온 아내는 툭하면 서울나들이를 한다며 농담처럼 말씀하셨었다.
피앗재 산장 사모님은 시골생활이 답답하다시며 지금이라도 도시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대간 종주를 하며 만나는 시골분들은
"참 좋은 곳에 사시네요. 부러워요."
라고 말씀드리면, 거의 대부분이
"우리는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더 부러워요."
라고 대답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시골의 조용한 생활을 부러워하고,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도시의 편의성을 부러워한다. 나도 시골생활이 부러웠지만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생활보다는 지천으로 떠도는 것이 더욱 좋았고, 전국을 떠돌자면 사실 서울보다 편한 곳은 없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8구간
진행 구간 : 못제(경북 상주시)-형제봉-피앗재-피앗재 산장 숙박(충북 보은군)
진행 날짜 : 2012년 5월 29일 / 화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